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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70화 (270/357)

270화

“모순이군.”

사내가 자신의 오래된 상처에 손을 올렸다.

“그래. 명백한 모순이지. 그 점은 나도 잘 알고 있어.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온다고.”

허리춤에 손을 올린 용주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지만 녀석들을 허상이라 생각하며 상대했던 적은 없다. 함께했던 녀석들도, 베어 넘겼던 녀석들도. 그러니 아니라고 대답하는 게 더 맞는 답이라고 생각했다.”

왼손을 든 용주는 눈앞을 지나는 파편을 받쳐 들었다.

눈꽃을 보며 웃고 있는 설녀의 모습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만들어진 세계와 실재하는 주민.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둘 중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뜻이지.”

“…….”

“네가 지금까지 자신을 벼려왔던 공간은 결코 허구의 공간이 아니었다. 모두 존재하고, 존재했던 세계의 잔재지.”

사내의 이야기에 깊고 긴 침묵이 흘렀다.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퀘스트 게이트가?”

“놀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인간들이 사는 너희 그쪽 세계, 너희가 언노운이라 부르는 우리가 사는 이쪽 세계. 이미 차원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차원과 차원 사이가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차원이 서로 침략할 수 있다는 것도, 이미 다 눈으로 보고, 피부로 경험한 일들이거늘.”

“그건….”

녀석의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쪽으론 생각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카오스 게이트. 너희가 그렇게 부르는 균열은 계속해서 너희 세계를 위협하고 있지. 네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말을 더듬은 용주가 다시 한번 세계의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정확히 인지했을 텐데,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쓸모없어진 철 덩이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할 길을 찾았다. 그리고 이게 그 결과물이지. 다른 세계의 침탈. 다른 세계를 발견한 건 우리에겐 축복이었고, 그들에겐 재앙이었지. 그들의 세계에 남은 건 고작 그 한 조각의 잔재뿐이다.”

“…….”

“그리고 그건 머지않아 너희 세계가 직면할 미래이기도 하다. 문을 열고 나타난 침략자에게 쓰러진 비참한 세계의 말로지.”

“언노운에게 삼켜진 세계의 말로라고? 이게?”

잠시 정신이 멍해졌던 용주가 고개를 저었다.

“잠깐. 이 세계들엔 생존자들이 있지 않던가? 퀘스트 게이트에서 내가 만나고 상대했던 녀석들. 녀석들은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용주의 이야기가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지금까지 그 많은 게이트를 돌면서, 언노운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딱 한 번.

딱 한 번 침략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세계를 지배하던 절대적인 포식자의 입으로 말이다.

“고대의 재앙…. 녀석을 쓰러뜨린 건 역시 네놈이었냐?”

녀석이 그랬었다.

자신을 갈기갈기 찢은 건 자신과 유사하게 생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고.

당시에도 그게 이 녀석이지 않을까 추측 정도는 했었다.

하지만 명확한 답은 얻지 못했었다.

자신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다.

녀석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수백의 입을 가진 포식자. 녀석은 그 세계에 존재했던 가장 강한 존재였다.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기에 부족함 없는 힘과 교활함을 가지고 있던 자지.”

“…….”

“삼켜진 세계의 잔재에 침략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자가 망각에 저항할 수 있었던 건 그자의 힘이 그만큼 강대했기 때문이지.”

“망각이라고…? 그게 무슨 뜻이냐?”

녀석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한 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심각한 부상 때문이거나.

계략을 위한 수작이거나.

실제로 녀석의 수작에 걸려 팔 하나를 잃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내가 하는 말은 그와는 달랐다.

“부서진 세계의 망각은 시간이 만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침략의 상처 그 자체지.”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론 못 하는 거냐?”

“삶은 죽음에서 끝이 나고, 부패와 망각을 걸쳐 소멸한다.”

“그 말은 아까도 들었어.”

“죽음, 부패, 망각. 순환의 끝을 의미하는 이 세 가지 이름은 바로 우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름이라고?”

“우린 우리의 이름 아래 수많은 세계를 짓밟았다. 망각 속에 잠긴 세계는 자신들의 파멸조차 노래하지 못하지.”

사내의 곁으로 모여든 세계의 잔재들은 그 수를 점점 더 늘려갔다.

