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 * *
파도 소리가 밀려오는 해안가의 작은 선착장.
파도에 다가간 수지는 잠시 바다에 손을 담갔다.
“엄청 조용하네.”
“뭐, 일단은 민가가 있는 섬은 아니니까.”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인천의 팔미도였다.
배를 타고 들어오는 게 일반적인 견학 방법이지만, 두 사람은 그런 중간 과정 없이 섬에 들어왔다.
“그런데 방법이란 게 뭐야? 아직 못 들은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다.”
“응. 시간이란 말이지.”
“그래서 말했잖아. 굳이 안 따라와도 된다고.”
고개를 든 용주가 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녹음이 우거진 숲 정상엔 하얀 등대의 모습이 보였다.
섬마음 등대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아무래도 저곳인 모양이었다.
키 낮은 둔덕 중턱에 위치한 천년의 광장.
관광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공간이었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시관의 불도 꺼져 있었고, 기록 영상 같은 것들도 나오지 않았다.
옛 등대 사무소를 지난 두 사람은 더 높은 곳을 향했다.
길은 상당히 잘 정돈되어 있었기에 이동에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래, 이거.”
산 정상에 위치한 새하얀 등대.
거기 적혀 있는 안내도를 보던 수지가 이야기했다.
등대는 총 2개가 있었는데, 비교적 작고 투박한 등대는 이젠 운영하지 않는 구등대라고 한다.
한국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응?”
고개를 돌린 수지가 순간 의문을 표했다.
분명 모든 것이 맑고 화창했는데, 일대에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안개?”
섬은 육지보다 날씨 변화가 심하단 이야기는 들었었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해도 이건 상식 밖에 현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을 서두른 수지는 용주가 갔던 방향을 따라갔다.
짙은 안개 너머로 보이는 용주의 앞엔 포탈이 하나 열려 있었다.
“혼자 어디 가려고?”
“?!”
놀란 용주가 뒤돌아보았다.
“너… 어떻게….”
“왜?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네.”
수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용주의 입장에선 수지가.
수지의 입장에선 반대로 용주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설마… 이것도 그것 때문인가?’
부정한 개입을 사용한 이후.
수지는 자신이 불러낸 인벤토리 패널을 볼 수 있게 되었었다.
이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역시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안개 네가 만든 거야?”
“…아니.”
“그럼 그 포탈은 네가 만든 거야?”
“아니.”
“이상한 대답. 그럼 이건 누가 만든 거야? 거긴 어디랑 이어져 있는 거고?”
용주는 분명 저 너머로 가려고 했었다.
자신이 연 포탈도 아닌데 그 안으로 가려고 했다니,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하아…. 설명하자면 길다. 아무튼 넌 여기….”
여기 있으라고 말하려던 용주가 순간 망설였다.
그 판단이 과연 맞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미션을 해결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1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최소시간은 미션에서 언급한 3일.
모든 게 멈춘 시간 속에 그녀 혼자 있기엔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여기?”
“아니다. 잠깐 있어 봐.”
용주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웃지 말고 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용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약속할게.”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지금 시간은 멈춰 있다.”
“시간이?”
수지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너도 멈춰 있어야 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 일도 없었어야 정상이었다고.”
“응. 그렇구나. 그럼 지금이라면 하고 싶은 걸 맘대로 할 수 있단 거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그냥~ 이거면 팬텀도 쉽게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니, 유감스럽지만, 그러긴 힘들 거다. 시간이 멈춘 건 내가 이 자리에 있단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니까.”
“응. 그렇구나. 그럼 이건 네 능력인 거야?”
시간을 컨트롤하는 능력.
그런 게 가능하다면 정말 엄청난 능력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이안의 능력.
벡터를 컨트롤 하는 이준의 능력.
S급 헌터들의 능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능력이지 않은가.
“아니.”
“그럼?”
“내가 말한 적 있지? 비밀의 방 사건 이후로 힘이 생겼다고.”
“응. 그랬었지.”
“그때 다 죽어가던 날 살린 녀석이 지금 이 문을 연 장본인이다. 난 녀석이 따라오라는 길을 따라가는 거고.”
“따라가? 왜?”
“녀석이 내 심장을 쥐고 있으니까.”
“…….”
“뭐,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녀석이 그렇게 해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용주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이 안은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이 세계와는 다른 전혀 독립된 세계지.”
