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 * *
멈춰 버린 차들과 먹통이 된 신호등.
붉게 물들어 버린 하늘에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차를 버린 사람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종말이 왔다며 주저앉아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울려 퍼진 이형 신호탄의 소리는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집사….”
마른침을 삼킨 예나가 버티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승우였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카오스 게이트에서나 일어날 일들이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집사.”
“네. 아가씨.”
“도망가야 할까? 도망가는 게 맞을까?”
“아버님과 어머님은 그렇게 하길 바라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용주 오빠라면 그렇게 했을까?”
“…….”
승우는 즉답하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는 건 너무 쉬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도움이 안 되는 헌터는 역시 없느니만 못하겠지. 난 용주 오빠랑 다르니까. 서윤 언니랑도, 수지 언니, 주원 오빠, 고구마 아저씨랑도….”
“아가씨.”
잠시 고민하던 승우가 무릎을 낮췄다.
“없느니만 못한 사람이란 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가씨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나?”
“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을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아가씨의 의지입니다.”
고용된 입장에서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건 고용주의 안전이었다.
집사로서의 매뉴얼이 있다면, 지금 해야 했을 말은 적어도 이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승우는 자신의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예나를 한 사람의 헌터로서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대답을 망설이던 예나의 눈에 한 가지 풍경이 들어왔다.
머리 위를 날아가는 수천, 수만 마리의 나비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소수의 나비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비?”
넙죽 엎드린 사람들이 ‘재앙’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예나의 생각은 달랐다.
저 부자연스러운 나비들은 분명….
“갈래. 용주 오빠한테.”
“알겠습니다. 그럼….”
예나를 안은 승우가 가볍게 뛰어올랐다.
바람에 몸을 실은 승우는 나비가 날아온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 * *
위이잉!!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소리를 전기 신호로 변환하는 시우에게선 엄청난 양의 전류가 흘러나왔다.
시우가 만드는 전기 신호는 아까 처음 선보였던 것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처음 만들었던 신호가 한 번 치고 마는 번개라면,
지금 만들고 있는 신호는 연쇄 번개.
한번 소리로 변환된 신호는 다시 전기 신호로 바뀌어 퍼져 나간다.
이거면, 일인 송신소의 역할을 더 확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길드에서 알린다. 남산 일대에 강력한 카오스 게이트가 형성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전역에 긴급 사태를 선포하고, 대피령을 내린다. 다시 한번 전한다. 이건 실제 상황이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전기 신호가 소리로 변환되었다.
중심부에서 펴져 나가는 물결처럼.
시우의 목소리는 수도권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헌터들은 들어라. 지금 열리고 있는 게이트는 우리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차원 압력의 크기와 정도를 예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길드는 최악의 수를 가정할 수밖에 없다. 본인을 지켜라. 이건 길드의 결정이다.”
솟구치는 다섯 번개의 중심.
같은 전기 신호를 몇 번이나 발산한 시우는 번개를 거두었다.
자신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된 거지?”
“그래. 고생했다.”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로비로 내려갔다.
“아주 잘 들리던데? 우리 시우 목소리가 그렇게 좋은지 몰랐어.”
이안의 환대에 시우가 불쾌감을 표했다.
“뭐,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추 끝냈으니, 움직이자. 최대한 중심부에서 전개해야 최대한 많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을 테니까.”
이안이 제안에 모두가 이동을 서둘렀다.
그때.
“정말 괜찮겠어? 이렇게 자리를 비우는 거.”
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준이 하던 것처럼 하길 바라는 거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비상시 컨트롤 타워의 역할은 두말할 필요가 없잖아? 개인의 신분으로 뭘 하든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지금의 넌 길드의 최고 책임자니까.”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형만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자신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공식적으로도 이안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 서아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우리 길드장님의 판단에 힘을 실어 주고 싶은데.”
“…….”
“알잖아? 준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였어도 가만히는 못 있었을 거야.”
서아가 고개를 돌렸다.
이준이 한 일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어.”
로비를 나선 용주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은 엇갈릴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서둘렀는데 말이야.”
찰랑거리는 분홍 머리와 당돌한 눈빛.
S급 헌터들 앞을 지난 서윤은 정확히 용주와 마주 섰다.
