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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76화 (276/357)

276화

“이거 안 좋은데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은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전조들은.

역시 그때가 떠오르는 것들이었다.

“내가 가서 좀 살펴보고 올게.”

서아가 이형 워프 장치를 꺼냈다.

그런데.

“뭐야?”

뭔가 이상했다.

이형 워프 장치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안 되잖아? 이거 반응이 없어.”

“아마 저 이상의 여파일 거야.”

서아의 손에 들린 워프 장치를 쥔 이안이 장치를 던졌다.

포탈을 열어야 할 장치는 그대로 땅에 떨어져 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카오스 게이트 안에서 이형 워프 장치를 쓸 수 없는 거랑 마찬가지란 거야.”

“그렇지만 게이트가 안정화되는 시간은…!”

“1주일. 맞아. 보통이라면 그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아직 안정화되지도 않은 게이트가 이렇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다고?”

불가능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쌓아 왔던 지식과 경험으론 그랬다.

하지만….

“알잖아? 준이가 연 문이란 거. 지금까지의 상식은 통용되지 않을 거야.”

이안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현실과 게이트의 교집합.

신설동역에 열렸던 카오스 게이트는 보통의 게이트와 달리 에고 스피어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금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단지, 그 정도에만 차이가 있을 뿐.

여기서 만약 뒤틀림이 더 심해져 두 차원의 경계선이 희미해진다면….

거기서 봤던 지옥이 에고 스피어의 영향권 전체에서 나타날 것이다.

언노운과 차원 압력은.

핵폭탄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낼 테지.

“이제 막 에고 스피어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했을 뿐이야. 게이트가 열렸으면, 이 정도론 안 끝났을 거야.”

“전조만으로 이 정도….”

서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 일대가 에고 스피어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건….

서울.

아니, 어쩌면 수도권 전역이 카오스 게이트의 영향권 안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럼 만약 게이트가 안정화되기라도 하면….

“있잖아, 이안. 지난번 서울에 게이트가 열렸을 때, 차원 압력에 사람들이 죽었던가?”

“아니. 다 엉망이 됐어도, 거기까지 가진 않았었지.”

“이번 게이트도 그럴까?”

“…….”

웃음기 없는 이안의 침묵.

두 가지 모두 서아에겐 끔찍하게 소름 끼치는 대답이었다.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해.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전기, 통신, 이형 워프 장치.

그 모든 게 마비된 시점에서 어떤 식으로 대피시켜야 할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피시켜야만 했다.

S급 게이트의 에고 스피어.

그 영향권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서울은 지옥으로 변할 거다.

“뭔가 방법이….”

초조하게 움직이는 서아의 발걸음.

모두가 고뇌에 빠져있던 그때. 갑작스럽게 전기가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왔어?”

고개를 돌린 수지의 눈에 한 인물이 들어왔다.

짜증이 잔뜩 난 듯 보이는 백발의 사내는 회의실로 걸어 들어왔다.

“워프 장치도 난리, 핸드폰도 난리, 이어폰도 난리. 갑자기 뭔 난리래, 이게? 짜증 나게.”

시우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흐음~ 우리 시우, 꽤 재밌는 것도 할 줄 아나 보네?”

이안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시우는 그가 부담스러운 듯 거리를 두었다.

“하도 난리길래 살짝 손 좀 봤을 뿐이야. 그리 오래가지도 않을 거고.”

“힘을 더 쓰면 더 오래가겠지. 그치?”

“…….”

시우가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거야 그렇겠지만… 내가 무슨 발전기냐고? 난 그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었단 말이야.”

고개를 돌린 시우의 눈에 용주가 들어왔다.

용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럼 뭐 하려고 온 걸까나, 우리 시우는?”

“부탁받은 일이 있었어. 저기 샐러맨더 아저씨한테. 아니지. 그건 그냥 명령이라고 해야 하나?”

머리를 긁적인 시우가 작은 메모리 칩 하나를 건넸다.

“메모리 칩?”

용주가 의문을 표했다.

“오성덕 녀석의 컴퓨터 데이터 복사본이다.”

“녀석의?”

“녀석이라면, 팬텀에 대한 정보를 이리저리 남겨 놨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보기랑 달리 그런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시우의 손을 떠난 칩은 그대로 서랍으로 직행했다.

라스나 글러트니에 대한 정보가 있을까 했었는데.

한발 늦어 버린 지금 시점에 이걸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지직!

그 순간 다시 꺼져 버린 전등.

