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사라졌어?’
빠르게 바뀌는 풍경.
파괴된 도심의 모습 속으로 들어온 수지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뾰족한 첨탑에 거대한 언노운 하나가 꿰뚫려 있었다.
“우리 엄마 어디 있어요?”
이윽고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목소리.
“……!”
고개를 돌린 수지의 눈에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부모의 시신을 안고 있는 아이.
유골함을 안고 있는 아이.
팔과 다리를 잃어버린 아이.
아이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지만, 슬픔과 원망에 잠긴 그 눈동자만은 모두가 같았다.
“우리 아빠 왜 안 들어와요? 온다고 한 시간 지났는데.”
“괴물이 나타나면 헌터들이 지켜 준댔어요. 그런데 왜 안 지켜 줬어요?”
“조금만 더 서둘렀으면 살릴 수 있었는데.”
“왜 다른 사람은 살려 주고, 저희 부모님은 죽게 내버려 둔 거예요? 저희 부모님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기괴하게 뒤틀리는 아이들의 목소리.
수지는 고개를 돌렸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살점이 썩어들어간 아이들은, 좀비와 같은 모습이 되어 가고 있었다.
* * *
“!”
번쩍 눈을 뜬 수지가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꿈…?”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수지가 식은땀을 닦아 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너무 생생해서 꿈이란 생각조차 못 했었다.
“괜찮냐?”
수지보다 먼저 일어나 있던 용주가 물었다.
덮고 있던 용주의 코트를 들춰낸 수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악몽을 꾼 모양이야.”
“못 구한 녀석들이 나오는 꿈이었냐?”
“음? 그걸 어떻게….”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주는 지난 밤 물이 차 있던 길을 내려다보았다.
물 때가 바뀌었는지 물은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일단 나가자. 신선한 공기라도 들이켜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다.”
* * *
갈림길 근처까지 내려온 용주가 정지 신호를 보냈다.
앞쪽에서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두목이 신상으로 모이라고 했다고?”
“맞다.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다고 그랬다.”
‘신상이라고?’
얼핏 들리는 대화의 토막들로 추측건대 지금 저길 지나고 있는 건 랫맨일 확률이 높았다.
“여기 있어라. 동태가 어떤지 살짝만 보고 올 테니.”
“나도….”
“아니, 혼자 움직이는 게 나아.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랫맨들이 충분히 멀어지기를 기다린 용주는 갈림길을 돌았다.
어제 봤었던 신상 주변엔 제법 많은 숫자의 랫맨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엔 꼬리가 잘린 녀석이 둘 섞여 있었다.
‘저 녀석이 두목이라는 녀석인가?’
신상이 있는 중앙엔 유독 다른 차림의 랫맨이 있었다.
물고기 비늘을 형상화한 옷을 입은 녀석은 연설을 주도하고 있었다.
“두목. 그래서 등대로는 언제 다시 가냐?!”
“맞다! 우리 꼬리 복수해야 한다! 꼬리 미래에 두고 왔다!”
“서두르면 일을 그르칠 뿐이다. 이미 두고 온 거 오늘 밤까지만 기다려라. 내 말 안 듣고 먼저 움직인 바보들 잘못이다.”
두목이 들고 있던 해머로 지면을 때렸다.
“그런데 두목, 왜 그 등대 파괴하라고 한 거냐?”
“우리가 불러냈던 괴물. 크레아탄. 우리가 지배하려던 녀석에게 우리가 복종한 굴욕은 너희도 다 알고 있을 거다.”
“기억하고말고.”
“크레아탄이 그랬다. 그 등대를 파괴해 주면 우리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왜 하필 그 등대냐?”
“우리가 녀석을 불러낸 장소가 바로 그 아래라고 한다. 등대가 지맥과 수맥을 억누르고 있어 이 섬에 묶인 상태로 불려 나왔다고 한다.”
“그럼 등대 파괴하면, 괴물 떠나는 거냐?”
“그렇다고 했다.”
“그럼 우리 다시 자유냐?”
“그렇게 될 거다. 오늘 밤 등대를 흔적도 없이 철거해 버릴 거니까. 미리 뚫어 놓은 굴을 이용하면,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다.”