“어떻게 여기 있냐고 물으려는 눈빛이네. 저런 말도 안 되는 걸 당연하게 하는 게 너 말고 또 누가 있겠어?”
허리춤을 짚은 서윤의 눈이 한발 늦게 동그래졌다.
단순히 수지가 옆에 있다든가, 수호가 근처에 있다든가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용주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전혀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용주 형이 가는데 제가 빠질 수야 없죠. 안 그래요?”
기다리고 있던 이는 서윤만이 아니었다.
“부족한 힘이지만,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네.”
“트라우마에 떠는 건 한 번만 하기로 했거든요.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꼭 함께 가고 싶어요.”
주원, 금화, 태영.
“집사! 저기!”
“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장관인걸요, 아가씨?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저희만이 아니었나 보네요.”
예나와 승우.
“아~ 다행이다. 늦는 줄 알았네.”
“이형 워프 장치가 먹통인 걸 보니, 아직 여기 있을 것 같더라고.”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샐러맨더가 아니지.”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인데, 같이 싸워 달란 한마디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니냐, 이 고집쟁이야?”
그 밖에 다양한 헌터들이 속속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A급과 B급.
단순히 형만에게 연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E급 게이트에서 용주와 만났었던 헌터들.
D급에서 만난 바람머리 헌터와 물범 문신 헌터.
팀 H와 합동 임무를 맡았었던 차병규 헌터.
힘의 크기에 구애받지 않은 다양한 사람들이 ‘헌터’라는 이름 아래 여기 있었다.
“본인을 지키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인파를 내려다보던 형만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그렇게 하고 있잖아!”
“뭐라고?”
“우리를 지키는 방법은 할 수 있는 전부를 다해 보는 거야.”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게이트가 열리고 있다면, 우리도 지금보다 더 힘껏 발버둥 쳐봐야 하지 않겠어?”
“맞아요!”
“맞습니다!”
헌터들이 저마다 투지를 불태웠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여기 있는 전원. 각오하고 온 걸 거다.”
“맞습니다!”
“언젠가 한 번 죽을 인생이라면, 걸어 볼 가치가 있는 곳에 걸겠어요.”
“감사지졸! 사생유명! 오늘 죽을 운명이라면, 어디 있어도 똑같을 겁니다. 헌터가 뼈를 묻을 곳은 죽기를 각오한 곳입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던 형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송이 녀석들…. 죽고 나서 딴소리해도 난 모른다.”
“그럼 결정 났네요.”
형만의 결정을 기다리던 승우가 손뼉을 부딪쳤다.
그 순간, 모두의 다리를 휘어 감는 바람.
헌터들의 발목에 머무는 바람은 모두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 * *
“질서를 지켜 주세요!”
“패닉에 빠지면 될 것도 안 됩니다! 저희 지시에 따라 안전하게 이동해 주시길 바랍니다!”
패닉에 빠진 도시는 간신히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피난을 포기한 경찰과 군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피난을 돕고 있는 이들 중엔 민간인 차림의 이들도 있었다.
헌터들이었다.
“어이.”
빠른 속도로 코너를 돈 수호가 나지막이 불렀다.
“네, 저도 느끼고 있어요. 이거, 점점 더 안 좋아지는걸요?”
작은 한숨을 삼킨 나은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금 나비가 날아다니는 붉은 하늘엔 수많은 뒤틀림이 생기고 있었다.
그리고.
“언노운이다!!”
하늘에 생긴 균열에서 한 무리의 비행 타입 언노운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간인을 보호해!!”
“언노운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 너흰 대피에나 신경 써. 총알 한 발도 제대로 못 쏘면서 뭘 하겠다고?”
경찰과 군인들의 앞을 막아선 헌터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차원 압력의 정도는 아직 그대로였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성가시게 파닥거리지 말고 꺼져!”
빌딩을 수직으로 오른 시우가 뇌격을 선사했다.
까만 재가 되어 버린 언노운들은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칫! 뭐야. C급보다도 못하잖아. D급은 되려나?”
반대편 빌딩에 선 시우는 주변을 살폈다.
하늘에 열렸던 게이트는 시작에 불과했다.
