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 * *
“불공평해.”
일렁이는 두 개의 포탈.
서로 다른 풍경을 비추는 두 포탈 사이에 선 수지가 이야기했다.
수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함께 맺은 영원의 계약.
그 결과로 상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이는 용주뿐이었다.
메뉴 패널을 불러내지 못하는 수지는 해당 기능을 이용할 수 없었다.
“뭐,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냐?”
“음….”
“괜찮을 거다. 나한텐 이게 있으니까.”
수지와 눈높이를 맞춘 용주가 가지고 있던 이형 워프 장치를 꺼내 보였다.
이 물건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느냐를 떠나서, 이게 상징하는 의미만으로도 충분했다.
“응,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밖에 나가선 뭐 어떻게 할 생각이냐? 시간.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질 텐데.”
“음. 필요할 만한 곳들을 한번 찾아가 보려고. 원래라면 도움을 주지 못했을 사람들한테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냐? 뭐, 너 다운 발상이네.”
“응. 그럼 몸조심해.”
가벼운 손 인사를 건넨 수지가 오른쪽 포탈로 사라졌다.
그녀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던 용주는 왼쪽의 포탈을 바라보았다.
다크 포탈.
시련을 경험했던 곳과 마찬가지로, 저 포탈은 불길한 검은빛만을 머금고 있었다.
“자, 그럼 어디 해보자고.”
마음을 가다듬은 용주는 다크 포탈 안으로 들어섰다.
* * *
▶ 히든 게이트에 입장했습니다.
‘여기가 히든 게이트?’
입장과 동시에 느껴지는 서늘한 불길함.
오른쪽으로 급하게 몸을 던진 용주는 룬검을 뽑아 들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몽둥이가 지면을 부숴 놓은 뒤였다.
‘주변을 살짝 둘러볼 시간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니냐?’
고개를 든 용주는 서리 거인과 마주했다.
오우거보다도 거대한 체구를 가진 녀석은 하얀 서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새로운 사냥감이 하나 더 늘었구나.”
서리 거인이 발을 구르자 지면을 뚫고 거대한 빙산이 솟아올랐다.
높게 뛰어올라 빙산을 뭉개는 서리 거인.
반복해서 뛰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거대한 눈덩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꾸어억!”
분주하게 날뛰던 서리 거인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오른 다리의 오금에서부터 시작된 자상은 아킬레스건에서 직각으로 꺾여 있었고, 상처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얼음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녀석, 약한 주제에 촐랑촐랑…!!”
분노를 표하던 서리 거인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번개가 내리꽂혔다.
“꾸억!”
고통을 표한 서리 거인은 그르릉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약한 주제에 촐랑촐랑.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겠지요. 덩치만 큰 산적 씨.”
또각거리는 발굽 소리를 내며 한 마리의 사슴이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다.
보통 사슴과 다른 점이라면, 2배 정도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 있다는 점. 뿔에 전류 같은 게 흐르고 있다는 점. 기묘한 안광을 내뿜고 있다는 점. 그리고 녀석의 움직임을 따라 벼락이 치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크으윽. 네 이놈…!”
사슴과 서리 거인.
서로를 노려보던 두 괴물이 정면에서 격돌했다.
‘그래. 예상은 했지만, 확실히 전부 평범한 녀석들은 아닌 것 같군.’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용주는 두 녀석의 싸움에 끼어들려 했다.
그런데.
‘뭐지?’
거대함을 자랑하던 서리 거인의 크기가 조금 작아졌단 걸 느낄 수 있었다.
한발 물러난 용주는 잠시 상황을 살폈다.
그때.
“너희들의 존재를 전부 바쳐라. 밤의 노인의 어명이다.”
지면을 가르며 한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나무와 같은 몸을 가진 녀석의 상체는 해초에 뒤덮여 있었는데, 하늘거리는 해초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였다.
꼭 크툴루 신화 속에서 나올 법한 그런 기괴함이었다.
“밤의 노인은 무슨! 그냥 냄새나고 더러운 노친네 주제에! 그리고 어명은 왕만이 내릴 수 있는 거야. 나 같은!”
힘의 일부를 빼앗긴 서리 거인이 타깃을 바꾸었다.
날카롭게 뻗어 나오는 해초 사이를 가로지르는 서리 거인.
격돌하는 두 녀석의 머리 위로 동그란 번개의 구체가 모여들었다.
한 발의 뇌성으로 시작된 번개의 폭풍.
일대를 엉망으로 휘저은 사슴은 재빨리 자리를 이탈했다.
지면에서 솟구친 해초들은 끈적한 점액을 쏟아 내고 있었다.
“저승의 하수인들이여. 나 데스컬트가 부르니. 명을 받들라!”