용주가 보고 경험했던 세계는 여기 있는 세계 중 일부일 뿐이었다.

“나의 이름은 카일론. 너희 세계의 말로 ‘부패’라는 현상 그 자체를 의미하는 재앙이다.”

왕좌를 딛고 일어선 카일론이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발걸음을 타고 흘러내린 회색의 물결에선 짙은 죽음의 향기가 느껴졌다.

“망각. 그 단어를 듣고 생각나는 게 있지 않느냐?”

‘망각이라고….’

용주의 동공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또 다른 차원.

침략.

언노운.

망각.

녀석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세계들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일들이 두 분께 일어난 일과 닮았다고.

“모두가 두 분을 잃어버린 게 망각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거냐? 고대의 재앙이 널 기억했던 것과 내가 두 분을 기억하는 게 같은 거라고?”

“정확히 말하면 같진 않다. 넌 그 자만큼 강대하지 못했으니까.”

“…….”

“우리가 이 차원에 강림할 문을 열었을 때. 우리 앞을 가로막은 인간들이 있었다. 망각 속에 잠긴 두 사람도 거기 있었지.”

계단을 내려온 카일론이 용주와 마주 섰다.

“그자들은 강했다. 지금껏 우리가 상대해 왔던 누구보다 우릴 고전시켰지. 무리를 이끌던 자는 미래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실베스’ 죽음의 하나뿐인 형제가 녀석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지.”

“미래를 보는 눈이라고….”

용주가 무의식적으로 눈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자들 역시 우릴 압도할 순 없었다. 팽팽하던 전황은 조금씩 조끔씩 기울어 갔지. 그리고 그자들을 이끌던 자는 후퇴를 결정했다. 사내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지.”

“…….”

꽉 움켜쥔 용주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녀석이 하는 말이 어째선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으니까.

“두 사람을 살해한 게 나냐고 물었지? 맞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틀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건 무슨 뜻이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죽음과 망각의 시간이 지나갔는데 부패의 손길은 지나가지 않은 게.”

카일론의 발밑에서 시작된 균열이 요새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그의 힘에 용주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방울방울 피어오르는 붉은 핏방울은.

카일론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과 마주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너의 눈은 아직 진실을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변화하기 시작하는 카일론의 모습.

새로운 형상을 입은 녀석의 모습은 광폭화를 쓴 용주의 모습과 닮은 듯 달랐다.

네발로 땅을 디딘 카일론의 모습은 흡사 켄타우로스.

검붉은 갑피를 두른 몸은 단단하며, 매끄러웠다.

“죽음 가까이로 데려다주마.”

눈 깜짝할 사이에 용주의 코앞으로 파고든 카일론은 용주의 명치를 걷어찼다.

소리보다 반 박자 늦게 튕겨 오른 용주의 입에선 역류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죽음과 부패 그 경계까지.”

용주의 뒤를 잡은 카일론은 있는 힘껏 용주를 찍어눌렀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속도는 흡사 유성.

바닥을 엉망으로 부수며 떨어진 용주의 모습은 한 마리 괴수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칵!”

하늘로 솟구치는 여덟 개의 촉수.

예측 불가한 동선을 그리며 꺾인 촉수들은 각기 다른 각도에서 카일론을 겨눴다.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공격을 흘려보낸 카일론은 오른손을 바짝 당겼다.

꾸득! 꾸드득!

왼팔은 가로로 길게 뻗은 쇠뇌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날아가라.”

찰나의 순간 발사된 여섯 발의 화살.

세포와 갑피로 이루어진 화살은 순식간에 일대를 흩뜨려놓았다.

용주가 뻗었던 촉수들은 갈기갈기 찢긴 채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카각!”

뿌연 잿가루 사이를 뛰어오른 용주는 세 발의 구체를 쏘아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격을 흘려보내는 카일론.

반원을 그리며 세 발의 페이탈 붐을 더 쏟아 낸 용주는 날카롭게 세운 꼬리를 쉐도우 홀 안으로 찔러넣었다.

홀의 반대편은 카일론의 등 뒤를 겨누고 있었다.

“힘껏 저항해 봐라. 모든 경험이, 모든 상처가 널 더 강하게 만들 테니.”

힘껏 휘두른 카일론의 발길질.

