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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69화 (269/357)

269화

‘쓰러뜨렸어.’

사신형 언노운을 쓰러뜨린 용주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 많은 언노운 중 이제 하나 쓰러뜨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가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A급 헌터.

그중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는 형만이 고전했던 녀석들이 바로 이 녀석들이었으니까.

끼리리릭~!

한 마리의 언노운이 쓰러지자 이번엔 세 마리의 언노운이 행동을 개시했다.

‘레이징 브레이크!’

왼손으로 땅을 짚은 용주는 바짝 세웠던 두 다리를 내리찍었다.

방울방울 피어오른 핏방울은 용주의 다리를 단단하고, 날카롭게 바꿔 놓았다.

마치, 아웃레이지 스내치를 사용할 때 팔의 형태가 변화하는 것처럼.

콰앙!!

굉음을 내며 깨져 나가는 타일.

용주의 뒤를 잡은 언노운은 맹렬한 속도로 용주를 관통했다.

“!”

제자리 점멸로 공격을 흘려보낸 용주는 왼손을 끌어당겼다.

어느샌가 자라난 촉수를 따라선 언노운 모양의 물방울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울 터치를 터뜨린 용주는 갑작스럽게 허리를 틀었다.

빙글 돌린 룬검은 언노운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절대 영도.’

중심부터 적을 얼리는 서리의 검.

‘아토믹 버스터.’

하얀 갑피에 둘러싸인 왼손.

있는 힘껏 팔을 휘두른 용주는 얼음 결정을 깨부쉈다.

총알처럼 날아가는 얼음 조각은 이 일격의 힘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언제까지 간만 볼 생각이냐?”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언노운을 짓밟은 용주가 룬검의 빛을 밝혔다.

“그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에서 먼저 간다.”

칼날을 감싼 푸른빛을 타고 넘치는 새하얀 서리.

서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본 드래곤은 두 날개를 활짝 펼쳤다.

비상하는 보좌관.

입안 가득 한기를 끌어모은 보좌관은 지상을 향해 서리와 안개를 토해 냈다.

지면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냉기.

냉기 폭풍에 밀려난 언노운들에 의해 대열은 둥근 피라미드형이 되어 갔다.

짙은 브레스를 쏟아 내던 보좌관에게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빛 망울.

푸른빛을 내뿜는 빛 망울은 작은 혜성을 보는 것 같았다.

‘얼음 무덤.’

빛 망울이 용주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거대한 냉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삽시간에 모든 걸 얼려 버린 혹한.

혹한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용주는 밟고 있던 언노운의 머리를 깨부쉈다.

용주의 주변으론 각기 다른 자세를 한 사신형 언노운들이 동상이 되어 있었다.

‘그 위력으로도 겨우 이 정도 처리한 게 전부인가?’

쓰러뜨린 언노운은 10마리 남짓.

남아 있는 언노운의 수를 생각한다면 소수였다.

“그래도 제대로 날뛸 생각은 든 모양이지?”

냉기의 여파를 받은 언노운들은 서서히 회전력을 높여 갔다.

녀석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얼음 조각이 지면을 때리는 소리는 한여름 소나기처럼 사나웠다.

속도를 높인 언노운들은 사방에서 거리를 좁혀 왔다.

녀석들의 움직임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형태가 없는 것처럼 유연했다.

그에 반해 무기에 실린 힘은 바위와 같았다.

상승한 능력치, 그리고 제련한 룬검으로도 평행 혹은 약간 우위를 점하는 게 전부였다.

촤악!

용주의 어깨와 팔꿈치를 찢고 지나가는 사신의 낫.

형만의 팔을 잘라 냈던 그 낫들은 용주에게도 여전히 유효했다.

“분명 너희 중에 있겠지. 내 심장에 구멍을 냈던 녀석이.”

피어오르는 붉은 핏방울.

전신을 뒤덮는 핏방울 속에 선 용주는 룬검을 집어넣었다.

“와라. 그때의 빚을 확실하게 갚아 주마.”

광폭화를 사용한 용주는 네 발로 땅을 짚었다.

“카각!”

지면을 박차고 오른 용주가 순식간에 언노운 사이로 파고들었다.

용주와 짧은 공방을 주고받은 언노운은.

지금 용주의 이빨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늘거리는 촉수를 뻗은 용주는 등 뒤를 노린 세 방의 공격을 막아 냈다.

언노운을 휘어 감는 촉수들.

셋 중 둘을 양손으로 붙잡은 용주는 있는 힘껏 강하했다.

