278화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걸?”
중심부로 향할수록 민간인들의 모습은 사라져 갔다.
헌터들과 군경들의 모습은 여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생사 여부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한강 다리 건너편은 이미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이게 이준이 벌인 일….”
여기저기 널린 민간인들의 시체와 눈을 감지 못한 헌터들의 유해.
끔찍하게 훼손된 그들의 육체를 복구시킨 서아는 짧은 묵념을 보냈다.
지금 이곳 주변을 활개치고 있는 언노운들은 평균 B급에 해당하는 개체들이었다.
“월영식 - 적!”
“버티!”
“수라천도!”
“블러디 피어스!”
A급과 B급 헌터.
팀 H의 인원들까지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언노운들의 숫자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전쟁 기념관이 이제 코앞이야. 조금만 더 가면 돼.”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이안은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최대한 온전하게 힘을 비축해 둬야 했다.
“응. 나도 알아. 그렇지만….”
주먹을 움켜쥔 서아가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때렸다.
“화가 치밀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던 나한테.”
심하게 균열이 인 잔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푸른색이 감돌던 그녀의 나비 리본엔 순간 붉은빛이 돌았다.
“용주 오빠! 저기!!”
전투를 이어 가던 예나가 다급하게 용주를 불렀다.
언노운의 배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준 용주는 입에 물고 있던 머리를 던졌다.
예나가 가리킨 곳엔 생존자 무리가 있었다.
십여 명의 헌터와 이십여 명의 군경들로 이루어진 무리는 필사의 사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네크로 클록’
조금 전 쓰러뜨린 언노운 중 일부를 두른 용주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공중을 선회하는 언노운들을 도륙하는 용주.
비처럼 쏟아지는 언노운의 피와 살점 사이로 떨어진 용주는 몸을 잃고도 살아 있는 머리를 날려 버렸다.
“헌터….”
“우리 말고도 생존자들이 더 있었군요!”
“다행이야. 더는 버티기 힘들었는데!”
무리 중앙에 떨어진 용주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무리를 구성하고 있는 헌터는 대부분 B급.
10명 중 2명은 C급이었다.
경찰과 군인들은 권총과 라이플을 소지하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냥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언노운들은 계속 쏟아져 나올 거다. 민간인들의 대피가 끝났으면, 너희도 몸을 사리는 게….”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 용주가 갑작스럽게 지면을 때려 부쉈다.
갈라진 대지를 뚫고 솟구치는 사슴벌레의 머리.
놈의 머리를 두 동강 낸 용주는 잘린 몸통에 녀석의 머리를 거꾸로 처박았다.
“땅속에서 언노운이….”
“그대로 있었으면….”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헌터들이 용주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기 또 온다!”
언노운을 발견한 한 군인이 외쳤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언노운 무리는 떼를 이루어 차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뭐지?”
“저 녀석들, 갑자기 방향을 틀었어!”
“어째서….”
분명 이쪽으로 직행해 오던 언노운의 무리가 대로를 끼고 양쪽으로 찢어졌다.
선발대만이 아니었다.
뒤따라 오던 무리들 역시 의식적으로 이쪽을 피해 가고 있었다.
“양쪽에서 습격해 오려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언노운들은 양쪽에서 덮쳐 오는 게 아니라 양쪽으로 갈라져 도망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
무리 생활을 하는 저 언노운들이라면, 이미 수십 번이나 상대해 본 종인데….
‘그때 그건가, 이건.’
지난번 게이트가 열렸을 때.
언노운 중 한 종류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해 갔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때와는 차이가 있었다.
대항력에 새로이 발현된 ‘패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 부상자들의 치료. 맡겨도 되겠지?”
뒤따라 온 수지와 마주 선 용주가 물었다.
“응. 걱정 마.”
“부탁한다.”
잿빛 안개를 두른 용주는 조금 전 달아난 무리 중 하나를 쫓았다.
“케라라락!”
사뿐히 내려앉은 잿빛 안개에 무리를 이끌던 언노운이 급하게 멈춰 섰다.
“이쪽으로 넘어온 이상. 살아 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룬검에 깃드는 푸른 빛.
