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눈이 둘씩이나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용주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TF 쪽과 긴밀한 협력을 약속받았다.”
형만이 대답했다.
“제 쪽으로도 직접 오셨었어요. 꼭 도움을 받고 싶다면서.”
나은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태스크 포스와 관련된 일은 끼어들지 못하는 거 아니었냐?”
“그때랑 마찬가지예요. 태스크 포스가 하는 일에 반하지도 않고, 두 다리 뻗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 말이에요.”
“뭐, 그러냐?”
더 이상 깊게 묻지 않기로 한 용주는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우리 준이는 어디 있는 거냐? 슬슬 말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
“어이.”
이안의 물음에 수호가 그를 불렀다.
“너…. 그때 거기 있던 S급 헌터냐?”
“…아마 그럴걸.”
“무슨 일을 당한 거냐, 대체?”
“노코멘트.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해 줄게. 소주 한 병 까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은 좀 봐줘.”
대답을 회피한 이안이 형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준이는 어디에 있는 거야? 부산? 제주도? 울릉도? 독도? 그것도 아니면 해외인가?”
“녀석의 존재가 감지된 곳은 서울이다.”
“서울이라고…?”
“그래. 좀 더 정확히는 남산 타워를 중심으로 그 근방이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렇게 사라졌으니, 당연히 좀 더 멀고, 은밀한 곳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 그걸 노린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대는 이준이다.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서아의 물음에 형만이 대답했다.
“그 이상의 이유라. 혹시 생각해 둔 예시라던가?”
이안이 눈썹을 들썩였다.
형만이라면, 분명 그쪽으로도 생각을 해봤으리라.
“상징성 혹은 합리성. 내가 생각해 본 건 그렇게 두 방향이다.”
“흐흠?”
“서울은 여러 의미로 상징적인 도시다. 대한민국의 심장이자, 질서지. 한 번의 사건으로 가장 큰 임팩트를 만드는 데 서울만 한 곳이 없을 거다.”
“…….”
“기존 질서. 그러니까 헌터 길드와 그 시스템을 박살 낸 장소이기도 하니. 일석이조겠지.”
“음…. 그래. 이해했어. 그럼 합리성이란 부분은?”
“이전 게이트의 매개는 그 관과 한태영 애송이었다. 부서진 관의 잔해를 조사해 본 결과. 그게 이형 결정체를 가공해 만든 물건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 관이.”
“이형 결정체로 만든 거였다고?”
수지와 용주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 이준은 결정체 가공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필히 녀석의 작품일 테지.”
“그래서?”
“관의 안과 밖은 동일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100%는 아니었다.”
“으흠?”
“관의 안쪽이라 추정되는 잔해에는 여러 헌터들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파편화되고, 뭉개져 엉망진창이 된 끔찍한 잔재였지.”
“헌터들의 기운이라고?!”
“뒤틀림과 손상의 정도가 너무 심해 구체적인 부분까진 분석해 낼 수 없었다. 다만, 모든 잔해에서 동일한 인물의 마나가 검출되었다. 그리드 엔비. 그리고 한태영 애송이.”
서랍을 연 형만이 보관 중이던 문서 하나를 건넸다.
“애송이가 진술한 이야기다. 읽어 봐.”
진술서를 집어 든 용주는 내용을 확인했다.
태영의 진술 중 지금 필요한 부분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그리드의 관 속에서 다른 헌터들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 기운에선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다라. 어려운 표현인걸?”
용주 뒤에 선 이안이 이야기했다.
“팬텀은 이전 습격으로 많은 헌터들을 살해했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힘을 잃어버린 자들도 상당수지.”
형만이 왼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용주. 저 애송이에게 시선이 쏠린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어쩌면, 애송이에게서 시선을 떼게 하려던 연막작전이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단순히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말은…?”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은 희생자가 더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모르고 넘어갔었을 뿐이었을 수도 있지. 그리고 그동안 추출하고 모아 왔던 힘이 바로 여기 이용된 거다.”
“소름 끼치도록 재미있는 추측이네.”
“이번 게이트가 녀석이 계획한 메인이라면, 저번보다 더 큰 매개가 필요할 거다. 기껏 모아둔 매개가 서울에 있다면, 굳이 힘과 노력, 시간을 허비할 필욘 없을 테지.”