환호성을 지르는 랫맨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용주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등대를 파괴하려는 건 저 크레아탄이란 괴물이 시켜서고, 크레아탄이란 괴물은 자기들이 불러내 놓고 역으로 지배당한 존재란 건가.’
솔직히 말하면 황당했다.
자기들이 지배하려고 불러 놓고는, 불러낸 존재에게 지배당한다는 부분부터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중요한 정보들은 손에 넣었다.
습격은 오늘 밤.
녀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 * *
“자, 여기 필요한 재료는 전부 구해 왔다.”
등대로 돌아온 용주가 모아 온 재료를 전부 꺼내 놓았다.
“정확하군요. 이거면 복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동굴이 침수될 거란 이야기는 안 해준 거냐? 자칫 잘못했었다간, 물고기 밥이 됐었을 거다.”
노엘의 손을 가로막은 용주가 물었다.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아…. 제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봅니다. 그런 중요한 일을 까먹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일부러 혹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그렇게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말하긴 애매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당장에 뭘 더 추궁해 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 그런데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다.”
“안 좋은 소식?”
“오늘 밤 랫맨들이 여길 습격해 올 거다. 등명기를 부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등대를 없애 버릴 생각인가 보더군.”
용주의 한마디에 노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습니다. 여긴… 저와 제 아내가 평생을 함께한 장소입니다.”
“그래. 나도 이 등대가 없어지는 건 곤란해. 그래서 녀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한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녀석들은 필히 지하를 이용할 거다. 녀석들이 올 루트를 알면 함정을 파 놓는 건 쉬운 일이지.”
용주가 골렘의 바위 심장을 꺼내 놓았다.
“녀석들을 맞이할 일종의 미궁을 만들어 볼 계획이다. 조금 공포스러운 느낌으로 말이야.”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다른 아이템들을 바라보았다.
구상은 이미 어느 정도 끝나 있었다.
등대 상부로 올라온 노엘은 잠겨 있던 문을 열었다.
지하로 내려간 용주는 미궁이란 걸 만들고 있을 시간이었다.
청소한 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방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등명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엘. 내가 한 일이 잘한 짓인지 모르겠소.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당신이 날 봤다면, 분명 뭐라고 한 소리 했을 테지.”
용주에게 받아온 재료들을 펼친 노엘이 마법진을 펼쳤다.
겹겹이 쌓인 마법진 사이로 재료들은 떠 올랐고, 이내 노엘이 원하는 형태로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가공된 바위의 모양은 흡사 피아노의 흰 건반을 보는 것 같았다.
뚜벅.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놀란 노엘이 급하게 뒤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수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미궁을 만드는 데 당연히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등명기.”
안으로 들어온 수지가 등명기에 다가갔다.
먼지 쌓인 등명기는 좋게 봐도 지금 만든 거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털썩 주저앉은 노엘이 머리를 박았다.
“두 분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두 분께서 가져오신 재료들은 실은 등명기를 만들기 위한 재료가 아니었습니다. 악의는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다시 고칠 수 없다는 생각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노엘에게 다가온 수지는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노엘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건…?”
수지는 노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말투나 억양.
그리고 행동과 표정 같은 걸로 대략 짐작은 해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아내가 좋아하던 악기를 보수할 부품들입니다. 이전에 사용하던 것들이 많이 망가졌기에….”
“음?”
고개를 갸웃하는 수지의 반응에 노엘은 따라오란 신호를 보냈다.
그를 따라 이동한 곳엔 빛바랜 수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수정 근처론 반사된 빛무리가 하늘하늘 떨어졌다.
빛 아래에 선 수지에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여긴….”
한눈에 보이는 바다 지평선.
고개를 돌린 수지는 경사진 바윗길을 바라보았다.
틀림없었다.
여긴.
등명기 위쪽에 있던 공간이었다.
‘그럼 그건 이형 워프 장치 같은 물건이었던 건가? 여기도 그런 게 있나 보네.’
보다 가까운 곳으로 시선을 옮긴 수지는 근처를 살펴보았다.
꽤 넓은 공간이었지만, 존재하는 물건이라고는 딱 두 개뿐이었다.
빛바랜 수정구.
