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 * *
“허억…. 허억….”
턱 끝까지 차오른 숨.
알 수 없는 힘에 밀려난 용주가 기억 속에서 내던져졌다.
보고 있던 모든 풍경이 지워진 그곳은 분명 무너져 내렸을 성채의 꼭대기였다.
차디찬 바닥을 짚은 용주는 그대로 머리를 처박았다.
눈에서 계속 뭔가 흘렀다.
피와 물이 섞인 무언가가.
“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전부다.”
용주를 내려다보던 카일론이 입을 열었다.
그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의 죽음에 나는 무관하지 않다. 원수라면 원수지. 원한다면 가져가도 좋다. 일이 다 끝난 후에.”
카일론이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죽음과 망각이 두 사람을 삼키기 직전 나는 두 사람을 건져 냈다. 그들의 존재가 부분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것도, 네가 그 둘의 기억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테지.”
그날의 일을 떠올린 카일론이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내 머리론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 어째서 너인가. 어째서 그자의 자식인가. 눈을 이어받은 건 그 일이 있고 시간이 더 지난 뒤의 일일 텐데.”
단순한 우연인가.
인위적 조작인가.
필연적 운명인가.
셋 중 어느 것이 오늘을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게 그자가 본 미래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은 분명.
그자가 본 미래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가 그 눈동자엔 비쳤느냐?”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땅을 때린 용주가 몸을 일으켰다.
용주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보았던 미래.
그 끝이 어디였는지 자신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보였다.
아버지는 그날 오늘을 보셨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왼팔의 형태를 바꾼 카일론이 한 다발의 화살을 쏟아 냈다.
폭발적인 속도와 힘이 실린 화살들은 용주의 곁을 스쳐 갔다.
한발 늦게 따라온 바람은 용주의 뺨에 긴 상처를 만들며 지나갔다.
“강한 자의 눈이라면 볼 수 있을 거다. 아니, 이젠 보아야 한다. 네가 가진 눈은 죽음 위에 있는 물건이다.”
날아오는 공격을 마주한 용주는 평소처럼 몸의 감각에 의존했다.
그런데.
“……!”
피했다고 생각했던 공격은 용주의 팔꿈치를 날려 버렸다.
순식간에 관절이 망가진 용주는 기이하게 뒤틀린 손목을 붙잡았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한 카일론은 다음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의식을 집중해라. 네 온전한 정신과 마나로 미래를 보아라.”
몸은 녀석을 공격하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의 녀석은 적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것.
그건 녀석의 말대로 이 눈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온전한 정신과 마나라고.’
모래가 들어간 듯 눈이 따가웠다.
동공에 맺히는 상도 묘하게 실제와 어긋나 있었다.
비문증 같은 흔적이 시야를 가리며 떠다녔다.
아무래도 아까 그걸 보면서 뭔가 이상이 생긴 모양이다.
‘그때….’
허벅지를 스친 상처에 미간을 좁힌 용주가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 속 세계에서.
아버지의 눈과 자신의 눈이 공명했었다.
그게 이 흐트러짐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이상을 끝낼 수 있는 건… 다시 한번 미래를 보는 일이란 건가. 온전한 내 힘만으로.’
피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봤었다.
아버지는 분명 거기 서 있던 자신을 보고 계셨다.
‘전부 잘될 거라고… 그러셨었지.’
그건 분명 자신에게 한 말씀이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믿고 맡기셨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되게 만드는 게….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겠지.”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마나가 하늘로 치솟았다.
광폭화 상태에서 뿜어내는 언노운의 힘이 아니었다.
이건 순수한 헌터의 힘.
푸른 기운에 둘러싸인 용주는 정신을 집중했다.
‘할 수 있어.’
그 힘을 어떻게 끌어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힘을 사용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봤어도.
죽음을 마주한 순간 두 번이나 그 힘을 마주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두근!
빠르게 뛰던 심장의 고동이 순간 느려졌다.