용주에게서 흘러나오는 짙은 한기에 주변 일대가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복종하거나, 죽어라.”
어느 선택지를 고르든 종착지는 같았다.
다만, 살아 있는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
“캐락!”
“캐라락!”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주고받은 언노운들은 일제히 숨겨 두었던 날개를 펼쳤다.
메뚜기 떼처럼 솟구치는 언노운들.
도로와 건물을 타고 세 방향에서 달려드는 언노운을 마주한 용주는 룬검을 박아 넣었다.
빙하를 뚫고 날아오른 보좌관은 일직선상에 있는 모든 것을 얼려 버렸다.
“사… 살았다!”
근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용주는 고개를 돌렸다.
얼음에 뒤덮인 맨홀 뚜껑을 열고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인원은 대략 다섯.
다섯 모두 헌터였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젠 끝났구나 싶었었는데.”
“저쪽으로 가면 의료 헌터랑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들의 부상을 확인한 용주가 이야기했다.
적어도 녀석들 중 하나는 당장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젠장. 그 녀석들이 그 난리만 안 피웠어도!”
“그래 놓고 우릴 미끼로 던져 주고 갔지. 나쁜 자식들!”
사내들의 분노에 용주가 관심을 가졌다.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실은 중간에 다른 헌터 무리랑 조우했었거든. 힘을 합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랬더니 그러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잠깐 같이 있게 됐었는데, 그 녀석들 뭔가 좀 이상하더라.”
“이상해?”
“아! 그렇다니까! 언노운을 산 채로 생포해야 한다나 뭐라나!”
“덕분에 다 잡은 언노운을 놓고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시간이 끌렸고, 그사이 몰려든 언노운들 때문에 전황은 엉망이 됐지.”
“그 사람들, 상황이 안 좋아지니까 저희만 두고 도망갔어요. 저쪽으로 갔었는데….”
‘언노운을 산 채로?’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든 용주는 일단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의 중요도를 따지면, 지금 다른데 신경 쓸 여력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준이 뭔가 수를 써둔 걸지도….
* * *
그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온 용주는 지금까지와 달라진 풍경을 마주했다.
초록색의 점액이 일대를 전부 잠식하고 있었다.
주변엔 언노운들의 시체와 함께 깨진 알들이 널려 있었다.
‘이런 풍경, 뭔가 낯이 익는데.’
끈적이는 점액을 밟은 용주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섰다.
새끼를 낳는 언노운.
군집 생활을 하던 그 녀석들의 둥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녀석들은….”
고층 건물 위로 날아오른 용주는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용주의 눈에 들어왔다.
‘저 녀석들인가?’
사람들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50에서 100명.
얼핏 봐도 그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런데 저 녀석들 지금 뭐 하는 거지?’
사람들이 언노운을 철제 수레 같은 곳에 싣고 있었다.
말이 좋은 수레지 무한궤도를 가진 저 물체를 용주는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각 수레마다 수십 마리의 소나 말들이 있었고, 헌터론 보이지 않는 양복 차림의 사내가 분주하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언노운을 산 채로….’
포박당한 언노운의 종류와 상태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팔다리가 모두 잘려 나간 채로 쇠사슬에 묶인 녀석이 있는가 하면.
사지 멀쩡하게 잠이 든 것처럼 보이는 녀석도 있었고, 부화하지 않은 알 그대로 실린 것도 있었다.
‘대체 저걸로 뭘 하려고?’
잿빛 안개를 두른 용주가 다시 한번 날아올랐다.
생각할 시간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녀석들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녀석들에게 직접 들으면 그만일 테니.
말할 생각이 없다면, 말하게 만들면 그만이고.
* * *
“아! 거, 좀 살살 좀 다뤄! 생채기라도 나면 책임질 거야?!”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책임질 거냐고! 최대한 살살! 보석 다루듯이 하란 말이다! 보석 다루듯이!”
사내의 지시대로 움직인 사내들이 언노운을 수레에 실었다.
“그럼 이 녀석까진 됐고, 이제 저 녀석만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
인부들이 힘쓰는 걸 지켜보던 헌터들이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코끼리보다 거대한 체구.
굼벵이가 연상되는 비주얼.
