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3파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녀석인가?’
번개와 눈보라가 뒤덮은 전장 속에서도 밤의 노인은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보였다.
상처가 누적된 다른 두 녀석과는 확연한 차이였다.
‘녀석을 우선 배제하는 게 좋겠어.’
난전이 가져다주는 이점이 분명 존재하지만, 지금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지금 원하는 건 최대한 빨리 녀석들을 처리하는 것.
오직 그뿐이었다.
속도를 높인 용주는 죽음의 요새에서 뛰어내렸다.
휘익!
그 순간, 용주의 발밑을 지나는 거대한 그림자.
보좌관에 올라탄 용주는 ‘오우거의 과일주’를 손에 쥐었다.
‘녀석은 얼굴 근처로 오는 공격은 물불 마다하지 않고 먹어 치웠어. 분명 이것도….’
과일주를 떨어뜨린 용주가 곧장 몸을 던졌다.
끓어오르는 갈증과 충동.
보좌관이 사라진 그곳에 나타난 괴물의 형태에 밤의 노인은 쩌억 입을 벌렸다.
과일주는 한 번의 제지도 받은 채 입안에 떨어졌다.
“이건 뭐지?”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맛과 향.
밤의 노인에게 그 달콤함을 음미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밤의 노인의 몸은 그대로 축 늘어졌고, 그가 일으켰던 무수히 많은 공격들은 일제히 잠잠해졌다.
프로포폴이라도 주입된 것 같은 엄청난 작용 속도였다.
갑작스러운 밤의 노인의 변화에 두 네임드 몬스터의 시선이 동시에 쏠렸다.
그 순간.
“카각!”
붉은 야수 한 마리가 밤의 노인의 입안으로 떨어졌다.
용주의 갑피를 뚫고 싹 트는 역병 포자
포자에 기생당한 것 같은 용주의 모습은 평소와는 다른 기괴함을 풍겼다.
‘디파일러!’
작렬하는 포자 폭발.
과일주의 효과로 2배의 피해를 입은 밤의 노인의 머리는 한순간 날아가 버렸다.
“아니!”
“이 몸의 공격에도 끄떡없던 저 덩치를 단 일격에….”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피와 포자.
마른침을 삼킨 두 네임드는 밤의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머리가 날아간 유해에 아까 삼켜진 괴물이 서 있었다.
우적우적!
빠드드득!!
밤의 노인의 유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면서.
“저 녀석 뭐야? 처음 보는 녀석인데?”
“아무래도 언제든 쓰러뜨릴 수 있는 당신과 노닥거릴 때는 아닌 것 같네요. 들끓던 언데드들이 잠잠해진 거로 봐서 저 위에 있던 자도 쓰러진 것 같으니까요.”
“하! 바보 아니냐? 그냥 이 몸의 힘을 빌리고 싶단 거잖아. 혼자는 못 쓰러뜨릴 것 같으니까.”
방망이를 어깨에 걸친 서리 거인이 피식거렸다.
“싫으신가요?”
“푸핫! 웃기지 말라고. 나도 너 같은 건 언제든 먹어 치울 수 있으니까.”
빙판을 깐 서리 거인이 맹렬하게 치고 나갔다.
그가 일으킨 12개의 얼음 기둥엔 벼락이 내리쳤고, 빙판을 타고 흐른 번개가 중심에서 솟구쳤다.
공격에 정통으로 직격당한 용주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먹던 걸 마저 씹었다.
“이봐! 눈을 어디다 뜨고 다니는 거야! 하마터면 이 몸이 맞을 뻔했잖아!”
“눈치껏 잘 피해 다니셔야죠. 그 경로에 있던 당신 잘못이라고요.”
“뭐?! 거기가 제일 좋은 위치였으니까 그리로 가는 게 당연하잖아! 이 말 대가리야!”
“말이라니. 머리에 뇌가 없으신 모양이군요.”
“뭐라고…!”
고작 한 합 만에 삐걱대는 둘의 연합.
‘로커스트 스웜’
다시 한번 착취의 무리를 일으킨 용주는 자신의 피를 녀석들에게 제공했다.
광폭화 상태의 용주의 피를 머금은 착취의 무리는 압도적으로 크기를 키웠고, 훨씬 더 포악한 날갯짓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저건 또 뭐야? 무슨 참새만 하잖아?!”
벌레들이 쏘아 내는 핏줄기 사이를 달리던 서리 거인이 눈앞을 스치는 벌레 하나를 잡아 뭉갰다.
이 벌레들.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녀석들이 쏘아대는 공격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게 아니었다.
“이런 잔재주를 부린다는 건 아까 같은 일격은 지금 못 쓴다는 이야길 테지.”