세 마리의 괴수가 뒤엉켜 싸우던 와중.
얼음과 점액에 뒤덮였던 지면이 순식간에 악취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검게 죽은 대지에서 일어나는 수백, 수천의 해골과 구울들.
하늘을 향한 용주의 시선에 뼈로 된 리치의 모습이 들어왔다.
네크로노미콘을 펼친 리치는 죽음의 요새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대체 몇 마리나 기어 나오는 거냐?’
복수의 네임드가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입한 지 5분도 채 안 되어서 이 정도 숫자라니.
앞으로의 시간이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있을 곳은 내 안이다.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여라.”
거대한 팔을 들어 올린 밤의 노인이 죽음의 요새를 내려쳤다.
“어리석군요. 끔찍할 정도로.”
주문을 외우는 리치.
그의 뒤로 도열해 있던 강령술사와 스켈레톤 메이지들은 일제히 방어 주문을 펼쳤다.
쿵!!
엄청난 충격을 버텨 낸 리치는 공격을 준비했다.
층층이 쌓인 서클은 도합 13개.
떨어지는 잿빛 기둥에 정통으로 가격당한 밤의 노인은 회색 재에 뒤덮여 있었다.
“감히 신의 옥체에 이런 무례를…!”
분노를 표하는 밤의 노인의 육체에서 해골과 구울들이 무더기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1분 1초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난타전.
상황을 분석하던 용주는 밤의 노인의 팔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룬검에 빛을 발한 용주의 곁에선 망자들의 군대가 일어났다.
리치의 군대가 아닌 ‘왕의 통치’로 불러낸 언데드들이었다.
언데드를 언데드에 맡긴 용주는 밤의 노인의 팔을 타고 올랐다.
“살은 부패하고, 피는 메마르니, 영원한 건 오직 죽음뿐.”
죽음의 요새로 도약하는 용주에게 리치의 저주가 작렬했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끔찍한 고통.
그 끔찍함에 순간 멈칫한 용주에게 불과 얼음, 그리고 맹독으로 이루어진 구체들이 날아들었다.
공중을 밟은 용주의 위치는 예상했던 궤도에서 제법 벗어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점멸을 동원해 최대한 축을 맞춘 용주는 새로 얻은 스킬 중 하나를 사용했다.
용주의 팔등을 타고 자라나는 세 갈래의 촉수.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비주얼을 자랑하는 이 촉수는 ‘살아 있는 바다’의 효과로 만들어 낸 물건이었다.
휘릭!
첨탑 기둥을 휘어 감은 용주는 반동을 타고 요새 중심으로 날아들었다.
용주가 잠시 신세 진 첨탑 기둥은 처참하게 부서져 지붕 위로 떨어졌다.
“경계망이 뚫렸다.”
“침입자다!”
“데스컬트 님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
부산하게 몰려드는 스켈레톤 메이지와 강령술사들.
사방에서 몰려드는 녀석들을 마주한 용주는 룬검을 내리꽂았다.
“저건…!!
“서리고룡?!”
“말도 안 돼. 서리고룡을 부를 수 있는 건 최상위 리치만 가능할 텐데.”
“저 녀석, 대체 어디서 저런 소재를….”
일대를 얼음으로 뒤덮으며 날아오른 보좌관은 두 개의 첨탑에 발을 올렸다.
소리 없이 울부짖는 녀석의 위용에 수많은 언데드들이 공포에 질려 통제를 벗어났다.
보좌관에 모든 시선을 집중시킨 용주는 리치가 있던 요새 머리 쪽으로 달렸다.
“타오르는 저주의 불꽃으로!”
“차디찬 죽음의 손길로!”
“죽음을 묵도하는 맹독의 숨결로!”
리치를 보좌하던 스켈레톤 메이지들의 집중포화.
마법 사이를 오가던 용주는 뒤로 폴짝 물러섰다.
‘피의 메아리, 선혈의 파도.’
동시에 발동한 두 개의 스킬.
용주가 일으킨 피의 해일이 광장을 휩쓸었다.
단 한 번의 쓰나미는 광장을 채우던 스켈레톤의 절반 이상을 무력화시켰다.
방울방울 피어오른 핏빛 방울들은 용주의 머리 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파드드득!
대량의 피를 방사한 용주에게서 한 무리의 벌레들이 날아올랐다.
로커스트 스웜.
피를 탐하는 착취의 무리였다.
눈앞에 있는 상대들은 주로 스켈레톤 메이지들이었다.
뼈로 이루어진 녀석들에겐 당연히 피가 없었다.
스킬의 제대로 된 효율을 발휘하기 적합한 상대가 아니란 소리였다.