“그럼 그 안은 카오스 게이트인 거야?”
“아니. 굳이 비교하자면, 이안이 만들었던 세계들에 더 유사할 거다.”
용주가 게이트 쪽으로 다가갔다.
“들어가면, 일이 끝나기 전까진 나올 수 없을 거다.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는 게 정답일지 용주도 답을 알 순 없었다.
퀘스트 게이트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갔던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수지의 동행은 분명 큰 힘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긍정적인 요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겪어 왔던 위험을 그녀에게도 겪게 하는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계승자가 아닌 자가 퀘스트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혹시나 모를 뭔가가 있지는 않을지.
배신자들의 왕은 또 어떻게 나올지.
그런 것들을 예측할 수 없었다.
“같이 갈래. 약속했어. 잘 감시하겠다고.”
“…그러냐?”
용주는 수지와 나란히 섰다.
먼저 들어가는 건 먼저 들어가는 대로.
나중에 들어가는 건 또 나중에 들어가는 대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으로선 동시에 들어가는 게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일 테지.
* * *
게이트 밖으로 나온 수지는 본능적으로 눈을 가렸다.
쏟아지는 햇볕에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두 눈을 깜빡인 수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도 바다.
저기도 바다.
보이는 거라곤 온통 바다뿐이었다.
“정말 카오스 게이트랑은 다르네. 그런데 여기 그냥 무인도 같아 보이는데.”
확실히 여긴 카오스 게이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세계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바다도, 파도도, 나무도, 모래도.
전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건 좀 더 가보면 알 거다. 딱히 닮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고.”
주변을 살피던 용주의 눈에 등대 하나가 들어왔다.
등대는 건너편에 보이는 다른 섬에 있었다.
저기가 아마 퀘스트에서 말한 섬마음 등대겠지.
“몸 상태는 좀 어떠냐? 어디 불편하다거나 특이한 점이 있다든가 하는 건?”
“음. 딱히 없는 것 같아.”
“그래? 다행이네.”
“응. 그런데 이제부터 뭐 해야 해? 따라오라는 길 같은 거 내 눈엔 안 보이는데.”
수지의 물음에 용주는 퀘스트 창을 보여 주었다.
▷ 섬마음 등대가 다시 빛을 발하도록 하십시오.
▷ 다음 중 하나의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 퀘스트는 실패로 간주됩니다.
-등대지기의 사망
-등대의 파괴
-3일이 지나도 등대가 꺼져 있는 경우.
창에 적힌 내용을 눈으로 읽은 수지는 아까 용주가 발견했던 등대를 바라보았다.
“이런 게 있구나.”
“별로 안 놀라는 것 같네.”
“응. 저번에 비슷한 것도 봤었으니까.”
나뭇가지를 주운 수지가 등대를 그려 보였다.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돼?”
“넌 걱정할 거 없어. 책임을 지는 건 나니까.”
“응. 그럼 더 열심히 해야겠네. 절대 실패하지 않도록.”
실패의 세 가지 조건을 적은 수지가 커다란 동그라미를 쳤다.
“이걸 다 하면, 차원 압력에도 더 버틸 수 있는 거야?”
“그래. 그럴 거다.”
“이래서 3일이라고 말한 거구나?”
“아니. 아까 말했다시피 이곳의 시간은 현실이랑 달라. 내가 말한 시간은 현실에서의 3일.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시간은 현실에선 1초도 되지 않아.”
“음. 그렇구나.”
“받아들이는 게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이상한가?”
“이상하지. 뭐, 그 점이 너답긴 하지만.”
눈웃음을 지어 보인 수지는 모래사장과 이어진 조그마한 숲으로 다가갔다.
“뭐 하려고?”
용주가 물었다.
수지는 이 나무 저 나무를 두드려 보고 있었다.
“건너가려면 뗏목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만들어 본 적 있어?”
“뭐야? 그런 거였어?”
“왜? 이상해?”
“아니. 이상할 건 없지. 그렇지만 그런 거라면 됐어. 다른 생각이 있으니.”
모래사장을 지난 용주는 바다의 경계면에 섰다.
룬검을 뽑아 드는 용주.
룬문자가 빛을 발하기를 기다린 용주는 단번에 검을 내리꽂았다.