서리 거인이 노인의 유해를 타고 올랐다.
“널 삼키고, 다시 한번 왕의 자리에 우뚝 서겠다.”
서리를 응축시킨 작은 구체를 띄워 올린 서리 거인은 있는 힘껏 구체를 강타했다.
파방!
서릿발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얼음의 구.
네 발을 뿌리내린 용주의 입가론 붉은 입자들이 모여들었다.
“아니!”
위험을 직감한 서리 거인이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뒤통수를 스쳐 간 페이탈 붐은 번개를 모으고 있던 다른 한쪽에게 위협적으로 내리꽂혔다.
속도를 높인 용주는 서리 거인이 깔아 놓은 빙판을 따라 미끄러졌다.
“뭉개 주마!”
서리를 두른 서리 거인은 전력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지면을 타고 오른 번개의 실은 서리 거인의 공격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 ‘서리 거인의 성역’의 효과가 느껴집니다.
-행동 속도와 반응속도가 20% 감소합니다.
-얼어붙은 피부의 효과로 해당 효과를 감소시켰습니다.
메시지를 무시한 용주는 물고 있던 꼬리를 휘저었다.
댕강 잘려 나가는 서리 거인의 몽둥이.
서리 거인을 지나친 용주는 계속해서 속도를 높였다.
뒤를 돌아보던 서리 거인은 뒤늦게 몸이 두 동강 났다.
▶ 서리 거인 ‘키메두’를 쓰러뜨렸습니다.
▶ 대항력이 5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얼어붙은 피부’ 스킬이 ‘서리 갑피’ 스킬로 진화했습니다.
-냉기에 대한 저항이 대폭 증가하며, 냉기에 의한 피해가 대폭 감소합니다.
-동상에 의한 통증이 대폭 감소합니다.
-눈과 얼음에서의 속도가 증가합니다.
“제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을 겁니다.”
뇌성과 함께 사라진 사슴 신.
순식간에 100m 이상 거리를 벌린 사슴 신은 뿔에 모은 전류를 방출했다.
잔상을 남기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그의 공격은 용주의 HP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도망갈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제 손바닥 안이라고요.”
노인의 유해 쪽으로 후퇴하는 용주를 사슴 신은 전력으로 따라붙었다.
유해를 끼고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 용주의 모습.
사각에서 오는 기습에 유의한 사슴 신은 충분한 거리를 두며 코너를 돌았다.
예상대로 용주는 시야의 사각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뻔한 하수.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전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사슴 신이 고개를 휘젓자 날카로운 벼락이 내리꽂혔다.
첫 벼락에 직격당한 용주는 노인의 유해를 디딤돌 삼아 뛰어올랐다.
좌우로 고개를 휘젓는 사슴 신.
바닥에 생겨난 번개의 선을 타고내린 뇌성은 공간을 흔들었다.
“카각…!”
번쩍이는 번개와 함께 사라지는 용주의 모습.
거의 동시에 반응한 사슴 신은 잔상과 위치를 바꿨다.
용주가 휘두른 일격은 잔상을 강타했고, 잔상은 번개가 되어 용주의 HP를 갉아먹었다.
▶ 기린의 뇌격에 직격당했습니다.
-간헐적으로 행동에 방해가 되는 ‘마비’ 증상이 일어납니다.
“제 조심성이 제 역할을 똑똑히 했군요.”
교차하는 네 개의 번개 선을 따라 눈꽃 모양으로 번개가 떨어졌다.
잔상을 남기며 이동한 사슴 신이 용주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사슴 신의 걸음걸음마다 뻗어 나간 번개의 파동은 꽃처럼 피어나며 용주를 공격했다.
“몸이 저려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나 보군요.”
수많은 공격을 적중시킨 사슴 신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
지면을 타고 솟구친 꼬리가 사슴 신의 몸을 관통했다.
“꼬리가…. 그치만 꼬리는….”
서리 거인을 두 동강 냈던 꼬리.
그 존재는 충분히 인식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실제로, 용주의 꼬리는 전갈의 꼬리처럼 등보다 위로 올라와 있었다.
“설마….”
마주 보이는 분신과 위치를 바꾼 사슴 신은 용주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의 놓친 퍼즐의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협적으로 치켜올린 꼬리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자신이 보았던 건 꼬리의 반쪽.
나머지 반쪽은 땅이 아닌 웅덩이진 그림자를 뚫고 들어가 있었다.
그림자를 타고 돌아온 꼬리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웅덩이진 그림자.
이건 밤의 노인을 집어삼키며 새롭게 발현된 ‘쉐도우 홀’이란 스킬에 기인한 것이었다.
“방심…했군요.”