“그렇다는 건… 거기가 팬텀의 아지트였단 이야기야? 팬텀이 처음부터 서울의 심장부에 있었다고?”
“추측일 뿐이다.”
형만의 이야기에 용주가 턱을 괴었다.
확실히.
두 가지 추측 모두 일리가 있게 들렸다.
“덤으로, 팬텀에 대한 조사도 추가로 진행했다. 데이터베이스가 상당 부분 훼손돼서 애 좀 먹었지.”
패널을 조작한 형만이 3D 지도 대신 다른 창을 띄웠다.
“덤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화면엔 백발 소년의 프로필 사진이 있었다.
프라이드.
분명 녀석의 얼굴이었다.
“프라이드. 본명은 이하늘. A급 게이트 토벌 작전 중 실종되었고, 사망 처리되었다. 해당 토벌팀을 이끌던 리더는 이준이었다.”
형만이 화면을 넘기자, 또 다른 데이터가 나타났다.
“엔비, 본명은 강아린. A급 의료 헌터였다. A급 게이트 토벌 중 사망했다. 함께했던 토벌팀도 전원 사망. 사건의 뒷수습을 한 건 이준으로 되어 있다.”
화면이 다음으로 넘어가자 형만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화면에 있는 건 러스트였다.
“러스트. 본명은 한송이….”
의연하게 브리핑을 이어간 형만은 그리드, 슬로스에 대한 설명까지 마쳤다.
다섯 사람의 공통점은 분명했다.
전원 A급 헌터였고, 전원 실종되거나, 사망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이준이 관여되어 있었다.
“2명 빠졌어.”
다음 브리핑을 기다리던 수지가 이야기했다.
팬텀은 총 7명.
지금까지 형만이 말한 건 다섯뿐이었다.
“두 명. 라스, 그리고 글러트니. 이 둘에 대한 정보는 끝내 확인 불가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라면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터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라스.
그렇게 불리던 자가 사용한 월영식은 그가 누군지 가리키는 확실한 단서였다.
하지만 주원과 주원의 아버지.
할아버지인 이주일 헌터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라스와 닮거나,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없었다.
다만, 월영식을 사용한다는 점과 얼음을 다룬다는 점에선 이주일 헌터와의 분명한 유사성이 있었다.
걸리는 건 딱 하나.
자신이 목격한 그자의 모습뿐.
“하나는 내가 알 것 같은데.”
이안이 목덜미를 쓸었다.
녀석 생각을 하니 다시 오만 곳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어느 쪽이지?”
“글러트니랬던가? 그 동글동글하게 생긴 쪽.”
이안이 찐빵 모양을 그려 보였다.
“글러트니. 그 녀석 안에 든 건 언노운이라고 그랬어.”
“언노운이라고?”
“그래. 준이한테 들은 이야기니 틀림없을 거야.”
이안이 검지를 세웠다.
“참고로, 준이가 어떤 식으로 팬텀을 조직했는지에 대해서도 들은 게 있어. 이형 리액터로 뽑아낸 헌터의 정수를 이형 결정체로 빚은 몸에 넣으면, 몸은 정수와 공명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간다고. 생전 그대로의 모습일수록 온전한 힘에 가까워진다고도 그랬어.”
“이형 리액터라면. 윤현이 이야기했다던.”
형만의 머릿속에 성덕의 얼굴이 떠올랐다.
녀석이 했던 말에도 분명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었다.
녀석을 이용하려고 한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전부 거짓이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 맞을 거야. 대신 그건 작은 파편 조각이라 그랬어. 원석을 가지고 있는 건 준이 본인이고.”
“녀석은 그걸 어떻게 만든 거지?”
“거기까진 나도 몰라. 그렇지만, SS급 이상의 이형 결정체로 만든 거란 이야기는 들었어.”
“SS급? S급도 아니고? 그런 걸 대체 어디서…. 아니, 그런 게 존재하긴 하는 거야?”
놀란 서아가 반응했다.
S급 게이트.
지금의 분류 체계로 게이트의 최상위 단계는 그곳이었다.
