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콰직!
카일론을 꿰뚫는 강렬한 일격.
부서진 카일론의 갑피가 우수수 쏟아졌다.
꾸드득!
용주의 면상에서 팔을 변형시킨 카일론은 활시위를 당겼다.
폭발적인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화살.
뒤로 물러난 용주의 오른팔과 어깨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너덜거렸다.
쇄골을 날려 버린 일격은 치명적일 만큼 깊었다.
‘머리는 간신히 피했는데….’
고개를 든 용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이 있어야 할 하늘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박차고 질주한 카일론은 벌써 용주의 뒤를 잡고 있었다.
“!”
등 뒤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기운에 용주는 왼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카일론의 발길질이 한 발 더 빨랐다.
충격에 날아가는 용주를 뒤쫓은 카일론은 다시 한 번 팔을 변형시켰다.
왼손의 방패와 오른손의 원뿔창.
콰아앙!
한 마리 전투마처럼 돌진하는 카일론에게 페이탈 붐이 작렬했다.
철그럭!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피 속을 뚫고 나온 카일론은 방패를 앞세워 폭발적으로 속도를 높였다.
네발로 지면을 긁은 용주는 맞돌진을 선택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
창의 형태를 변이시킨 카일론은 날카로운 손톱을 세웠다.
깨져 흩날리는 신체의 파편들.
두 사람이 부딪칠 때마다 공간이 울렸고, 두 사람이 움직이는 곳마다 바람이 뒤따랐다.
찢고, 찢기는 두 사람의 공방에 일대는 피바다로 변해 갔다.
“카…가각!”
자세를 낮춘 용주는 지면에 바짝 붙어 미끄러졌다.
그런 용주의 머리 위를 지나는 카일론의 일격.
뜯겨 나간 등 갑피 속에서 몸을 뒤튼 용주는 위아래로 입을 길게 찢었다.
“…….”
걸음을 멈춘 카일론은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손목 아래가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진 오른손은….
저 앞 야수의 이빨 사이에 있었다.
“제법이구나.”
자라나고 엉겨 붙는 수백의 촉수들.
팔의 형태를 복구한 카일론은 방패를 집어 던졌다.
빠르게 회전하는 방패를 마주한 용주는 정확한 타이밍에 뛰어올랐다.
“!”
그런 용주의 발밑에서 멈춰서는 그림자.
회전하는 방패가 일으킨 바람은 소용돌이가 되었고, 바람에 섞인 죽음의 기운은 망자들의 형태가 되어 용주에게 손을 뻗었다.
녀석들의 손길 손길마다 줄어드는 HP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뚝!
소용돌이 위로 솟구쳐 오른 용주의 뺨으로 잿빛 물방울이 떨어졌다.
활시위를 당긴 카일론은 지금까지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화살이라기보다는.
썩어 문드러진 원혼들의 집합체 같았다.
“칵!”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잿빛 비.
단비 같았던 빗방울은 금세 소나기처럼 굵어졌다.
여섯 꼬리를 한데 모은 용주는 일격을 받아칠 준비를 했다.
한 점으로 모여드는 입자들과 눈가를 적시는 잿빛 비.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카일론까지.
한 풍경에 담긴 모든 게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영원처럼 느껴졌다.
‘에스카톤 저지먼트!’
바람의 흐름을 바꾼 두 일격이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
격돌하는 두 개의 힘.
두 힘의 충돌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카일론의 손을 떠난 단 한 발의 화살은 파동의 정중앙을 관통했다.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솟구친 활촉은 용주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카…학!”
용주를 덮친 거대한 폭발.
흩뿌려진 죽음과 부패의 기운은 용주의 몸을 갉아 먹었다.
반파되고, 썩어 문드러진 갑피는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뚝뚝 떨어져 나갔다.
“저 아래. 널 기다리고 있는 것들을 마주해라.”
부패 속을 뚫고 나타나는 카일론.
활도 창도 아닌 클레이모어를 움켜쥔 카일론은 용주를 베어 내고, 꿰뚫었다.