카일론이 쏜 모든 화살이 한눈에 들어왔다.
앞은 물론이고, 옆, 뒤쪽에서 날아오는 공격까지 모두 보였다.
“!”
활시위를 당긴 카일론이 순간 주춤했다.
평범한 반응이었다면, 왼쪽으로 피해야 하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용주는 그 자리에서 딱 한 발자국 앞으로 이동했다.
서로 부딪쳐 비정상적으로 궤도가 꺾인 화살들은 그대로 용주를 빗겨 갔다.
‘미래를 보는 눈….’
한 차례 더 퍼부은 맹공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왼손으로 땅을 짚은 용주는 가볍게 모든 공격을 흘려보냈다.
피눈물이 흐르는 저 눈은.
카일론이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눈이었다.
타닥!
지면을 딛고 뛰어오른 카일론은 네 개의 말뚝을 쏟아 냈다.
지면에 박힌 네 개의 말뚝.
말뚝과 말뚝 사이에 흐르는 짙은 부패의 기운은 삽시간에 공간을 삼켜 버렸다.
“훌륭하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카일론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용주는 자신의 뒤를 잡고 있었다.
이미 시작된 공격에 맞춰 대응한 게 아니었다.
이건.
치명적인 공격을 미리 보고 움직인 결과였다.
▶ ‘계승자의 두 번째 시련’을 통과했습니다.
▶ ‘계승자의 세 번째 시련’을 통과했습니다.
지면에 착지한 용주의 앞에 두 가지 메시지가 동시에 나타났다.
대항력, 능력치, 마나.
HP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크게 상승했단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 새로운 능력치가 해금되었습니다.
▷ 부패의 근원 - 100/100
-모든 종류의 공격에 부패의 기운을 실을 수 있습니다.
-근원에 가까운 순수한 부패는 생명의 대척점에 있는 치명적인 물질입니다.
▶ 대항력의 ‘패기’ 능력이 발현되었습니다.
-압도적인 위압감을 방출합니다.
-위압감은 대항력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위압감에 위축된 적들은 행동이 제한되며, 위압감을 이기지 못한 적들은 도망가거나, 복종합니다.
▶ 새로운 스킬이 발현되었습니다.
▷ 절대적 존재
-대항력이 극에 달한 자만 얻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근원을 가진 존재는 절대적인 힘과 지휘를 상징합니다.
-절대적 존재만이 다른 절대적 존재를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다른 근원의 힘에 쉽게 삼켜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능력치와 대항력의 새로운 능력이 각성했다.
이전과 달리 많은 스킬이 새로 열리진 않았다.
하지만….
‘몸이… 가벼워.’
놀라울 만큼 몸이 가벼웠다.
마치, 온몸에 차고 있던 납덩이를 떼어 낸 것 같았다.
“아무래도 깨어난 건 눈만이 아닌 것 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
용주가 의문을 표했다.
깨어나다니.
대체 뭐가.
“느끼지 못하는 거냐? 하긴, 강물이 바다가 되었다는 걸 물은 모르는 법이지.”
“바다라고….”
용주가 두 손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대화.
어디선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았다.
분명….
‘서윤….’
틀림없이 그때였다.
서윤은 자신이 달라졌단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었다.
만약 지금의 자신이 그런 상태라면….
이 가벼움은.
이 충만함은.
“진각성이라고?”
만약 그런 거라면 서윤이 왜 그랬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은 자신이 바다로 온 걸 모른단 말처럼.
정말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희미했다.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내가 너에게 준 힘도, 네가 물려받은 힘도, 네가 쌓아 올린 힘도 전부 마찬가지.”
카일론이 용주와 마주 보고 섰다.
압도적인 강함.
절대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지던 녀석의 존재가.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중하되 과감하게 움직여라. 힘에 삼켜지지 말고, 힘을 지배해라. 지금까지 네가 경험하고, 이겨 내고, 벼려 왔던 것들을 기억하라. 강한 자여.”
