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 * *
“왜 여기로….”
등대의 가장 높은 곳에 선 노엘이 의문을 표했다.
가까운 바다엔 크레아탄의 유해가 떠 있었다.
“피아노. 무사해.”
“이걸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노엘이 고개를 숙였다.
“등대 고치기 전에 한 가지 부탁했거든. 시간도 아직 조금 있고.”
“부탁 말씀입니까?”
노엘이 용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한 부탁은 따로 없었다.
그렇다는 건 그 대상은 저 소년 말곤 없었다.
“단 1분이라도 좋으니, 사별한 아내분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군. 그러면 그 곡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면서.”
“불가능한 일이란 거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아내와는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승에도 악기가 있다면, 거기서 들려줄 수 있겠지요.”
“만약 지금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고 싶냐?”
“지금…?”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한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이름 없는 자들의 위령비
두 마리의 새가 조형된 위령비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말해 본 것뿐이다. 정말로 만날 수 있을지는 나도 알 수 없어.”
“…….”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위령비를 본 노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만날 수 있다면…. 그래도 된다면, 꼭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아직 못 다 전한 이야기가. 아직 못 다 들려준 노래가 제겐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 알았다.”
수지를 힐끔 바라본 용주는 위령비를 발동시켰다.
위령비에서 시작된 푸른 오로라는 등대 전체로 퍼져 나갔고, 위령비엔 ‘엘’이란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게 대체….”
이질적인 공허함에 고개를 돌린 노엘의 눈앞에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아내의 얼굴을 덮어 놓았던 흰 천이 바닷바람에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거기 있어야 할 아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엘?”
놀란 노엘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푸르게 감돌았던 오로라가 반딧불처럼 방울방울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노?”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노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푸른빛에 감싸인 아내가 서 있었다.
“정말 당신이에요?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엘이 자신과 남편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저기 있는 건 분명 노였고, 여긴 분명 둘이 함께 노후를 보냈던 바로 그 등대였다.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오. 저기 저분들께서 도움을 주셨다네.”
엘의 시선이 다른 두 사람을 향했다.
“오우거도 랫맨도 아니군요. 당신들은.”
“뭐, 그렇지.”
“대체 어떻게…. 전 분명…. 그리고 이 몸은 대체.”
노엘.
둘이 합쳐 하나의 이름이 되었던 것처럼 자신과 남편은 둘이자 하나인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정면에서 그이를 마주 볼 수 있었다.
평생 자신의 자리였던 그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령’이라는 형태라고 부른다고 하더군.”
“령?”
“그래. 정확히 말하면 정말로 되살아난 건 아니야. 이 위령비를 매개로 이쪽 세계에 잠시 묶어 둔 것뿐이지.”
“위령비….”
엘은 그제야 피아노 근처에 놓인 위령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위령비는 생전 이곳에 없던 물건이었다.
“그 몸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이 등대뿐일 거다. 아까 오로라가 퍼진 범위는 딱 그 정도였으니까. 위령비가 파괴되면, 그 몸도 소멸할 거고.”
어깨를 들썩인 용주는 노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기서부턴 직접 말해라.
용주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보, 실은 당신에게 못다 전한 게 있어 이렇게 무례한 일을 벌인 거라오.”
아내에게 다가간 노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오. 준비해야 할 게 아직 있으니.”
* * *
수차례 이동을 반복한 노는 준비해 두었던 마지막 나무통을 들고 왔다.
피아노실을 가득 채운 과일 향은 달콤하고, 매혹적이었다.
노는 수지와 용주의 도움도 한사코 거절했다.
이 일만은 자신이 매듭을 짓고 싶다면서.
“함께 걸어 주겠소?”
프러포즈를 하듯 무릎을 굽힌 노가 손을 내밀었다.
술 길을 거닐며 피아노 앞에 도착한 두 사람.
건반 뚜껑을 연 노는 피아노 의자를 엘에게 양보했다.
“…….”
황금보검을 슬쩍 빼 든 용주는 금으로 피아노 의자를 만들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마법에 놀란 두 사람이었지만, 이내 감사를 표하고는 자리를 잡았다.