“가서 네 눈으로 보아라. 내가 보고 기억하는 그날의 진실을. 그리고 네 눈으로 마주해라. 그날 그가 보았을 미래를.”
검을 놓은 카일론은 두 다리로 용주를 찍어 눌렀다.
굉음과 함께 낙하한 용주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산산이 부서지는 바닥.
바닥을 잃어버린 용주는 깊고 어두운 나락 속으로 추락했다.
날개를 펼친 카일론은 용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쿵!
한참을 떨어진 용주는 마침내 지면에 닿았다.
굉음과 함께 처박힌 용주는 피를 토해 냈다.
용주의 몸을 감쌌던 붉은 핏방울들은 방울방울 흩어지고 있었다.
‘큭…! 젠장.’
칼을 분명 심장을 관통했다.
하지만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고동을 타고 피가 뿜어져 나오지도 않았고, 의식이 멀어지지도 않았다.
다만.
격렬한 통증만은 가시지 않았다.
호흡이 가빴고,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죽음은.
자신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단지, 자신을 덮치지 않을 뿐.
‘그 녀석….’
왼팔에 의지해 몸을 일으킨 용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떨어졌던 천장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비밀의 방과 왕좌 중간의 어느 공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비밀의 방과 마찬가지로 여기엔 뭔가 사건이 일어났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비밀의 방에 남은 낫 자국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쿨럭!”
역류하는 피를 토해 낸 용주가 가슴에 꽂힌 클레이모어를 붙잡았다.
상처 부위와 그 주변은 온통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를 악문 용주는 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몸속에서 움직이는 1mm 칼날은 피부에 생긴 상처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쉰 용주는 한 번 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꿀럭! 꾸드득!
형태를 바꾼 클레이모어가 끈적한 점액처럼 흘러내렸다.
몸을 잠식해 가는 점액질.
가슴 중앙부터 양어깨까지 엉겨 붙은 점액질에 용주는 서둘러 그걸 뜯어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뭐야, 이건….’
목을 타고 입까지 차오른 점액질은 일순간 행동을 정지했다.
그리고.
마개가 열린 물처럼 상처로 빨려 들어갔다.
‘그 녀석. 대체 무슨 짓을….’
상처를 짚은 용주는 몸을 일으켰다.
녀석에게 베인 상처는 잿빛의 긴 흉터가 되어 있었다.
흉터가 졌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순간, 뿌옇게 번졌던 시야는 간신히 초점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왼손을 든 용주는 눈앞을 지나는 안개를 어루만졌다.
잿빛 안개가 자신 곁에 머물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진실을 보라고. 녀석이 그랬었지.’
떨어지기 직전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멀리서 전해진 소리와 진동이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여긴… 그날 서울에 열렸던 S급 카오스 게이트란 소린가? 여기가 두 분이 마지막에 계셨던….’
벽을 짚은 용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믿을 수도 없었고, 믿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 앞에 있는 건 혹시….
“!”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용주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언노운이 세 개로 찢어진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언노운은 하나가 아니었다.
사자 갈기를 휘날리는 이족 보행형 언노운.
여덟 개의 단두대 칼날을 다리 삼은 아라크네형 언노운.
뱀처럼 긴 몸이 좌우로 찢어지는 언노운.
커다란 눈알이 달린 몸에 용수철 같은 팔과 다리를 가진 언노운.
갑작스러운 습격에 룬검을 뽑아 든 용주는 전투를 준비했다.
그런데.
“…….”
모든 것이 한순간 사라져버렸다.
마치 신기루처럼.
‘방금 그건 뭐였지?’
무의식적으로 반응한 용주는 자신의 눈가에 손을 가져갔다.
촉촉한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건… 피?’
눈물처럼 흘러내린 액체는 분명 피였다.
‘잠깐만 이거….’
근미래에 일어날 일을 봤던 감각.
생각해 보니 조금 전 그건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조금 전 보았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 모습도….’
너무 갑작스러워 파악이 늦었지만, 지금 이곳의 풍경과 조금 전 봤던 풍경은 사뭇 달랐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피눈물을 닦아 낸 용주는 벽을 짚고 나아갔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
부서진 얼음 문을 밟은 용주는 얼어붙은 전당 내부로 들어섰다.