단단하며, 동시에 신축성 있는 갑피.
잔뜩 웅크리고 있는 이 녀석은 놀랍게도 A급에 해당하는 개체였다.
그것도 수많은 알을 낳는 무리 어미.
이 녀석의 신병을 확보하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겨우 이만큼 받고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뭐, 겨우 이만큼이라고 해봤자, 보통 사람들한텐 평생 모아도 벌기 힘들 금액이겠지만.
“B급 사이에 A급이 섞여 있었다니. 완전 핵폭탄이었어요. 그쵸, 준호 씨?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친위대들까지 전부 부화했을 거라고요.”
상필이 어깨를 들썩였다.
눈과 겹쳐 놓은 호루스의 눈 문신이 특징인 그였다.
“덕분에 추가 수당까지 왕창 붙었잖아? 인생 돈이면 못 할 게 뭐 있겠어?”
준호가 현란하게 단검을 돌렸다.
배준호.
A급 헌터인 그는 이 헌터 무리를 이끌고 있는 사내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어떻게 하죠? 다른 녀석들이랑은 몸집도 무게도 격이 다른데.”
“싣는 것도 문제고, 어찌어찌 실어도 바로 깡통행일 것 같은데요.”
“너희 A급 헌터를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니냐? 괜히 준비 중이었던 사업에 핵심 인물로 고용된 게 아니란 말이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준호는 가지고 있던 구슬 하나를 꺼냈다.
가볍게 내던져진 쇠 구슬에선 가스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났다.
갈기갈기 찢긴 도로엔 쇠 구슬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게 같은 건 내 앞에선 단순한 숫자놀이에 불과해. 녀석을 여기까지 끌고 온 시점에서 그런 걱정을 하는 건 자기가 등신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한심하단 듯 고개를 저은 준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
“뭐야!”
잿빛 안개가 동그랗게 퍼져 나갔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낀 헌터들이 거리를 벌렸다.
손에 든 단검을 휘적거리던 준호는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지. 좋은 말 할 때 불었으면 하는데.”
“헌터?”
용주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용주의 외형.
용주의 힘.
두 가지 모두 헌터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 녀석, 뭐야? 뭔 기괴한 걸 두르고 있는데?”
모든 상황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사내가 물었다.
양복을 입은 이 사내의 이름은 ‘차현민’.
사업을 크게 성공시킨, 부자 중의 부자였다.
“사장님. 저 사람 굉장한 실력자가 분명합니다.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투자하시는 것 이상으로 분명 벌 수 있을 겁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호기심을 보인 현민이 용주에게 다가갔다.
“여기서부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차림새를 정리한 현민이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손봤다.
인부들을 다룰 때와는 확연히 다른 톤과 억양이었다.
“네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의 책임자인 모양이지?”
준호를 노려보던 용주의 시선이 현민에게 향했다.
“네. 차현민. ‘엘성’이라는. 작은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소시민입니다.”
“작은 회사라고?”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이름은 용주가 알고 있을 만큼 거대한 규모의 회사였다.
“그래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이 언노운들로 뭘 하려는 거지?”
“새 사업을 하나 진행해 볼 생각입니다.”
“사업이라고?”
“네. 구상은 크게 두 갈래로 해봤습니다. 하나는 실제 살아 있는 언노운들을 볼 수 있는 테마파크를 만드는 것, 다른 하나는 언노운 도축장을 만들어 안정적인 상품을 공급하는 것.”
“제정신으로 하는 이야기냐?”
용주가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비범한 사업 아이템이야말로 성공의 지름길. 이 일을 성공시키면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미래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언노운 공원. 보급화된 이형 결정체, 상상만 해도 끝내주지 않습니까?”
비서를 부른 현민은 서류 가방을 열라고 지시했다.
가방 안엔 백지 수표가 가득 들어 있었다.
“B급은 마리당 7천, A급은 마리당 3억. 특수 개체는 거기 1억씩 더 얹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일이 성공하면 로열티도 드릴 생각입니다만.”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한 현민은 용주의 대답을 기다렸다.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현민은 당당했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오랫동안 머릿속으로만 그려 왔던 프로젝트는 지금 눈앞에서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