“들어 주시오. 전하고 싶었지만, 끝내 전하지 못했던 당신을 위한 곡이라오.”
잔잔하게 시작된 부드러운 선율이 등대를 너머 초원과 바다, 숲으로 번져 나갔다.
피아노 건반이 만든 빛은 뚜껑에 반사되었고, 사방으로 뻗었던 빛이 피아노에 굴절되어 천장으로 모여들었다.
빛이 만든 예술은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
“…….”
눈을 감은 엘은 조용히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엔 가사가 없었지만, 가사가 없어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선율엔 그가 하고 싶던 이야기가.
그가 들려주고 싶던 풍경이.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
마지막 선율을 연주한 노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박수를 치며 일어난 엘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향기와 가장 좋아하는 풍경. 거기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 정말… 정말 행복하네요.”
“황혼의 시간…. 당신에게 들려주는 내 마지막 세레나데였다오.”
“…….”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 주던 용주는 고개를 돌렸다.
감상에 젖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여기까지 온 거, 지금은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맞겠지.
“……?”
먼저 내려가자고 말하려던 용주의 어깨에 수지가 몸을 기댔다.
“아…?”
스스로도 놀란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엔 홍조가 드리워 있었다.
“어…. 어라? 왜 이러지?”
“너… 혹시 취한 거냐?”
“취해?”
확실히 뭔가 알딸딸하면서, 기분 좋은 편안함이 들었다.
“냄새만 맡고 취하다니. 너무 약한 거 아니냐?”
“나 취한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당사자인 네가 더 잘 알겠지.”
“이게 취한 거야?”
“…….”
수지와 눈이 마주친 용주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살짝 풀린 동공 하며, 무게중심도 못 잡고 비틀대는 거 하며, 영락없이 술에 취한 사람의 모습인데 말이다.
“너 설마 술에 취해 본 적 없는 거냐?”
“응. 없어.”
“뭘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있냐?”
“그치만 없는걸. 왜~ 없으면 안 돼?”
평소보다 조금 더 늘어진 말투.
더 무장 해제 될 것도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더 해제될 무장이 있던 모양이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다만….”
“그러는 너는~?”
“뭐? 나?”
“응. 이용주 너 말이야. 취해 본 적 있어?”
“…아니.”
용주가 고개를 돌렸다.
술이 사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인들과 마시는 기분 좋은 한 잔도.
힘든 일이 있을 때 마시는 쓰디쓴 한 잔도.
모두 술이니까.
하지만 살아온 인생에서 용주에게 그런 자리는 허락되지 않았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고.
부른다고 한들 나갈 의향도 없었다.
힘든 일이 있고, 슬픈 일이 있다 해도 술에 의존하진 않았다.
“우리 둘 다 똑같네. 그럼.”
용주의 얼굴에 손을 올린 수지가 고개를 확 끌어당겼다.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는 꽤나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술버릇. 사람마다 다르다고 들었어. 우리 술버릇 맞춰 보기 해볼까?”
부담스러운 거리.
거기에 의식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
용주로선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관심 없다만.”
“그럼 나부터 할게. 이용주 너는~.”
용주의 말을 무시한 수지가 턱 끝을 짚었다.
“동생이랑 이야기할 때 쓰는 그 말투 쓸 것 같아. 뭔가,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운 얼굴로.”
“…….”
“그럼 이번엔 네 차례. 내 술버릇. 뭐일 것 같아?”
“관심 없대도.”
“그러지 말고~ 응?”
안전거리를 넘어선 수지가 더욱 바짝 밀착해 왔다.
“말해 줘. 뭐일 것 같아?”
“…….”
뭔가 평소랑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수지의 모습.
술통에 몸을 기댄 용주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평소보다 말이 무진장 많아질 것 같다만.”
“말이?”
“그래. 그리고 말끝도 좀 더 늘일 것 같고, 약간 애교 섞인 콧소리도 나올 것 같고. 사람 귀찮게 집요해질 것도 같고, 뭐랄까…. 평소보다 조금 더 애기처럼 변할 것 같다만.”
