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 * *
“…….”
놀이터를 지나던 수지가 놀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술래잡기를 하고 있던 것처럼 보이는 개구쟁이 중 하나가 울고 있었다.
술래처럼 보이던 아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고 말이다.
물론.
모든 아이들은 거의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안 아플 거야.”
아이에게 다가간 수지는 아이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넘어져 까진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현실 시간으로 치면, 내일이 약속한 날짜였던가?”
핸드폰을 연 수지는 시간을 확인했다.
족히 한 달은 더 지난 것 같은데. 날짜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잘하고 있는 거지?”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 혼자인 거.
처음엔 꽤 신기한 경험 정도로만 생각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도, 차도를 달리는 자동차도, 하늘을 나는 새들도, 전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한 가지 감정이 더 들었다.
함께이지만 고립되어 있는 이 시간이….
조금은 외로웠다.
지잉!
핸드폰 진동에 수지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금의 넌 어디서 뭘 하고 있니?
어딘가 철학적으로도 보이는 메시지.
발신인은 수지 자신이었다.
“느린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 이런 기분이겠지?”
핸드폰 메시지라는 건 누르는 순간 상대가 볼 수 있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 메시지가 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배구공 친구가 있던 그 사람보단 덜 외로운 거려나?”
문자에 답장을 입력한 수지는 가던 걸음을 계속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도우려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쓰러지면 용주에게 분명 큰 걱정거리를 안겨 줄 거란 걸 알기에, 수지도 최소한의 관리 정도는 신경 쓰고 있었다.
한 고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선 수지는 드리블 중인 한 학생에게 다가갔다.
“이건 크게 다칠지도.”
드리블을 하는 학생에겐 딱히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서 태클을 건 남학생의 상태와 결합하면 잠시 후에 있을 미래가 어떤지 보였다.
백 태클의 깊이나 높이, 그리고 각도를 봤을 때 크게 다칠 가능성이 90% 이상 될 것 같았다.
“웃샤.”
크게 다치지 않을 자리로 위치를 조정한 수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수지가 찾은 교실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3학년 교실이었다.
복도 창으로 교실 안을 확인한 수지는 조심히 뒷문을 열었다.
여학생들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딱 한 명 있었다.
용주의 여동생이었다.
팬을 잡고 있는 예은의 책상 위엔 공책이 한 권 올라와 있었다.
공책에 붙은 작은 포스트잇에는 ‘언니’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공책을 챙긴 수지는 교실 뒷문에 섰다.
그리고.
수업 중인 선생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음….”
학교 옥상으로 올라온 수지는 공책을 펼쳤다.
첫 장에는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수지는 페이지를 넘겼다.
두 번째 페이지부터 적혀 있는 이야기는….
예은이 추억하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잃어버렸을 그 빈 페이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 * *
이글거리는 열기와 온몸을 짓누르는 압력.
갈기갈기 찢긴 대지 아래론 마그마가 흘렀다.
부서진 대지 위엔 거대한 괴수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이미 생명을 다한 녀석은 서서히 용암 아래로 잠겨 갔다.
“나의 위대한 군세 앞에 무릎 꿇어라!”
불의 갑옷을 두른 불멸왕이 부대의 전진을 명령했다.
물밀 듯이 몰려오는 수많은 기사들.
“라이덴!”
번개의 잔상을 남기며 이동한 라이덴은 후방을 맡은 궁수 부대를 전멸시켰다.
지그재그로 펼쳐진 번개의 선을 따라 떨어지는 번개.
한순간 전장을 쑥대밭으로 만든 번개에 수많은 기사들이 용암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작렬하는 번개는 용주에게도 직격했다.
용주를 강타한 번개는 이윽고 토성의 고리 같은 형태로 변화했고, 가볍게 휘젓는 팔을 따라 퍼져 나간 전류는 부채꼴 형태로 물결쳤다.
“크윽!”
“끄아악!”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진군은 멈추지 않았다.
‘쉐도우 일루젼.’
스킬을 사용한 용주의 그림자가 훨씬 진하게 선명해졌다.
‘선혈의 파도’
힘껏 뛰어오른 용주는 거대한 해일을 일으켰다.
맹독이 섞인 해일은 붉은색보단 검은색에 조금 더 가까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해일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연거푸 이어지는 세 번의 파도.
처음 것에 비하면 크기도 위력도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그건 상대적인 부분일 뿐이었다.
“커헉…!”
마비와 중독.
두 가지 상태 이상에 범벅이 된 생존자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언홀리 프렌즈.’
