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 * *
“오빠~ 오빠~?”
“어? 어어….”
놀란 용주가 수저를 떨어뜨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직 잠이라도 덜 깬 거야?
평소 오빠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눈동자도 평소보다 탁하고, 피부도 푸석푸석, 꼭 밤새고 난 후 내 모습 같은데. 잠 못 잤어?”
“아…. 좀 생각할 게 있어가지고.”
용주가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대체 뭐길래 우리 오빠 잠도 못 자게 한 대?”
“개인적인 일이야. 뭐 안 좋은 일은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안심하란 듯 이야기한 용주가 다시 수저를 들었다.
서윤에게 고백을 받은 직후 자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그렇게 고백받아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음~ 그래?”
“정말로 별일 아니야. 그보다 선물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용주가 급하게 주제를 돌렸다.
“응. 이따 수업 끝나고 살짝 갖다 드리려고.”
“수업 끝나고?”
“아, 집에 들렀다가 나갈 거야. 초콜릿 다 녹아 버릴 테니까.”
“어디 있는진 아는 거고?”
“서프라이즈라 말 안 했어. 그래도 대충 어디 계실진 알 것 같아.”
“그래?”
“응. 아, 참! 그러고 보니 오빠한테 그거 안 물어봤네. 어제 그거 누구한테 준 거야? 수지 언니? 은정 언니? 여자한테 준 건 확실한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야 그렇게 아기자기한 디저트였는걸. 분명 여자야. 아니, 100% 여자야.”
“네 선물도 내 거랑 다르지 않잖아?”
“아!!”
순간 예은의 젓가락이 멈췄다.
“그럼 남자한테 준 거야?”
똘망똘망한 예은의 눈망울.
뭔가 의미심장한 시선에 용주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밥이나 먹어. 늦겠다.”
“에~? 왜 대답 안 해주는 건데? 숨길 것도 아니잖아.”
“…여자 맞으니까. 얼른 먹어.”
“헤헤, 쑥스러워서 그랬구나? 그치? 뭐야, 뭐야. 오빠 혹시 그 사람한테 관심 있어? 누군데?”
예은이 짓궂게 미소 지었다.
오빠의 연애 상대.
거기 대해서 처음 생각해 본 건 수지가 집에 왔을 때였다.
생각해 보면, 오빠한테 그동안 여자친구가 없었다는 게 더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꽤 잘생긴 편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키도 크고, 성격도 좋고, 요리도 잘하고, 책임감도 있고.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면, 동기들한테나 선배들한테나 인기 좀 많았을 것 같은데.
아니지?
아빠랑 엄마도 일을 하면서 만난 사이셨으니까 오빠한테도 그동안 관심 주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딱히 오빠가 관심을 주지 않았을 뿐.
그럼 정말로 오빠가 상대방에게 관심 있다는 이야기이지 않겠는가?
“그런 거 아니래도.”
용주는 그 이상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서윤은 지금 당장 답을 줄 필요는 없다고 그랬다.
아니, 지금은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현재가 어떻든 자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면서.
그때 봤던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절대 시선을 피하지 않겠다는 그 표정.
자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도 안 됐다.
다음번에 녀석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 * *
택시에서 내린 용주는 철문 앞에 섰다.
수녀원의 마당은 고요했고, 철문은 잠겨 있었다.
용주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관문 하나가 열렸다.
“손님이 있을 거란 이야기는 못 들은 것 같은데요. 아! 이 말도 벌써 몇 번째인가.”
돌길을 따라 나온 나은이 철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세요. 마침 한산한 시간대니까.”
나은의 안내를 받은 용주는 지난번과 같은 방으로 들어왔다.
“다치셨던 팔다리는 좀 어떠신가요?”
“문제없다.”
“그거 불행 중 다행이네요. 현장에 남아 있던 출혈량이 하도 엄청나서 십중팔구 어디 하나 잘렸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네가 그런 말을 하면 굉장히 이질적이게 들린다만.”
“그런가요? 굉장히 평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요.”
“…….”
“그래서 어쩐 일이신가요? 아직 아무런 이야기도 못 들은 것 같은데.”
“일이 정리되자마자 바로 내려온 거냐?”
잠시 뜸을 들인 용주가 물었다.