그리고 투박하게 생긴 피아노.
“피아노?”
재료나 크기는 알고 있는 피아노와는 달랐지만, 기본적인 형태는 역시 피아노였다.
건반 중엔 깨진 것들이 있었고, 그랜드 피아노의 뚜껑처럼 생긴 부분은 밑동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생전 아내가 가장 좋아하던 풍경입니다. 여기 앉아 피아노를 치는 걸 참 좋아했었지요.”
빛무리 속에서 나온 노엘이 의자를 빼주었다.
“원하시면, 한번 쳐보셔도 됩니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노엘의 행동에서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폴짝 뛰어오른 수지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오우거에게 맞춰진 피아노는 페달이 닿지 않을 만큼 높았다.
‘쳐보라는 거겠지?’
대충 감으로 흐름을 맞춘 수지는 건반에 손을 올렸다.
바위를 깎아 만든 것 같은 피아노는 보기보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잘 눌렸다.
그런데.
‘소리가….’
도레미 세 개의 건반을 눌러 봤지만 어떤 건반에서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큰 폭풍우가 치던 밤. 엄청난 파도가 등대를 강타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크기의 파도였죠. 그때 망가진 겁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노엘이 피아노를 어루만졌다.
“아내와 함께 듣던 소리를 듣고 싶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죽기 전에 아내에게 들려주려던 그 곡을 연주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두 분께 거짓말을 한 뒤였습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두 분의 선의를 이렇게 이용하다니.”
고개를 숙이는 노엘에게서 가지고 온 부품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피아노… 고치셔야죠.”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수지가 한 번 더 손을 내밀어 주었다.
망가진 피아노.
멀쩡히 있던 예비 등명기.
그리고 피아노 건반처럼 가공되었던 바위 조각.
말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해서든 이걸 고치고 싶어 한다는 걸.
그 이유는 아마….
아내와 함께했던 추억이 여기 있기 때문일 테지.
* * *
“좋아. 시간이 다 됐다. 움직이자!”
두목의 명령이 떨어지자 랫맨들이 일제히 속도를 높였다.
랫맨들의 촛불이 밝힌 빛은 신속하게 굴을 달렸다.
“저 모퉁이에서 돌아야 한다.”
“근처에 가면, 과일 발효시킨 냄새가 난다. 미리 챙겨 두면 끝나고 파티할 수 있다.”
선봉에 선 건 꼬리를 잃어버린 두 녀석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땅굴이었지만, 녀석들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긴가 보다!”
무너진 담벽과 그 안으로 보이는 나무통.
“들어가면, 계획대로 간다. 1조는 1층, 2조는 2층과 3층, 3조는 정상을 확보한다. 적들은 모두 구속해 신병을 확보한다.”
“오~!”
기세를 높인 랫맨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그런데.
랫맨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일자로 된 술창고가 아니었다.
술창고와 같은 모습으로 꾸며진 초입은 또 다른 미로와 이어져 있었다.
“정말 여기가 맞냐?”
“어라?”
“이상하다. 여기 이렇게 생기지 않았었다.”
두 랫맨이 머리를 긁적였다.
“음…. 일단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겠다. 과일 냄새가 나니 제대로 오긴 한 걸 거다.”
랫맨들을 이끈 두목이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좁은 폭으로 이어지던 복도를 지나자 꽤 넓은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직사각형의 석실엔 육망성 모양의 낙서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런 공간은 없었는데, 정말 이상하다.”
“다 막혀 있는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거냐?”
“두목 저기! 뭔가 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한 랫맨이 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죽음은 땅 밑을 기고 있다.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라?”
비석에 적힌 글을 읽은 두목이 폭소를 터뜨렸다.
“바보 아니냐? 이런 걸로 우리가 겁먹을 것 같냐?”
“그래, 맞다.”
“랫맨 용감하다. 땅속은 우리 세상. 그림 우리가 죽음 그 자체란 거다.”
두목의 웃음에 다른 랫맨들 역시 같이 웃고 있었다.
무심결에 뒤로 물러난 랫맨 하나가 육망성을 밟았다.
그 순간.
“캬아~!!”
괴성과 함께 나타난 괴물이 랫맨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