“!”
강한 자.
그의 한마디에 용주의 동공이 반응했다.
그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오른손을 움켜쥔 용주가 이야기했다.
“아까 그 모습은 힘을 발휘한 게 아니라, 억눌렀던 거냐?”
당연한 이야기지만, 괴물의 형태에 가까운 모습은 바로 그 모습이었다.
강해 보이는 모습으로만 봐도 역시 그쪽이 우위겠지.
하지만 몇 가지 부자연스러운 것들이 있었다.
녀석은 언노운이었다.
S급 혹은 그 이상의 언노운은 상대해 본 적 없지만, 그 모습은 녀석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언노운들의 형태라 해도 이질감 없는 모습이었다.
세 녀석이 처음부터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으로 따져보면 아니라고 말하는 게 더 상식적인 대답일 것이다.
그렇게 가정하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사람의 형태는 언노운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모습.
그 가정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는.
S급 헌터들을 추격하던 녀석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단 걸로 충분할 테지.
“맞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틀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매한 대답인걸.”
“정점에 군림한 힘은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 모습을 취한 덴 그런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뒤로 조금 물러난 카일론이 원을 그렸다.
뒤틀린 공간은 다크 포탈이 되어 있었다.
“그쪽에서 문을 열려는 자는 이번에는 네 조각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 가서 일을 끝내라. 죽음과 망각에게 길을 내어 주지 마라.”
“그래. 이준 녀석의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벼림이 끝난 검에 충분히 익숙해져라. 그쪽 일이 정리되면, 남는 건 순환을 끝내는 일뿐이니.”
뒤를 돌아선 카일론은 왕좌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잠깐.”
“……?”
갑작스러운 부름에 멈춰선 카일론이 뒤돌아섰다.
피눈물로 범벅이 된 용주는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다.”
용주가 차분히 숨을 골랐다.
“네가 두 분을 살해하고, 지워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진실이. 그게 아니었는데도.”
“아까도 말하지 않았던가? 난 침략자였고, 서로 베고 베인 적이다. 내가 그들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을지언정, 네게 사과받을 일은 하지 않았다.”
“알아. 그래도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도 내 동생도 두 분을 잊어버렸을 테니까.”
“…인간들의 마음이란. 어렵군.”
“그럴지도 모르지.”
그에게 다가간 용주가 손을 내밀었다.
“…….”
눈치를 살피던 카일론은 용주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반대편 손을 내미는 거다. 이럴 땐 말이야.”
주먹을 움켜쥔 용주가 카일론의 가슴을 툭 건드렸다.
마찬가지로 주먹을 움켜쥔 카일론은 반대편 손으로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
* * *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포탈을 빠져나온 용주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등대를 배경 삼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지는 전과는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응. 나도 그럴 생각 별로 없었는데, 갑자기 시간이 아예 멈춰 버리더라고. 그래서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고 와 본 거야.”
다짜고짜 손을 뻗은 수지가 자신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피범벅이 된 뺨을 타고 내려온 손은 인중과 턱을 훑었다.
“수염. 많이 자랐네. 머리도.”
“수염이라고?”
용주는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히든 게이트에서 보냈던 시간을 방증이라도 하듯, 수염과 머리는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다.
“강해졌네. 응. 이건 나도 느낄 수 있어.”
용주의 강함과는 별개로.
용주의 마나는 늘 한결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용주는 달랐다.
좀비헌터의 진각성.
작고, 보잘것없던 번데기를 벗고 나온 나비는.
A급.
아니, 어쩌면 S급에 필적할 만큼 강하고,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무시당하고, 멸시받던 E급 헌터는 이제 없었다.
“고생했어.”
양손을 펼친 수지가 용주를 와락 안았다.
등을 토닥여 주는 그녀의 손길에 용주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다녀왔어.”
목소리의 떨림을 삼킨 용주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엄마의 얼굴을 봐서 그럴까.
오늘따라 더 수지에게서 그리운 사람이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