소리를 아직 더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 뭔가 낯이 익는데….’
전당 중앙을 지나던 용주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시야의 각도에 차이가 있었을 뿐 여긴 분명 아까 봤던 풍경 속 그 장소였다.
반대편 문까지 다가간 용주는 자세를 낮췄다.
끔찍한 몰골로 죽어 있는 언노운의 사체가 버려져 있었다.
‘안에서부터 터졌어.’
유체의 상태는 끔찍했다.
안쪽에 있던 것들은 전부 바깥쪽으로 터져 나와 있었다.
‘이 녀석은 분명….’
사자 갈기의 언노운.
그나마 온전한 머리의 형태로 녀석이 누군지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전당을 빠져나온 용주는 깎아지는 경사를 타고 미끄러졌다.
언노운의 유해가 몇 구 더 있었다.
전부 아까 봤던 녀석들이었다.
‘이건….’
사람의 핏자국을 따라간 용주는 고개를 들었다.
벽 한 면이 전부 뜯겨 나가고 없었다.
‘이안…. 그 녀석의 작품인가, 이건?’
갈기갈기 찢긴 언노운의 유해 아래 제법 많은 양의 모래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 근처에 모래는 없었다.
녀석이 뿜어낸 게 아니라면, 어디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다고 보는 게 맞겠지.
잠잠해진 소리와 진동.
남아 있는 흔적들을 단서 삼아 이동을 계속하던 용주가 멈춰 섰다.
“…….”
카오스 게이트의 출구가 보였다.
지금껏 본 적 없을 만큼 거대한 출구는 이렇게 멀리서 봐도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음산한 검붉음을 뿜어내던 포탈은 삽시간에 재에 삼켜져 버렸다.
그대로 굳어진 용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 숨통을 조여 오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 박동이 점점 더 빨라졌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상처….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비롯된 통증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뜨겁게 차오른 액체가 시야를 뿌옇게 물들였다.
용주를 이렇게 만든 건.
거대한 게이트의 문도.
저 앞에 보이는 카일론의 뒷모습도 아니었다.
용주를 이렇게 만든 건….
출구를 등지고 선 두 사람의 얼굴이었다.
“엄마…. 아빠….”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어 나온 용주는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저기 있는 게 기억 속 단편이든 허상이든 그런 건 머릿속에 없었다.
용주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단 하나.
두 분을 보고 싶었다.
한 걸음이라도.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서.
“미래를 보는 눈을 가졌어도 자신의 죽음은 보지 못한 모양이구나. 아니면 죽을 자리인 걸 알면서도 운명을 바꿔보고 싶었던 것이냐?”
중앙을 지키던 사내가 이야기했다.
사내의 우측에 선 카일론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 가라고 했잖아! 나한테 다 방법이 있다고.”
“당신, 그 말을 내가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알아요? 혼자 다 떠안게 두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들려오는 부모님의 목소리.
룬검을 움켜쥔 용주는 사내의 뒤를 잡았다.
용주의 움직임엔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른 용주는 한 가지 이상과 더 마주해야 했다.
자신의 검과 몸은 사내를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자신은 여기 있었지만, 동시에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짧은 대화가 오가고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는 건 두 분의 목소리뿐이었다.
두 분께 좀 더 다가간 용주는 두 사람과 마주 보고 섰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살아생전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게 여기 그대로 있었다.
“…….”
양손을 뻗은 용주는 두 사람을 안아보았다.
물론, 실제로 안을 수는 없었다.
단지 그런 흉내를 내고 있을 뿐.
두 분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한 적이 없었다.
“젠장.”
차오르는 눈물에 용주가 두 눈을 꼭 감았다.
아버지의 눈으로 울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도저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잡을 수 없었다.
대화를 나눌 수도, 눈을 마주칠 수도, 온기를 느낄 수도 없었다.
일어날 미래를 알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아니야.’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문 용주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손을 억지로 떼어 놓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지켜보는 것.
이곳에서 있었던 진실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
그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유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