사슴 신에게 달려든 용주는 녀석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악력으로 녀석을 들어 올린 용주는 좌우로 녀석을 흔들었다.
번개를 내리꽂으며 저항하던 사슴 신은 이내 빛을 잃어버렸다.
▶ 기린 ‘라이덴’을 쓰러뜨렸습니다.
▶ 대항력이 6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환수의 뿔’을 획득했습니다.
-시전자를 따라 다니는 번개 구름을 생성합니다.
-시전자의 공격에 맞춰 낙뢰가 떨어집니다.
-낙뢰는 확률적으로 ‘마비’ 상태 이상을 일으킵니다.
-지속 시간 : 3분
▶ 새로운 스킬이 발현되었습니다.
▷ ‘기린의 역린’
-패시브.
-번개에 의한 피해가 감소하며, 번개를 축적해 되돌려 줄 수 있습니다.
-축적한 번개를 이용해 분신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일정 거리 내 분신과 자리를 바꿀 수 있습니다.
모든 네임드 몬스터가 쓰러지자 차원에 작은 흔들림이 일었다.
▶ 다음 ‘인커전’까지 남은 시간 : 60분.
일렁이는 메시지를 마주한 용주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커전…. 다른 무리와 조우하는 걸 여기선 그렇게 부르나 보지?’
몸에 잔류한 전류를 한데 모은 용주는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보였다.
위치를 뒤바꾼 분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했다.
‘1시간이면 그래도 숨 돌릴 시간 정도는 있네.’
마주한 적마다 특색이 명확했다.
하나하나가 퀘스트 게이트의 최종 보스들이라 해도 납득이 갈 만큼의 강함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리스크에 비례한 리턴은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수준이었다.
단번에 오른 레벨과 껑충 뛰어오른 대항력.
거기에 각종 스킬들의 레벨 역시도 올라갔고, 새롭게 발현되거나 진화한 스킬들도 있었다.
‘아직 테스트해 보지 못한 기술도 하나 있었는데.’
밤의 노인을 쓰러뜨리면서 얻은 스킬은 총 2가지였다.
하나는 쉐도우 홀.
다른 하나는 ‘쉐도우 일루젼’이란 스킬이었다.
쉐도우 일루젼을 짧게 요약하면, 움직임을 따라 하는 그림자를 자신과 포개어 놓는 스킬이었다.
스킬이나 공격의 위력은 본체를 따라올 순 없지만, 활용하기에 따라선 폭발적으로 적을 몰아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의 24시간이 현실에서의 1시간이라고.’
여기 들어오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몸이 느끼는 체감보단 한참 짧을 것이다.
바깥 시간이 흐른다는 게 꽤 낯설게 느껴졌다.
아주 천천히지만 말이다.
‘안수지 그 녀석, 꽤나 낯선 경험 하고 있겠네. 자기 말곤 다들 멈춘 것처럼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수지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보일 것인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용주는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뭐… 좀비 소동 대신에 귀신 소동이 나는 정도로 끝나 주면 참 다행이겠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끝은 어디이려나.’
약속했던 시간은 3일.
한 시간을 하루로 계산하면, 현실에서의 하루는 이곳에서의 24일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결코 짧지만은 않다는 이야기였다.
‘제시간에 맞출 수 있어야 할 텐데.’
스테이터스 창을 연 용주는 능력치를 골고루 분배했다.
대항력과 능력치.
이 두 가지가 상승하면, 기대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시련.
첫 번째 시련이 해금된 시점은 올스탯 120에 대항력 30에 도달했을 때였다.
두 번째 시련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녀석과 대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두 분에 대해 녀석이 알고 있는 걸 물을 수 있을 거다.
첫 번째 시련에서 광폭화를 손에 넣은 것처럼, 전력을 확 키울 수 있는 무언가가 더 있을지도 모르고.
‘일단은….’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데스컬트의 고서’를 꺼내 들었다.
리치를 제외하면 다른 몬스터는 총 셋.
용주가 대상으로 삼은 건 가장 마지막에 쓰러뜨렸던 기린 ‘라이덴’이었다.
사슴 신인 녀석을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간단했다.
밤의 노인은 이 고서로는 살릴 수 없었고, 서리 거인보단 이쪽이 여러모로 더 유용하단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 ‘데스컬트의 고서’에 기린 ‘라이덴’이 구속되었습니다.
-현재 라이덴의 레벨 : 55.
-언데드로 되살아난 라이덴은 전투에 의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을 모두 소진한 라이덴을 재소환하기 위해선 재사용 대기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전투로 성장한 라이덴은 생전에 사용할 수 없던 새로운 스킬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고서를 펼친 용주의 앞에 라이덴이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살과 근육이 떨어져 나간 사슴 신은 뼈와 뿔만을 간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