새롭게 발현된 또 하나의 스킬을 발동한 용주의 피부색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죽은 사람의 피부처럼 차갑고 창백한 용주의 피부.
이건 스팀팩과 유사하게 속도를 높여 주는 자기 가속 계열의 스킬이었다.
스팀팩과의 차이가 있다면, 스킬이 종료되는 시점에 오는 후폭풍이 없다는 것.
대신, 이렇게 겉모습이 변하는 특징이 있었다.
‘물어뜯기!’
엄청난 속도로 대열 사이로 파고든 용주는 병사들을 물어뜯으며 지나갔다.
쉐도우 일루젼은 2차, 3차 피해를 야기하며 뒤따라왔다.
앞을 가로막는 기사를 점멸로 통과한 용주는 기사를 갑옷째 꿰뚫었다.
신구 스킬의 절묘한 조화.
용주의 돌진엔 거침이 없었다.
“다들 무사한가?”
한바탕 난리가 난 곳에 달려온 기사가 생존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전멸한 것처럼 보이던 것과 달리 다행히 움직이는 기사들이 제법 있었다.
“이봐. 무사….”
기사의 어깨를 잡은 사내가 그를 불렀다.
그런데.
“!”
부서진 투구 아래로 뭔가 잘못되었단 게 보였다.
투구 안으로 보이는 사내의 살점은 온통 부패해 있었고, 뼈가 보이는 곳도 있었다.
“크아악!”
괴성을 내며 일어난 기사는 아군이었던 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뭐야?!”
“이 녀석들 상태가 이상한데?!”
일어난 기사는 한둘이 아니었다.
언데드로 변해 버린 기사들.
‘종숙주’라는 이름의 패시브 효과의 여파였다.
이 스킬의 효과는 간단했다.
물어뜯은 상대를 좀비로 만드는 좀비처럼.
물어뜯어 죽인 몬스터 중 일부가 언데드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되살린 언데드들은 해당 게이트에서밖에 활용할 수 없었지만, 연속성을 띤 이 게이트 같은 경우에는 용주에게 꽤 많은 힘을 실어 주는 스킬이기도 했다.
“불의 의지가 우릴 지키니. 우리를 해할 자 누구랴.”
생존자 무리가 그룹을 이뤄 테스투도를 만들었다.
피어오르는 불의 봉화.
불길 속으로 뛰어든 언데드 기사들이 활활 타오르며 쓰러졌다.
‘쉐도우 홀.’
아래로 뻗은 용주의 손 그림자가 동그랗게 일그러졌다.
날카롭게 세운 다섯 손가락 사이론 핏방울이 응축되었다.
‘혈사포!’
지면을 향해 사출된 굵은 핏줄기.
쉐도우 홀에 빨려 들어간 핏줄기는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크악!!”
굳건하던 테스투도가 순식간에 붕괴했다.
피 폭발이 일어난 테스투도의 중심부엔 쉐도우 홀이 뚫려 있었다.
일방적인 학살이 계속되던 그때.
“살 한 점 남기지 않고 녹여 주마!”
용암에서 솟구친 지옥 벌레가 화염을 토해 냈다.
균열을 뛰어넘은 용주는 건너편 타일에 올라탔다.
푸왁!
그 순간 솟구치는 대지.
하늘로 내던져진 용주의 눈에 세 가지 공격이 동시에 보였다.
하나는 불멸왕이 날린 검기.
다른 하나는 지옥 벌레가 쏜 화염.
마지막 하나는 거대한 헬터틀이 떨어뜨린 종유석이었다.
‘칫!’
최대한 뒤로 물러난 용주는 타일 끝에 아슬아슬하게 섰다.
‘아토믹 버스터.’
용주의 팔을 덮는 하얀 입자.
하얀 갑피에 둘러싸인 용주의 왼팔은 광폭화를 발동했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랄까?
마치, 이런 골격을 가진 악마의 뼈를 그대로 옮겨 붙인 것 같았다.
쾅!
주먹을 움켜쥔 용주는 타일을 내리찍었다.
갈라지며 뒤집히는 거대한 타일.
교차하는 두 공격은 타일의 밑바닥에 부딪혔다.
남은 공격은 하나.
교차하는 세 개의 촉수를 뻗은 용주는 떨어지던 종유석을 집어 던졌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용암 속으로 몸을 숨긴 지옥 벌레는 전혀 다른 곳에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하! 바보 같은 놈! 제 살길을 제 발로 차 버린 꼴이라니!”
용암으로 곤두박질치는 용주의 모습에 지옥 벌레가 코웃음을 쳤다.