기습적으로 솟구쳤던 칼날의 꼬리는 그의 힘에 부서져 날아갔다.

‘이 녀석…. 내가 어떻게 나올지 다 알고 있단 듯이.’

부서진 꼬리를 회수한 용주는 폭발적으로 거리를 좁혀 나갔다.

또 한 번 방사되는 카일론의 화살.

종이 한 장 차이로 화살 사이를 오간 용주는 지면을 딛고 뛰어올랐다.

‘인스네어.’

전장을 뒤덮는 초록 가스.

‘플레이그.’

흘러내리는 붉은 포자를 손톱에 덧씌운 용주는 템포를 올렸다.

초근접에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공방.

점멸을 사용한 용주의 얼굴을 붙잡은 카일론은 그대로 용주를 내리쳤다.

잠깐 사이에 뜯어 먹힌 카일론의 손바닥은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갔다.

튕겨 오르는 반동을 이용한 용주는 꼬리 끝으로 몸을 지탱했다.

원심력으로 변한 힘의 흐름.

큰 원을 그리며 속도를 유지한 용주는 카일론의 하반신을 할퀴었다.

길고 선명한 상처를 타곤 포자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잔재주는 잔재주일 뿐.”

힘껏 뛰어오른 카일론이 대지를 짓밟았다.

콰앙!!

굉음과 함께 날아가는 가스 지대.

한 발 뒤로 물러난 용주는 고개를 기울였다.

고개를 들었던 포자의 줄기가 가루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모래처럼.

“카각!”

역으로 치고 들어온 카일론을 마주한 용주는 기습적으로 꼬리를 깨물었다.

키이익!!

치명적인 소리를 만든 대회전 베기.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은 카일론은 오른손을 치켜올렸다.

“칵!”

용주의 가슴을 꿰뚫는 원뿔 창.

창의 형태로 바뀐 오른손은 용주의 등을 뚫고 나와 있었다.

위이잉!

치명상을 입은 용주에게 날아오르는 수십, 수백의 날벌레들.

용주의 피를 머금은 녀석들은 일순간 피를 방사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생겨난 찰나의 틈.

자신의 피로 역병 포자를 키운 용주는 포자 폭발을 일으켰다.

거칠게 땅을 구르는 용주.

물수제비를 뜨는 용주의 머리 위론 핏빛 방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촤악!

맹진해 온 카일론과 교차한 용주의 옆구리를 타곤 피가 뿜어져 나왔다.

분명 조금 전에 반파시켰던 카일론의 오른손은.

꾸득거리는 기이한 소리를 내며 원래 모습을 되찾아 있었다.

“카각!”

하지만 용주라고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용주의 손톱은 녀석의 몸을 할퀴지 못했지만, 손목을 휘감은 촉수들은 카일론의 몸에 닿았다.

그리고 지금 용주의 앞엔.

그의 모습을 본뜬 물방울이 있었다.

푸와악!

물방울을 씹어 찢은 용주는 거대한 피의 해일을 일으켰다.

점점 더 몸집을 키워 나가는 파도.

고개를 든 카일론은 파도를 바라보았다.

물속에 무언가 있었다.

폭발적인 속도로 솟구쳐 오르는 한 마리의 괴물이.

파도 위로 솟구친 용주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파도의 크기나 경로.

그 어떤 거로 봐도 카일론을 삼켜 내야만 하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파도는 홍해처럼 둘로 갈라져 있었다.

일격에 파도를 갈라놓은 카일론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건 어떨까?’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자라나는 수십, 수백의 가시돌기들.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한 용주는 폭발적으로 강하했다.

콰앙!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가시돌기들.

피 폭발을 동반한 일격은 치명적이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쾅!

앞다리를 치켜든 카일론은 그대로 용주를 찍어 눌렀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 그대로의 카운터 어택.

카일론의 몸에 박혔던 무수히 많은 가시들은 빠르게 부식되어 부스러졌다.

휘익!

그 순간, 카일론의 몸을 휘어 감는 용주의 꼬리.

부식되고 재생되기를 반복하는 사이.

갈라놓았던 다른 한쪽의 꼬리가 카일론을 향해 뻗어 나갔다.

위협적으로 돋아난 네 개의 턱은 꼬리의 일격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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