들끓는 피 폭발 속에 우뚝 선 꼬리엔 마지막 한 녀석이 꿰뚫려 있었다.

파죽지세로 공격을 이어 가던 그때.

모든 빛이 한순간 사라졌다.

‘이건….’

갑작스럽게 찾아온 암전.

자기 손조차 보이지 않는 이 암전을 용주가 잊었을 리 없었다.

‘그때랑은 다를 거다.’

각막에 변화를 준 용주는 어둠 너머를 볼 수 있는 시야를 모색했다.

안경 도수를 맞추듯 변화하는 초점.

보통의 어둠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용주의 눈동자는 계속해서 변화했다.

그리고.

세로로 길게 찢어진 용주의 눈동자엔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

‘온다.’

외곽으로 흩어졌던 언노운들이 지면을 긁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는 소리를 마주한 용주는 꼬리를 물었다.

그때는 피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지만, 이번엔….

키이익!!

교차하는 언노운들을 마주한 용주는 물고 있던 꼬리를 휘둘렀다.

촘촘하던 그물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는 대회전 베기.

세 발의 페이탈 붐을 쏟아 낸 용주의 꼬리가 여섯 개로 갈라졌다.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에스카톤 저지먼트.

반동으로 밀려 나간 용주의 뒤꿈치는 부서진 어느 한 조각상과 부딪쳤다.

한 차례 맹공을 쏟아 낸 용주는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을 동그랗게 에워싼 언노운들이 오 층으로 탑을 쌓고 있었다.

‘뭐 하려는 거지?’

선공을 취하려는 용주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멈춰 섰다.

‘뭐지?’

급격하게 줄어드는 용주의 HP.

이상을 감지한 용주는 자신의 팔을 살펴보았다.

어둠 속에 뭔가 있었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검은 잿가루가.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는 건가?’

HP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외상은 없었다.

자신에게서 시작된 검은 잿가루의 행렬은 언노운에게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영혼 안개를 발동했을 때 안개가 자신에게 흘러오는 것처럼.

‘그렇다면….’

블러드러스트 상태로 돌입한 용주에게서 하얀 안개가 흘러나왔다.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영혼 안개.

눈처럼 새하얗던 안개는 돌연 색을 바꾸었다.

광폭화 상태에서 펼쳐진 하늘거리는 날개는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디, 누가 먼저 쓰러지나 해보자고.’

일방적으로 생명력을 빨아가던 언노운들에게서 붉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은하수처럼 어우러지는 붉은빛과 검은빛.

흡수하고, 흡수당하는 줄다리기는 피와 살점이 튀는 살육전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줄다리기의 끝에서 패자를 기다리고 있는 건 오직 죽음뿐이었다.

모든 언노운에게 이어진 두 가지 흐름.

용주의 HP는 차올랐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하며 요동쳤다.

손을 뻗는 언노운들은 용주에게서 더 많은 HP를 뽑아냈다.

하지만 용주라고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HP가 줄어들면 스킬 위력이 증가하는 ‘갈증’.

그 효과는 지금도 유효했다.

만약 이 줄다리기 끝에 한 번이라도 HP가 최대치를 초과한다면….

‘가시지 않는 식욕’이 한 번이라도 발동하면 게임은 끝이었다.

“!”

팽팽한 줄다리기가 한창이던 그때.

사라졌던 빛이 다시 돌아왔다.

사방을 에워싸던 언노운들은 겨누고 있던 팔을 거뒀다.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하는 언노운들.

공격을 멈춘 언노운들은 두 줄로 다시 도열했다.

사원을 중심으로 도열한 녀석들은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병사들 같았다.

‘지나가라는 거냐?’

녀석들을 살핀 용주는 영혼 안개를 거두었다.

가장 늦게 무리로 합류한 언노운은 용주와 마주 보고 섰다.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던 녀석은 무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 등을 보였다.

계단을 오른 용주는 제단의 정상을 밟았다.

여기가 바로 끝이자, 시작이었던 장소.

여기 역시도 마지막에 봤던 그대로였다.

‘감회에 젖을 때는 아니지. 그럴만한 장소도 아니고.’

힘껏 뛰어오른 용주는 공중을 밟고 또 한 번 도약했다.

천장에 뚫린 구멍은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높았다.

네 개의 촉수를 뻗은 용주는 갈고리 같은 끝으로 몸을 고정시켰다.

문어 다리의 모습을 한 촉수들 역시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로 벽을 짚은 용주는 계속해서 언노운을 따라갔다.