공중을 밟아 방향을 튼 용주는 점멸로 한 번 더 자리를 이동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래는 여전히 용암 지대.
이대로 있다간 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 말곤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때.
휘이익~!!
용주의 곁으로 잿빛 바람이 몰려들었다.
“이건 또….”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바람의 정체는 언데드가 되어 일어났던 기사들.
재가 되어 흩날린 그들은 용주에게 모여들었고, 이내 기괴한 모습을 한 망토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세상에, 저게 뭐야?”
“역겨워.”
“지옥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야.”
잿빛 기사들이 제멋대로 엉겨 붙어 있었다.
망토 밖으로 삐져나온 기사들의 팔은 기괴함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했다.
‘네크로 클록.’
잿빛 안개에 둘러싸인 용주는 하늘 위를 수놓았다.
불멸왕의 앞으로 떨어지는 잿빛 안개.
자세를 바짝 낮춘 용주는 서로에게 치명적인 위치까지 거리를 좁혔다.
“감히 짐의 기사들로 이런 장난을 치다니. 네 목으로 그들을 추모하리라.”
한발 앞선 불멸왕의 일격.
잿빛 망토를 펼친 용주는 공격을 받아 냈다.
불길에 떨어져 나간 망토에선 흡수되었던 기사들의 모습 일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우선 하나.’
룬검을 쥐고 있던 용주의 오른팔에 힘이 집중되었다.
튀어나올 듯 요동치는 수많은 힘줄.
손등부터 어깨까지 활성화된 비정상적인 힘의 흐름은 다음 일격이 결코 평범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풍참!’
거침없이 휘두른 용주의 일격은 불멸왕의 허리를 관통했다.
휘두른 검은 한 번처럼 보였지만, 불멸왕의 갑옷에 남은 상처는 하나가 아니었다.
“크헉! 네놈이 감히! 짐의 옥체에…!”
조각조각 갈라지는 불멸왕의 갑옷.
자상을 따라 피어나는 얼음의 궤적은 불멸왕의 상처를 한 번 더 후벼 팠다.
완전히 무너진 불멸왕의 목덜미를 붙잡은 용주는 그대로 녀석을 찍어 눌렀다.
작렬하는 아웃레이지 스내치.
지반과 함께 무너져 내린 불멸왕의 육신은 그대로 용암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용주는 마침맞게 달려온 라이덴에 올라탔다.
용암 사이를 누비는 라이덴의 돌진.
“전부 녹아 없어져라!”
지옥 벌레가 쏘아 올린 불길은 수백 수천의 탄환이 되어 지상으로 쏟아졌다.
‘이런 비슷한 공격이라면, 이미 상대해 봤어.’
프라이드가 쏘아댔던 페일노트의 공격 방식과 상당히 유사한 공격 형태.
능숙하게 라이덴을 이끈 용주는 불의 비 사이를 질주했다.
“녀석 근처까지만 데려다주면 돼. 그 이후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번개의 잔상을 남긴 라이덴이 무서운 속도로 하늘로 솟구쳤다.
교차하며 지나가는 라이덴과 지옥 벌레.
타격을 입기는커녕 오히려 공격을 적중시킨 지옥 벌레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
지옥 벌레가 보고 있던 라이덴의 모습이 번개의 분신으로 뒤바뀌었다.
분신과 자리를 바꾼 라이덴은.
지옥 벌레의 뒤에 있었다.
‘피의 메아리.’
지금껏 모아 왔던 핏빛 물방울을 흡수한 용주가 팔을 휘저었다.
크고 날카로운 턱에 두 동강 나 지옥 벌레의 상반신은 용암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나는…!”
“그래. 용암 속에서 다시 이어 붙이겠지. 아까처럼.”
지옥 벌레의 미간 사이에서 나타난 용주가 녀석과 눈을 맞췄다.
용주의 왼손으로 모여드는 피와 마나.
혈사포를 사용할 때와 유사한 흐름이었지만, 그 결과물엔 차이가 있었다.
회전하는 피의 구체는 흡사 붉은 실타래를 연상케 했다.
“이번엔 그렇게는 못 할 거다.”
“안 돼. 그러지 마! 안 돼!”
여덟 방향으로 입을 찢은 지옥 벌레는 최후의 저항을 펼쳤다.
‘페이탈 블러드!’
지옥 벌레의 화염을 정면에서 뚫고 나간 용주는 녀석의 목구멍에 스킬을 꽂아 넣었다.
난회전 하는 구체에 찢긴 지옥 벌레는 그대로 용암 아래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