“네. 목적도 달성했고. 거기서 이래저래 귀찮아지는 건 원치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고 하기엔 이미 귀찮은 일에 말려든 것 같던데.”
“음…. 후임자와 만난 일을 말하는 거겠죠, 그건?”
“그래. 그 세 녀석을 구해 준 건 감사하게 생각한다만, 제법 곤란해진 거 아니냐?”
“솔직히 저도 조금 놀랐어요. 설마 거기서 후임을 만날 줄이야.”
나은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도 아마 괜찮을 거예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지?”
“제가 딱히 그쪽 일에 관여한 건 아니잖아요? 제 후임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고요.”
“뭐, 그러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여기서 그 두 가지를 나누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지만, 용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순간,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용주도 수호에게 도움을 받았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그렇게 쉽게 빠져나올 수도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
용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제가 걱정돼서 와 보신 건가요? 그런 거면 꽤 감동인걸요.”
“감동을 주지 못해 미안하게 됐군.”
“음, 역시 동제 씨랑은 다르시네요. 그럼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셔서 먼 걸음을 하신 걸까요?”
용주는 그녀의 두 눈을 빤히 응시했다.
나은에게 반드시 물어야 할 게 있었다.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이야기?”
“그래. 서울에 나타났던 S급 카오스 게이트. 기억하고 있겠지?”
“기억하고말고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갑자기 왜…?”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최근 사건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제는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그때 네가 거기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만 있기 힘들더라고요. 그게 열리면 어떻게 될지… 보였으니까.”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네가 기억하는 모든 것을.”
“그건 앞으로 열릴지도 모르는 다음 게이트를 위한 건가요?”
“…비슷할 거다.”
“알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도움을 드려야겠죠.”
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기억하는 그날은 지구의 종말이 온 것 같았어요. 하늘은 핏빛이었고, 바람조차 불지 않았죠. 거리엔 아무도 없었어요. 어떤 아이가 잃어버린 강아지 인형 하나가 외롭게 앉아 있을 뿐이었죠.”
“…….”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 헌터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제 게이트 진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고요. 들어가면 분명 죽을 거라고.”
나은이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토벌팀은 저까지 5명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이안 씨, 이준 씨, 서아 씨. 그리고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었어요. 빨간 할아버지라고 부르던 게 기억이 나네요.”
“…….”
“마지막으로 게이트를 닫은 분은 그 할아버지였어요. 마나를 모방하는 걸로는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스킬들을 사용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그렇다고 용주 씨랑 같은 색깔이었던 건 아니었지만요. 굳이 따지면, 그 세 사람 중 한 명이랑 비슷했던 것 같아요.”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스킬?’
순간 주원이 떠올랐다.
월영식이 거기 딱 부합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거기서 만났던 언노운의 종류는? 추상적인 표현도 괜찮다.”
“아… 음,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이상하네. 분명 조금 전까진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황한 나은이 곤란함을 표했다.
“그러냐? 뭐, 됐다.”
나은이 기억하는 그날의 이야기.
역시 이 녀석도 다른 두 녀석과 다르지 않았다.
두 분에 대한 기억은 빠져 있었고.
언노운과 게이트 보스에 관한 건 기억하지 못했으며.
게이트의 마지막도 다른 녀석들의 기억과 달랐다.
* * *
“아! 용주 형!”
용주를 발견한 주원이 손을 흔들었다.
시간은 어느덧 어두운 저녁이 되어 있었다.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하게 됐다.”
“에이~ 미안하긴요. 전 용주 형이 먼저 연락해 줘서 좋은걸요.”
주원이 메뉴판을 펼쳤다.
“일단 주문부터 해요. 제 추천은 김치순대국밥이랑 순대내장전골.”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시켜라. 난 똑같은 걸로.”
“음~ 그럼 전골로 먹어요! 이모!!”
주문을 마친 주원이 깍두기를 아삭거렸다.
“컨디션은 좀 어떠냐? 부상이 꽤 깊었다고 들었는데.”
“아~ 완전 멀쩡해졌어요. 완전 퍼펙트 주원이라니깐요.”
자신감을 표하던 주원의 얼굴에 순간 씁쓸함이 스쳤다.
“뭐… 퍼펙트 주원이래 봐야 별로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요.”
