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 * *
“세상에…. 말도 안 돼.”
입을 떡 벌린 서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용주는 3일 전에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하핫! 역시 사람 놀라게 하는 덴 재주가 있단 말이야.”
이안이 박수를 쳤다.
이 박수가 담고 있는 의미는 터무니없음이었다.
“진각성이라니. 대체 어떻게. 3일 동안 대체 뭘 했길래?!”
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 3일 사이에 진각성을 했다고?
아니, 만에 하나 했다고 쳐도, 그걸 3일 전에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냔 말이다.
진각성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검증해 내지 못한 일인데.
“뭐, 그건 아무래도 좋은 거 아니겠냐?”
“그렇게 대충 퉁치고 넘어가려고?”
불만을 표한 서아의 시선이 수지에게 옮겨갔다.
“네 터무니없는 친구가 대체 뭘 한 거야?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돌아다녔길래 저렇게 된 거냐고?”
수지는 이 비정상들 사이에 유일한 정상인이었다.
그렇기에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등대.”
돌아온 대답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뭐? 등대?”
“응.”
“아니. ‘응’이라고 말할 때가 아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하하핫,”
이안이 폭소를 터뜨렸다.
서아가 뭘 기대했는진 몰라도, 수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뭐, 좋아. 우리 용주 말처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
차원을 전개한 이안이 한 호숫가로 세 사람을 안내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거 아니겠어?”
이안의 손에 다시금 초소형 블랙홀이 감돌았다.
“뭐?! 잠깐만 이안! 다짜고짜 그렇게…!”
그렇게 말한 서아에게 짙은 언노운의 기운이 느껴졌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에 들어간 건 이안만이 아니었다.
바보끼린 뭔가 통한다고.
터무니없는 놈들끼리도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하아…. 진짜 못 말린다니까.”
미간을 짚은 서아가 수지와 나란히 섰다.
이게 이렇게 간단하게 말 몇 마디하고 넘어갈 문제인가 싶지만은.
일이 벌써 그렇게 돼버렸다.
“간다.”
용주에게 다가간 이안이 블랙홀을 떨어뜨렸다.
45도 기운 상태로 떨어지는 강착 원반.
경계면에 닿은 용주의 갑피가 스파게티 면처럼 솟구쳤다.
“…….”
서아와 수지는 일에 대비했다.
그런데.
“칵!”
이빨을 드러낸 용주가 일순간 블랙홀을 집어삼켜 버렸다.
놀란 서아는 서둘러 용주에게 달려갔다.
다른 곳은 몰라도, 심장과 뇌가 날아가는 건 곤란했다.
설마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곤….
“!”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한 서아는 용주와 눈을 마주쳤다.
팔이 떨어져 나갔을 때를 생각하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너….”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빨 사이로 흘러내린 피가 대지를 적셨지만, 그게 전부였다.
용주는.
정말로 그걸 삼켜 냈다.
“그걸 삼켰다고? 진짜 미친 거 아니야?”
푸른빛을 두른 서아가 용주의 입 안을 살폈다.
출혈량에 비해 상처는 양호했다.
찢기고 터졌던 내상은 서아의 손이 닿기도 전에 아물고 있었다.
목구멍을 살핀 서아는 이어서 내부 장기 쪽을 살폈다.
안쪽은 놀라울 만큼 멀쩡했다.
마치, 구체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소멸한 것 같았다.
“어때? 뭐가 좀 달라진 것 같아?”
“괜찮냐고 묻는 게 먼저 아니야? 태연하게 그런 소리나 할 때냐고.”
이안의 물음에 서아가 핀잔을 주었다.
“괜찮은 거야 뭐, 딱 보면 아니까 그렇지.”
어깨를 들썩인 이안이 용주의 상태를 살폈다.
이빨에 희미하게 감돌던 강착 원반의 흔적은 오래 남지 못하고 사라졌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이지.”
가볍게 손을 내민 이안이 이번엔 두 개의 블랙홀을 만들어 보였다.