하지만.
‘녀석이 사용했던 방법이라면, 이 녀석들을 상대로도 유효할 테지.’
날아올랐던 착취의 무리가 다시 용주에게로 몰려들었다.
용주의 피를 빠는 착취의 무리.
피를 가득 머금고 날아오른 무리는 주변에 있던 적들에게 피를 분사하기 시작했다.
핏줄기에 가격당한 스켈레톤 메이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쓰러졌다.
“독…. 주인님 저 벌레들에게선 지금껏 마주한 적 없는 맹독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아마 저희 세계엔 없던 독인 모양입니다.”
리치를 보좌하던 한 기사가 이야기했다.
홀몸으로 요새급의 전력을 휘젓고 있는 적은 작았지만, 결코 약하지 않았다.
“5기사단, 녀석을 생포해라. 녀석이 가진 지식과 힘을 탐구해 봐야겠다.”
명령을 내린 리치는 아래쪽에서 이어지고 있는 싸움에 집중했다.
침입자의 존재는 확실히 신경 쓰였지만, 요새에 더 위협적인 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주군이시여.”
“5기사단! 녀석을 생포한다!”
해골마에 올라탄 다섯 기사가 광장을 가로질렀다.
“데스 코일!”
다섯 기사가 날린 죽음의 고리.
미끄러지며 두 개의 고리를 흘려보낸 용주는 세 번째 고리를 두 동강 냈다.
남아 있는 고리는 이제 두 개.
착취의 무리를 방패 삼아 한 개의 고리를 더 막아 낸 용주는 날카로운 손톱을 세웠다.
콰지지직!
죽음의 고리를 움켜쥐는 다섯 손톱.
완전히 뭉개진 스킬은 이내 소멸해 버렸다.
“글라시우스의 주박!”
충분한 거리를 두며 달린 네 기사가 같은 영창을 외쳤다.
용주를 포위하며 나타난 원형의 결계.
“언홀리 슬래시!”
빙글빙글 도는 네 기사 사이로 치고 들어온 데스 나이트는 검을 휘둘렀다.
“!”
귀신처럼 사라지는 용주의 모습.
점멸로 공격을 흘려버린 용주는 데스 나이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아웃레이지 스내치!’
기사를 낙마시킨 용주는 그대로 녀석을 찍어 눌렀다.
작렬하는 피의 폭발에 직격당한 기사는 힘을 잃고 소멸했고, 산산조각 부서진 결계가 흩날렸다.
“디코더!”
“네놈이… 감히!!”
결계가 부서지며 휘청인 네 기사가 사방에서 거리를 좁혀 왔다.
네 기사의 위치를 확인한 용주는 해골마 사이를 가로질렀다.
꿈틀거리는 촉수는 무언가 일어났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너희들의 생명력. 내가 취해야겠다.’
용주의 앞에 나타난 네 기사의 실루엣.
부패한 입술을 벌린 용주는 네 물방울을 게걸스럽게 물어뜯었다.
“으윽!”
“끄악!”
하나둘 낙마하는 데스 나이트들.
일정 수준의 체력을 회복한 용주는 리치와의 거리를 좁혔다.
“꿇어라. 어리석은 자여. 데스컬트의 이름으로 명한다.”
▶ 데스컬트의 저주가 내렸습니다.
-저주받은 혼령이 몸을 짓누릅니다.
몸을 짓누르는 혼령들.
무거워진 발걸음을 악으로 깡으로 버텨 낸 용주는 남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시리도록 차가운 죽음의 한기를 느껴라. 새크리피셜 디멘션.”
직면한 위험에 리치는 침착하게 방어 주문을 둘렀다.
‘위력이라면 꽤 많이 축적했어.’
용주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핏빛 물방울.
손을 움켜쥔 용주는 손목을 내질렀다.
리치의 보호 주문은.
용주의 공격에 산산이 부서졌다.
“끄아악!!”
순식간에 리치를 관통하는 네 개의 턱.
용주의 손목과 팔등을 뚫고 나온 날카로운 턱은 리치의 핵을 그대로 꿰뚫었다.
▶ 리치 : 데스컬트를 쓰러뜨렸습니다.
▶ 대항력이 7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데스컬트의 고서’를 획득했습니다.
-히든 게이트 내 몬스터 중 한 구를 언데드로 되살릴 수 있습니다.
-데스컬트보다 강한 몬스터를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리치의 빛이 사라짐을 확인한 용주는 들어 올렸던 리치를 내던졌다.
쿠구궁…!
큰 진동과 함께 추락하기 시작하는 죽음의 요새.
걸음을 옮긴 용주는 리치가 보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밤의 노인은 정확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