간헐적으로 여닫히는 도시 전역에 언노운을 풀어 놓고 있었다.
“게이트의 여파로 주변 전체에 뒤틀림이 일고 있는 건가…?”
조금 전 열린 카오스 게이트는 일정 숫자의 언노운을 뱉어 내고는 사라져 버렸다.
보통의 게이트에선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안정화에 필요한 시간도.
게이트가 닫히는 데 필요한 조건도 무시하는 불안정 게이트.
그게 여기 열렸다는 건….
“네. 아마 그럴 거예요. 언노운이 나타난 건 아무래도 여기만이 아닌 것 같고요.”
용주와 나란히 선 나은이 이야기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서윤이 물었다.
“수도권 전역에서 헌터들의 힘이 느껴져요. 모두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어요.”
“언노운이….”
검을 뽑아 든 서윤이 앞서 열린 게이트에서 쏟아진 언노운들을 도륙했다.
한 합조차 버티지 못한 언노운들은 E급에 불과한 녀석들이었다.
“여긴 저희에게 맡기시고 어서 가십시오.”
앞선 헌터들이 일대의 언노운들을 청소하는 사이.
뒤처졌던 D급과 E급 헌터들이 도착했다.
“이 종류야 내가 전문가지.”
“내가 너희들 잡아서, 얘들 대학까지 다 보냈어!”
검을 뽑아 든 헌터들은 언노운과의 전투를 이어 갔다.
상위 등급의 헌터들처럼 압도적인 도륙은 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성공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언노운들을 격퇴해 나갔다.
“그래. 맡기마.”
잠시 고민하던 형만은 남은 인원들을 이끌었다.
본인을 지키라는 말을 다르게 해석한 애송이들은 거기 모였던 녀석들만이 아니었다.
* * *
63빌딩을 지난 무리는 한강대교 인근에 도착했다.
인원은 더 줄어 C급 헌터들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금화, 예나, 주원.
예외는 그 셋 정도뿐이었다.
“그 녀석 때문인지 속이 안 좋아.”
용주와 나란히 뛰고 있던 서윤이 매스꺼움을 표했다.
이 매스꺼움의 원인은 차병규 녀석이었다.
갖은 폼이란 폼은 다 잡고, 노골적으로 집적거리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뭐, 그러냐?”
“그게 끝이야?”
“…….”
병규가 아닌 척 대시하고 있을 때.
그녀의 손을 잡아끈 용주는 새침데기 같은 투머치 토커에게서 그녀를 빼내 주었었다.
서윤은 거기서 한 발 더를 바랬던 것 같지만….
용주는 그 기대에 부응해 주지 못했다.
“언노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수지가 이야기했다.
곤란해하던 용주에겐 구원 투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남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출현하는 언노운들의 등급이 올라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강한 언노운이 출현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었지만, 그것보단 전자에 조금 더 힘을 싣고 싶었다.
왜냐면, 사방에 널린 언노운들의 유해가 약한 개체부터 차례차례 쌓인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
한강 대교를 건너던 형만이 속도를 줄였다.
다리가 반파되어 있었다.
한강엔 언노운들의 사체가 떠다니고 있었고, 불행하게도 헌터들의 유해 역시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
지그시 입술을 깨문 수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사내의 유해에 한 사내가 끊임없이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의료 헌터.
이 패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래도 이 사람뿐인 모양이었다.
“후우….”
수지와 별개로 움직인 용주는 경계면으로 다가갔다.
룬검의 힘을 이용해 끊어진 다리를 임시로나마 복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용주보다 먼저 움직인 자들이 있었다.
염동력을 사용하는 헌터와 바위를 부리는 헌터는 무너진 다리를 복구해 보려 시도하고 있었다.
“좀비헌터, 그리고 모두들. 여긴 저한테 맡겨 주셨으면 하는걸요.”
강철 포켓을 만지작거린 태영이 최전방으로 나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태영은 무너진 다리 사이에 떠 있었다.
“전부가 한꺼번에 건너도 안 끊어질 만큼 탄탄하게 엮었어요. 보기엔 좀 그렇지만요.”
엮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다리는 무너진 그대로였다.
다만, 남아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끊어진 이 다리가 지금 이어져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