“A급 헌터들도 쉽게 결판을 내지 못했던 상대들이다. 넌 충분히 잘했어.”
“…정말 그런 걸까요?”
“그래.”
“용주 형 이야기 들으니까 그래도 좀 힘이 되네요. 감사해요.”
주원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혹시 그거 때문에 만나자고 하신 거예요? 낙담하고 있을까 봐?”
“겸사겸사지.”
“겸사겸사?”
“그래. 묻고 싶은 게 있다.”
서빙과 함께 나온 전골이 이야기의 흐름을 끊었다.
용주는 직원이 가기를 기다렸다.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지 말씀드릴게요. 뭔데요?”
“월영식은 딱 한 사람에게만 전해지는 일인 전승이라고 했지?”
“아…. 네.”
주원의 텐션이 뚝 떨어졌다.
용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너 말고 그걸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아빠밖에 안 계실 거예요.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요.”
“참고로 아버지에게 월영식을 전수해 준 사람은?”
“할아버지라고 알고 있어요.”
“…그래?”
“저 용주 형이 뭐 물어보려고 하는지 알아요. 그거 팬텀에 대한 이야기죠?”
이야기의 흐름을 듣던 주원이 먼저 치고 들어갔다.
“팬텀?”
“네. 그 박형만 아저씨. 아니지. 이제 길드장님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분이 그러셨거든요. 팬텀 중에 월영식을 사용하는 자가 있는 것 같다고요.”
‘팬텀 중에 이 녀석이랑 똑같은 기술을 사용하는 녀석이? 그렇다는 건….’
“알려 주신 곳에 가봤었어요. 여기저기 남아 있는 흔적들을 살펴봤었고요. 적어도 제 눈엔 그렇게 보였어요. 그게 월영식이 만든 게 맞다고.”
주원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잠깐 집에 갔었어요. 그분이 보셨다는 특징이나 인상착의에 대해서 여쭤 보려고요.”
안대을 하고, 사슬을 찬 노인.
검이 아닌 사슬로 검술을 사용하는 사람.
적어도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그러셨었다.
월영식을 사용하는 사람이 우리 둘 외에 더 있을 리가 없다고.
‘사슬에 안대. 월영식을 사용한 건 그럼 라스란 녀석이란 뜻이군.’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용주는 전골을 한 국자 펐다.
앞 접시를 받은 주원은 감사를 표했다.
“그래. 그런 일들이 있었군.”
“에? 어라? 용주 형, 다 알고 계셨던 거 아니었어요?”
“그렇게 디테일한 부분들까진 모르고 있었다. 애초에 라스란 녀석에 대해 물으려고 왔던 것도 아니었고.”
“그럼….”
“내가 널 부른 건 ‘주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질문은 다르지만, 어쩌면 같은 걸 묻는 질문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팬텀은 죽은 헌터들을 일으킨 것.
라스란 자가 정말 월영식을 사용했다면, 가능성이 가장 큰 건 역시….
“주일이라면… 저희 돌아가신 할아버지 성함인데.”
“할아버지께선 당연히 헌터셨겠지?”
“네? 아, 네. 은퇴하신 지는 되게 오래되셨었다고 들었었어요.”
“혹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 수 있을까?”
“아…. 편안하게 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주무시다 가셔서 임종은 못 지켜드렸지만요.”
‘집에서? 카오스 게이트가 아니라?’
의문이 들었다.
러스트와 마찬가라면, 당연히 카오스 게이트에서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런 건 어찌 됐든 상관없을지도.’
러스트.
아니, 한송이 헌터의 죽음은 언노운에 의한 걸로 조작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자연사 역시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형 워프 장치가 있으니, 위치나 시간 같은 건 얼마든 속일 수 있었겠지.
‘잠깐만. 주무시는 것처럼 이라고?’
다른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 부분은 조금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주일을 살해한 게 정말 이준이라면, S급 헌터와 S급 헌터의 싸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S급 헌터가 기습에 반격 한 번 못 해보고 목숨을 잃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이상한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이안처럼 차원을 이동하면 또 모를까.
그렇게 강한 자들이 목숨을 걸고 붙었는데, 주무시는 것처럼?
뭔가 이상했다.
뭔가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