“계속 가보려고 하는데. 어때? 더 할 수 있겠어?”
네발로 땅을 짚은 용주는 이안을 빤히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말도 안 되는 계획은 점점 강도를 올려 가고 있었다.
* * *
“칵…가각!”
광폭화 상태의 용주의 몸이 비틀거렸다.
이안이 만들었던 아름다운 호숫가엔 치명적이고, 공허한 초승달 모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니.
세계가 부서져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테지.
“이거….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인데.”
날카롭게 패인 대지를 살핀 이안이 이야기했다.
검게 물든 용주의 꼬리.
거기 머물던 강착 원반의 빛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터무니없어. 터무니없다고! 너희 둘 다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서아가 고개를 저었다.
방금 눈앞에서 일어난 일격이 믿기지 않았다.
“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뭐 제정신이 아니면 좀 어때? 이렇게 결과로 증명했으면 다 잘된 거 아니겠어?”
용주가 만든 상처는 단순히 베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강착 원반을 두른 일격은 경계면을 허물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비틀었다.
그래.
자신이 만든 이 차원까지도.
“어떤 것 같아? 본인 입으로 좀 듣고 싶은데.”
이안이 물었다.
광폭화 상태에서 벗어난 용주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금 그 한 번으로 흡수한 양의 절반 정도를 사용했다. 잘해 봐야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건 그게 최대치일 거다.”
빛조차 나가지 못하는 검은 꼬리.
강착 원반을 두른 꼬리는 이안의 힘을 두른 것이었다.
어떤 원리로 그게 가능한 건진 알 수 없었다.
광폭화, 대항력, 부패의 근원, 절대적 존재.
그 어떤 것에 의한 것일 수도 있었고, 전부 다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삼킬 수 있었고, 흡수할 수 있었다.
흡수한 힘을 자신의 것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래.
부패의 근원의 힘을 공격에 실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게.
“그 상태를 해제했어도, 흡수한 힘은 유지되는 거야?”
“그래. 네 힘의 일부는 지금 내 안에 있다.”
“한 번이면 충분해. 숨겨둔 비수는 원래 한 발이어야 멋있는 거라고.”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글러트니를 보며 막연하게 용주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목숨을 내건 용주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게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게다가 뭐….
과정이 어떻든 결과에 도달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니겠는가?
“멋이나 따질 때야?”
용주의 상태를 살핀 서아가 따지듯 물었다.
“준이의 능력 잘 알잖아. 두 번 당해 줄 녀석이 아니야.”
어깨를 들썩인 이안이 차원을 거두려 했다.
그때.
“잠깐.”
용주가 그를 제지했다.
“응? 왜? 아직 뭔가 더 할 일이 남았어?”
“조금 더 하자고 하면, 무리야. 네 쪽이 아니라 이안 쪽이 더 이상은 힘들다고.”
서아가 먼저 선을 그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말해 봐. 듣고 있으니까.”
“…만약 힘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해 볼 거냐?”
“힘을 회복할 가능성?”
“그래. 결과를 확신할 순 없지만, 가능성이 제로는 아닐 거다.”
인벤토리를 불러온 용주의 앞에 리스트가 나타났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라면, 지난번에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말을 꺼내지 않았었다.
그때와 달라진 건 하나.
녀석이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었다.
“그런 게 있다고?”
서아가 의문을 표했다.
자신조차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는 일인데, 대체 뭘 어쩌려고….
“결정하기만 하면 돼. 방법은 이쪽이 알아서 할 테니.”
용주의 물음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비수를 맡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그렇게 이야기한 이안이 등을 보였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런 말을 들으면 또 가만히는 못 있겠네.”
하늘을 올려다본 이안이 쭈욱 기지개를 켰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실패는 자신이 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준을.
친구를 자기 손으로 막고 싶었으니까.
“한번 해봐 줄래? 그 방법이란 거.”
“잠깐! 어떤 방법인지 우선 말로 설명해 봐! 거기에 대한 리스크는?!”