번쩍하는 스파크와 함께 불이 켜진 건 그로부터 불과 몇 초 뒤의 일이었다.

“뭐야?”

고개를 돌린 시우의 시선이 나은을 향했다.

지금 이건 자신이 한 일이 아니었다.

“비상 전력기가 있었나 보네.”

“아뇨. 전 그쪽이 있기에 돌아가는 보조 배터리일 뿐인걸요.”

나은의 손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시우의 힘을 모방한 것이었다.

“여기 전력을 복구할 수 있단 건 다른 시설의 전력도 일시적으로나마 복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니냐?”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용주의 시선이 형만을 향했다.

“가능이야 하겠지.”

형만이 고뇌에 빠졌다.

송신 시설을 일시적으로 복구한다 쳐도 수신 시설이 마비되었다면,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헌터들이 가진 이형 신호탄이라면, 좁은 범위 정도는 경고할 수 있겠지만.

수도권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날로그한 확성기조차도 지금 상태론 먹통일 테고.

“나한테 한 가지 생각이 있다만.”

“흐음~? 그래? 어디 꼭 한번 들어 보고 싶은데.”

용주의 이야기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황금보검을 꺼내 든 용주는 나비 한 마리를 만들었다.

단순한 조각처럼 보이던 나비는 기지개를 켜듯 날개를 펄럭였다.

“황금으로 된 나비?”

“지난번에 봤던 그거네.”

자유로이 날아다니던 나비는 수지의 손가락에 앉았다.

“그래. 거기까진 그렇지. 라이덴!”

용주의 부름에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회색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라이덴.

뼈와 뿔로 이루어진 라이덴의 몸을 타곤 빛과 전류가 흘렀다.

수지의 손을 떠난 나비는 용주 곁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나비의 작고 가냘픈 몸에 전류가 떨어졌다.

전류를 머금은 나비는….

죽지 않고 여전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단 듯이.

“하. 지난번에도 그러더니만, 별 이상한 걸 데리고 다니는구만. 그런 건 어디서 주워 오는 거냐?”

수호가 어이없음을 표했다.

지난번 전기톱을 휘두르던 녀석도 그랬지만,

이번엔 그것보다 더 나간 놈인 모양이었다.

“뭐가 달라진 거야?”

수지가 물었다.

겉으로 봐선 크게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았다.

“뭐, 보면 알 거다.”

용주의 시선이 시우를 향했다.

“뭐? 말을 해, 말을.”

“소리에서 전기 신호로, 전기 신호에서 소리로. 사운드의 입력과 출력은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전기 신호로 변환한 소리를 이 녀석에게 쏴 줬으면 하는데.”

“하아?”

시우가 황당함을 표했다.

발전기 다음은 마이크 취급이라니.

아니, 애초에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 아닌가?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꿔서 쏘라고? 너,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 보니 제정신 아니구나?”

시우가 키득거렸다.

“못 하는 거냐?”

“크큭! 웃기지 말라고.”

용주의 도발에 반응한 시우에게 스파크가 일었다.

“못 할 리가 없잖아, 멍청아!”

이윽고 터져 나오는 시우의 목소리.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시우가 아닌 나비였다.

확성기를 쓴 듯 증폭된 소리는 분명 나비에게서 나온 소리였다.

“터무니없는 녀석이란 건 알았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하네.”

서아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 발상 자체도 그렇지만, 그걸 현실로 만들어 내다니.

이안조차도 그걸 현실에서 구현하진 못하는데.

“이야기는 알겠어요. 무슨 생각인지도 알겠고. 근데 이거 하나론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요.”

나은이 이야기했다.

용주의 힘을 모방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금 그 힘을 모방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나만 만든다고 누가 그랬던가?”

창가로 다가간 용주는 그동안 모아 왔던 골드란 골드는 밑바닥까지 긁어냈다.

“!”

허공에 그려지는 수천, 수만 마리의 나비들.

황금이 채워진 나비들은 저마다의 생명을 부여받으며 날아올랐다.

짧은 시간 동안 탄생한 나비는 하늘을 노랗게 물들였다.

에고 스피어는 인류가 만든 시설과 설비를 대부분 무력화시켰지만, 퀘스트 게이트에서 나온 물건은 그 영향권을 벗어나 있었다.

“이야~ 이거 장관인데.”

몰아치는 번개를 올려다보던 이안이 감탄을 표했다.