힘차게 날아오른 왕의 보좌관은 얼음길을 열었다.
“응. 이런 방법도 있구나. 바다가 얼다니, 굉장하네.”
얼음길에 올라선 수지가 깡충깡충 뛰었다.
얼마나 단단한지 테스트를 해보던 그녀는 순간 미끄러지며, 균형을 잃었다.
“그 정도론 안 깨질 거니까. 안심해도 돼.”
수지를 붙잡은 용주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응. 그런데 중간부턴 아직 바다인데. 저기서부턴 혹시 헤엄쳐서 가는 거야?”
“손에 물 한 방울 안 튀게 해줄 테니까 걱정 마.”
“응.”
작은 무인도를 출발한 두 사람은 바다를 가로질렀다.
두 번째 비상을 시작한 보좌관은 남은 길을 열었고, 길은 등대가 있는 섬까지 이어졌다.
“그 검도 혹시 여기서 구한 거야?”
용주의 검이 특이하단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지금 사용하는 검도 그렇고.
헌터 시험 때 사용했던 황금 생물을 만드는 검도 그렇고.
용주를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언노운의 표피 하나도 제대로 뚫지 못하는 보급형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지.”
“나도 쓸 수 있는 거야?”
“글쎄? 한번 시험해 볼래?”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이전에 사용했던 첨예검을 꺼냈다.
전에 주원이 룬검을 가져다줬을 때.
주원은 검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실제로 손에 쥐지도 못하고 질질 끌고 왔었고.
수지는 과연 어떨까 싶었다.
“……!”
첨예검을 잡은 수지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놓쳐 버린 첨예검은 얼음을 따라 미끄러지다 이내 바다로 빠져 버렸다.
“아!”
수지는 곧장 바다로 뛰어들려 했다.
용주는 그런 그녀를 거칠게 붙들었다.
“됐다. 이젠 안 쓰는 물건이니.”
“그치만….”
“애초에 여기서 건넨 내 실수였다. 신경 쓰지 마.”
끝내 미안해하는 수지를 앞장세운 용주는 바다를 건넜다.
두 사람이 지난 바다 아래론 무언가의 거대한 실루엣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아까 봤던 등대랑은 많이 다르네.”
섬의 가장 높은 곳.
등대는 가파른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등대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방치되었단 느낌이 들었다.
여기저기 훼손되어 있었고, 딱히 보수를 했다는 느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등대지기란 사람은 저 안에 있는 걸까?”
“글쎄. 들어가 보면 알겠지.”
주변을 살핀 용주는 등대로 다가갔다.
등대도 그랬지만 계단이나 문 역시도 보통 생각하는 것보단 확실히 크단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걸 만든 자들이 인간보단 조금 더 큰 체격을 가지고 있단 방증일 것이다.
손잡이를 잡은 용주는 수지에게 거기서 기다리란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등대 안쪽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의자나 식탁 같은 가구도 보였고, 벽 한편엔 우비 같은 것도 걸려 있었다.
다만, 가구들의 크기 역시도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컸다.
3m.
이 정도 의자를 사용할 거면 적어도 신장이 그 정도는 되지 않아야 할까 싶었다.
“실례합니다.”
한발 늦게 용주를 뒤따라온 수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인국에 온 기분이네. 다 엄청 커.”
“우리가 찾는 등대지기란 녀석이 그 정도 사이즈는 될 거란 뜻일 거다.”
“그럼 거인?”
“기본적으론 그렇겠지. 인간이랑 비슷할 거란 보장은 없지만.”
“인간이랑 다르면, 어떻게 생긴 거야?”
“개나 늑대처럼 생긴 녀석도 있었고, 도마뱀처럼 생긴 녀석도 있었고, 조각상처럼 생긴 녀석도 있었고, 다양했지.”
“늑대에, 도마뱀에, 조각상. 언노운처럼 엄청 다양한가 보네. 그럼 이번엔 도깨비 같은 걸 만나지 않을까?”
“도깨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용주의 물음에 수지가 벽면을 가리켰다.
우비와 함께 걸려 있는 모자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머리에 뿔이 났단 거 아닐까? 도깨비처럼.”
“뭐, 일리는 있네.”
걸음을 옮긴 용주는 나선형 계단에 발을 올렸다.
일단은 등명기의 상태를 확인해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