서아의 어깨를 잡은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난 맡긴다고 했어. 더 묻지 말고 그렇게 해줘.”
“이안, 너….”
이안의 의사를 확인한 용주는 한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메모리 다이얼.
용주의 손에 들린 다이얼엔 세 개의 공란이 있었다.
‘가져올 아이템이라면 역시 그것뿐이겠지.’
황도의 오르골.
해로운 마법을 해제하는 아이템을 선택하자, 세 개의 공란 중 하나가 채워졌다.
“조금 졸릴지도 모른다.”
오르골이 그려진 첫째 칸을 짚은 용주가 다이얼을 돌렸다.
흘러나오는 은하수와 자장가.
해로운 마법을 해제해 주는 자장가의 효과는….
이안의 주박을 풀지 못했다.
“생각만큼 잘 안된 것 같네.”
졸린 눈을 비빈 수지가 이야기했다.
이안의 힘은 아직 억눌린 그대로였다.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태영을 세뇌했던 그리드의 힘은 이 효과로 해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마, 이준이 건 주박이 오르골의 힘보다 상위에 있단 소리겠지.
“신경 쓰지 마. 결과가 아쉬워도, 과정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니까.”
이안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안도 서아도 분명 영향권 안이었을 텐데.
두 사람 다 잠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건 뭐였어? 이게 그 방법이었던 거야?”
마스크 위로 손을 덮은 서아가 하품을 했다.
주박을 풀 방법.
그 다이얼은 뭐고, 오르골은 또 뭐였는지, 어디서 나온 건지.
의문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뭐, 깊게 알려고 하지 마. 이거면 어떻고, 저거면 어때.”
“뭐?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난 황금으로 만든 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도 봤다고. 은하수가 나오는 오르골 정도야. 뭐, 있을 수도 있지.”
“황금으로 만든 새?!”
의연하게 받아들인 이안이 시간을 확인했다.
“마침 시간도 딱 좋네.”
“시간이 좋다니?”
수지가 물었다.
“준이가 있는 위치를 대략 특정해 냈다고 했거든. 너희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일이 끝나는 대로 가겠다고 해놨어.”
이안이 차원을 거둬들였다.
“자세한 건 가보면 알 거야.”
* * *
장소를 옮긴 용주가 도착한 곳은 어느 한 건물 내부였다.
여긴, 길드의 임시 컨트롤 타워.
여러 가지 조건과 기능을 고려해 형만이 직접 고른 지부였다.
용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이는 형만이었다.
그의 앞에 놓인 테이블엔 3D 입체로 된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테이블엔 형만 외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두 사람 다 용주가 아는 얼굴이었다.
“이 기운…. 뭐야? 두 녀석은 알겠는데, 두 녀석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다리를 꼬고 있던 수호가 용주를 바라보았다.
“아마 아닐걸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나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라고?”
“구면. 확실해요. 100%라고요.”
“구면이라고?”
안대를 짚은 수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S급 헌터인 신서아.
A급 헌터인 안수지.
그 둘은 식별해 낼 수 있었다.
이 아름답고 고귀한 빛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들이니까.
하지만 다른 두 녀석이 누군진 식별해 내기 힘들었다.
S급 헌터만큼 강한 기운이 하나.
강한 것 같지만, 심각하고 뒤틀리고 억압된 기운이 하나.
이 정도로 크고 특이한 기운이라면 잊어버렸을 리가 없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구면이지.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
용주의 대답에 수호가 반응했다.
그의 눈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눈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는…!”
“진각성. 헌터들은 그걸 그렇게 불렀었죠? 분명?”
눈을 뜬 나은이 용주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상태가 수호와 같았다면, 자신도 아마 그와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빛깔도 형태도 가늠하기 힘들었던 그 힘과는 달랐다.
지금 용주의 몸엔.
각기 다른 두 힘이 공존하고 있었다.
“애송이 주제에. 힘 좀 썼군.”
용주의 시선이 형만과 마주쳤다.
입술을 들썩인 그는 금세 놀라움을 감춰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