게이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거기서 SS급으로 추정되는 개체를 목격했단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그렇다고 했었어. 본인 말대로면, 본인도 어디서 입수했는지는 모른다는 것 같았고.”
“모른다고?”
“준이가 그렇게 앞뒤 안 맞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냈을 거라곤 생각 안 해.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더 믿을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최소 SS급 언노운이라고.’
오가는 대화 속 용주가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이야기에서 떠오른 가정이 하나 있었다.
‘실베스라고 했었던가?’
죽음의 존재였던 쥬다스의 동생.
자신이 본 기억 속에 녀석의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분노한 쥬다스의 이야기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시점에서 실베스는 이미 죽은 존재였다.
만약 녀석이 S급보다 상위 존재이고, 다른 언노운들처럼 이형 결정체를 떨어뜨렸다면?
그걸 가지고 게이트에서 먼저 나간 이준이 기억을 잃었다고 한다면?
“생전 그대로의 모습일수록 온전한 힘에 가까워진다고 그랬다고?”
생각을 정리한 용주가 물었다.
조금 전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하나 더 있었다.
“응. 틀림없어.”
“그럼 월영식을 사용한다던 자가 이주일이라는 자가 아닐 거란 법도 없는 거 아니냐?”
“…….”
용주의 이야기에 순간 침묵이 흘렀다.
“이주일 헌터는….”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집에서 편히 눈을 감았다고. 이준이 급습을 해서 목숨을 빼앗았다면, 그렇겐 안 끝났었겠지.”
용주가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만약 이런 가정이라면 어떨까? 인생의 끝이 다가온다는 걸 직감하고 있던 그자에게 이준이 접근했다면?”
“재미있는 가설이군. 어디 더 해봐. 애송이.”
형만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건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지. 하지만 그가 만약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면, 이준의 제안은 그 어떤 제안보다 달콤하게 들렸을 거다. 새로운 몸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건 새 삶을, 나아가 영생을 누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
S급 헌터의 힘과 일인 전승 검술.
일생을 최강자로 군림했기에 그 끝이 더 비통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죽음을 거래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냐?”
“그래.”
형만의 물음에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모습은? 우리 빨간 할아버지랑 라스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며?”
이안이 의문을 제기했다.
“이준은 자기 말에 최소한의 구색은 갖추는 편인가 보더군. 이 제안에도 그랬을 수 있다.”
“최소한의 구색. 그럼 일부러 다르게 만들었단 이야기?”
수지의 물음에 모든 시선이 쏠렸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생전과 다른 모습이라면,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겠지.”
“굳이 노인의 모습을 택한 것도, 안대와 쇠사슬을 찬 것도, 검을 쥐여주지 않은 것도, 그 연장선이란 건가?”
형만이 잠시 눈을 감았다.
만약 그런 거라면.
앞을 가로막던 단 하나의 퍼즐이 맞아들어간다.
“…….”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형만의 앞이 순간 어두워졌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 뭐가 더 어두워졌겠냐 싶지만.
분명 어둠이 더 짙어졌다.
“뭐야?”
“정전인가?”
눈을 뜬 형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정전이었다.
테이블의 전원은 물론이고, 형광등의 전기도 전부 나가 버렸다.
문을 열고 나간 서아는 바깥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전?”
“뭐야? 왜 전화가 갑자기 먹통이래?”
“인터넷도 먹통이야. 와이파이가 아니라 데이터도 안 잡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아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정말로 통신까지 먹통이 되어 있었다.
“비상 전력망은?”
“돌아가야 하는데…. 왜 안 들어오지?”
“…….”
이상을 감지한 형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보통 정전은 아닌 모양이군.”
“그럼?”
“우리가 한발 앞섰다고 생각했는데… 녀석들이 우리보다 한발 빨랐던 모양이다.”
창가로 다가간 형만이 창을 열었다.
푸르렀던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카오스 게이트가… 열렸다고?”
“열렸다고 단정할 순 없다. 다만 열리고 있다곤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군.”
서울에 나타났던 S급 카오스 게이트.
기록을 살펴보니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전조 증상들이 나타났다고 적혀 있었다.
지난번에 열린 게이트는 평균 B급.
뒤틀림의 여파가 이렇게 광범위한 걸 보면 지금 열린 게이트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