빛 속으로 떨어진 용주는 네발로 땅을 짚었다.

동그랗고 평평한 바닥의 감촉은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웠다.

멀리 보이는 풍경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여긴 첨탑의 꼭대기인 모양이었다.

광폭화를 푼 용주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잿가루가 휘날리는 왕좌엔 녀석이 앉아 있었다.

“기껏 불러 놓고는 일어날 생각도 안 하고. 엉덩이가 너무 무거운 거 아니냐?”

“…….”

“사신형 언노운. 녀석들을 보낸 건 분명 너겠지. 그걸로 뭔가를 보고 싶었을 테고.”

용주의 시선에 언노운이 조용히 물러갔다.

잿빛 왕좌엔 이제 두 사람뿐이었다.

“진실과 마주하라고 그랬지? 벼려냄의 시간은 끝났다고.”

계단 앞에 선 용주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말한 진실이란 건 뭐냐?”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 다른 사람들에겐 잊힌 기억.”

“두 분을 살해한 건 너냐?”

거두절미하고 내리꽂힌 용주의 물음에 사내는 침묵을 지켰다.

“부정할 생각은 없는 거냐? 그럼 처음부터 내가 두 분과 관계가 있단 걸 알기에 접근했던 거냐?”

“…….”

“그럼 왜 날 살려 둔 거냐? 이걸로 네가 얻고 싶던 건 대체 뭐냐?”

거칠게 몰아치는 용주의 물음.

투지와 살기가 섞인 용주의 눈빛은 활활 불타올랐다.

“대답해.”

“순환의 끝.”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딱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순환의 끝이라고?”

용주가 미간을 좁혔다.

뭔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은 아니었다.

“삶은 죽음에서 끝이 나고, 부패와 망각을 걸쳐 소멸한다. 그렇다면, 죽음이 없는 자의 끝은 어디일까? 부패도, 망각도 듣지 않는 자들의 끝은 어디일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죽음을 모르는 자들은 강대하다. 영원의 시간 속에 수없이 담금질된 명검 중의 명검이지. 하지만 벨 게 사라진 명검은 아무런 쓸모없는 철 덩이에 불과하다. 쓸모가 없어진 철 덩이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할 길을 찾기 시작하지.”

사내가 손을 움직이자 세계의 파편들이 모여들었다.

용주의 곁으로 날아든 세계의 파편 속엔 각기 다른 풍경들이 담겨 있었다.

“잘 들여다봐라. 지금의 너라면, 분명 볼 수 있을 거다.”

‘들여다보라고?’

눈앞을 지나는 파편에 용주는 정신을 집중했다.

파편에는 무너진 폐허 속 서 있는 한 성당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잠깐만, 이거….’

우뚝 솟은 종탑과 멀리 보이는 다리.

혹시나 싶던 용주의 눈에 결정적인 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 와인 기사와 세 석조 드워프.

틀림없었다.

여긴.

‘잊힌 영웅들의 성’이었다.

“설마….”

무심결에 목소리가 새어 나온 용주는 다른 조각들을 살펴보았다.

한적한 등대와 피아노를 연주하는 오우거.

붉은 사막을 달리는 리자드맨.

밤에 잠긴 고성의 인형들과 뱀파이어.

동굴 속에 웅크린 놀.

조그마한 별자리들과 함께 있는 설녀.

자기장에 잠긴 섬과 갈고리가 흔들리는 어둠그늘 숲.

눈앞을 지난 모든 풍경은 전부 용주가 지금까지 지나온 퀘스트 게이트였다.

“퀘스트 게이트….”

“네가 지금까지 거쳐 왔던 모든 세계. 넌 그게 뭐였다고 생각하느냐?”

“그거야 네가 만든 세계겠지.”

녀석이 만든 세계.

이안이 사용하는 능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녀석이 그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를 토대로 퀘스트 게이트란 공간을 창조했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용주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이자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실제로.

여기 그 조각들이 떠 있기도 하니까.

“그래. 그럼 지금껏 네가 만나 왔던 자들을 너는 허구의 존재. 환상 속의 생명들이라고 생각했느냐?”

“…….”

그 질문에 용주는 대답을 망설였다.

1+1=2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는 답이 분명했다.

세계 자체가 창조된 거라면, 그 안에 있는 녀석들은 더 물을 것도 없으니.

하지만 어딘가….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은 녀석들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자신은 녀석들을 이안의 피조물들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생각했는가?

그렇게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대답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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