“애기처럼…? 그건 안 좋은 술버릇인 거야?”
“뭐, 욕하고, 사고치고, 진상 부리는 그런 거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 아니겠냐? 사람에 따라서는 귀엽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만.”
“응. 그렇구나. 그럼 너는?”
“뭐?”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구~?”
정면으로 몸을 돌린 수지가 용주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취했다. 그만 가자.”
“되게 너 다운 반응이네. 응. 평소랑 똑같아.”
“됐으니까 따라오기나 해.”
“응. 알았어. 대신 잡아 줘. 넘어질 것 같아.”
“…….”
어쩔 수 없단 듯 한숨을 내쉰 용주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어?”
잘 따라오던 수지는 뭔가에 걸렸는지 순간 무게중심을 잃었다.
재빨리 뒤로 돌아선 용주는 넘어지는 수지를 붙잡았다.
“어디 가서 혼자 술은 마시지 마라.”
“응. 그럴게.”
수지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있잖아. 말도 안 되는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두 사람이 행복한 모습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용주의 부축을 받던 수지가 이야기했다.
“…그러냐.”
“저 두 사람~ 날 때부터 함께였던 사이인 걸까?”
“아마 그러지 않겠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한 게 아니라면.”
“음~ 그런데도 부부인 거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라. 여기서 그렇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 돼.”
“음. 그렇구나. 자식은 없는 것 같지?”
“뭐, 있지 말란 법은 없지 않겠냐. 출가했다고 해도 이상할 나이도 아니잖아.”
“응. 그렇네.”
걸음을 멈춘 수지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알딸딸하게 오른 취기 탓인지.
그게 아니면 부축해 주는 이 따뜻한 손길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림 같은 노부부의 행복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뭔가.
굉장히 편안했다.
눈을 감으면, 정말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 * *
들려오는 음악 소리.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바닷바람.
고개를 돌린 용주의 눈에 수지가 들어왔다.
자신의 어깨에 기댄 수지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어젯밤엔 그렇게 악몽에 시달리더니. 지금은 꽤 좋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
조심스레 등받이에 수지를 누인 용주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막간의 시간이 생긴 지금 해둬야 할 일이 있었다.
‘어떤 식으로 굴러간단 거지?’
‘크레아탄의 눈’을 꺼낸 용주는 아이템의 외관을 먼저 살폈다.
딱딱하고 거대한 이 눈은 바닷속에서 마주했던 녀석의 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이걸로 룬검을 강화할 수 있다고?’
룬검의 성능이야 지금까진 아쉬울 건 없었다.
하지만 더 위로 향할 가능성이 있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라도 한 번 볼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다른 문구는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단.
확률적으로 무기의 성능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의 말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그래도 해볼 만한 도박일 테지.’
잠시 고민하던 용주는 크레아탄의 눈을 사용했다.
▷ 제련할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나타난 메시지 아래엔 작은 크기의 정사각형이 있었다.
전혀 룬검이 들어갈 만한 사이즈는 아니었지만, 용주는 룬검을 근처에 가져갔다.
룬검은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아이콘의 형태로 변해 버렸다.
칼날 연마.
룬 벼림.
손상도.
‘이건 또 뭐야?’
눈앞에 나타난 창엔 크게 세 가지 단어가 적혀 있었다.
각 줄은 10개의 빈 보석 아이콘이 있었고, 4칸마다 마디가 나뉘어 있었다.
▷ 각 보석은 한 번에 한 개만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 성공 혹은 실패 시 다음 성공 확률이 변동됩니다.
▷ 4개의 보석이 활성화될 경우 해당란의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 4개 이하의 경우 아무런 효과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 한번 새긴 보석은 다시 새길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런 룰이란 말이지?’
창의 구석엔 확률 같은 게 표시되어 있었다.
처음 기록되어 있는 성공 확률은 55%.
얼핏 보기에 위쪽의 2개 옵션은 많이 붙이면 붙일수록 좋은 옵션들인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세 번째 옵션은 최대한 적게 붙여야 하는 옵션.
총 시도에서 3개 이하로 성공하는 걸 목표로 두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