한 마리의 전달력엔 한계가 명확했지만, 이 정도의 숫자라면….

수많은 위성을 우주에 뿌려 지구 어디서나 통신이 가능하도록 만들겠다던 어느 프로젝트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태평하게 그런 소리나 할 때야?”

“하핫! 잔소리는 1절만 받을게.”

이안이 먼저 선을 그었다.

“이봐. 다들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은 거 아니냐?”

수호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헌터들이면, 나보단 먼저 생각해야 정상 아니냐? 그 많은 인원이 차도, 전철도, 비행기도 없이 대피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난 상상도 안 되는데. 과연 그때까지 기다려 줄까?”

서울, 경기. 인천.

수도권의 인구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50%에 육박한다.

그 많은 인구가 한국 전쟁 때처럼 피난길에 오르는 게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 거다.

핵 대피소처럼 언노운을 대비한 보호 시설이 수도권 곳곳에 있긴 했지만, 이번 경우는 그런 시설 또한 무용지물이었다.

보호 시설은 차원 압력을 막아 주진 못할 테니 말이다.

“예리한걸? 그렇지만 그 점이라면 생각해 뒀어.”

입꼬리를 올린 이안이 나은을 바라보았다.

“우리 나은이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불안하게.”

“어때? 내 힘도 모방할 수 있겠어? 전에 한 번 보여 줬던 거 같은데.”

여기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 일이 기억에 혼란이 있는 그곳에서의 일이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지금 자신의 상태가 말이 아니기 때문에.

“못 할 것 같다고 투정이나 부릴 상황은 아니잖아요? 안 되도 되게 해야죠.”

눈을 감은 나은이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물결치기 시작하는 차원.

나은의 발밑에서 시작된 푸른 초원은 어깨너비만큼의 차원을 잠식했다.

“얼마나 크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얼마가 됐든, 필요한 만큼 늘려 봐야죠.”

“그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

“몸이 부서질 때까지 해봐야죠.”

“역시. 믿음직스럽다니까.”

손가락을 튕기는 이안에게 서아가 다가왔다.

“이안. 설마, 수도권 사람 전부를 다른 차원에 수용하잔 생각은 아니지?”

“거의 비슷해.”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쉽진 않겠지. 그만한 숫자를 삼키면, 저번처럼 뒤틀릴지도 모르고.”

글러트니를 떠올린 이안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서 나도 이번엔 처음 해보는 방법을 시도해 볼 생각이야.”

“처음 해보는 방법?”

“응. 에고 스피어를 만들어 볼 생각이거든. 카오스 게이트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에고 스피어를 만든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차원을 덮는 게 아니라, 겹쳐 놓는 거지. 그럼 이쪽이 받는 부하는 줄어들 거고, 차원 압력에서 지켜 줄 우산 정도는 씌워 줄 수 있을 거야. 더 적은 마나로, 더 넓은 차원을 전개하는 것도 가능할 거고.”

이안이 작은 차원을 전개했다.

새롭게 열린 차원은 회의실과 융화되지 못하고, 전혀 독립된 차원을 만들고 있었다.

“뭐, 대신 완전 분리 된 차원으로 이끌진 못하겠지. 그래도 안전하게 대피할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는 거 아니겠어?”

선명도가 변화하는 차원.

반복된 일렁임 끝에 이안이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그건 이안이 힘을 멈췄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주 희미하게 남은 경계는 이곳의 차원이 두 개란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아니. 이것뿐이야.”

이안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넌 지금 제대로 힘도 못 쓰잖아! 뭘 어쩌겠다고! 나은이보고 알아서 하라는 거야?!”

“아니, 우리 나은이한텐 보조적인 역할만 맡길 거야. 메인은 어디까지나 나라고.”

“아니! 그러니까!”

“쓰러지면 일으켜 세워 줘. 심장이 찢어지면 다시 꿰매 주고. 더 이상 무리라고 징징거리면 한 대 때려 줘. 부탁할게.”

“…….”

서아가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이럴 때만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반칙이지 않은가?

“지난번 서울에 S급 게이트가 열렸을 때 거리는 텅 비어 있었어.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그랬어.”

“…….”

“통신도, 시설도 분명 전부 마비됐을 텐데, 어떻게 그랬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 하지만 전부 무사히 대피했던 것만은 확실히 기억해. 어쩌면, 미래를 알고 있던 누군가 미리 대피시켰던 걸지도 모르지.”

서아의 어깨에 손을 올린 이안이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이번에도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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