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 * *
“야! 이용주! 여기!”
회의장으로 돌아온 용주를 발견한 서윤이 손을 흔들었다.
회의장 내부엔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헌터도 있었지만, 헌터가 아닌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용주가 아는 얼굴이라고 해봤자, 형만이랑 시우 정도.
금화나 수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은?”
“예나는 집사랑 잠깐 집에 가 있다고 오기 힘들 거라고 그랬고, 금화 아저씨는 현장 정리 돕고 있다면서 나중에 무슨 이야기 나왔는지만 알려 달래. 이주원 그 녀석은 뭐 하는지 연락이 안 되더라고.”
“음…. 그래? 안수지 녀석은?”
“몰라. 따로 연락 안 해봤어.”
“그거라면 내가 말해 줄게요.”
“응?”
낯선 여성의 목소리에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여성은 나이를 가늠하는 게 쉽지 않았다.
느낌상 동년배는 아닌 것 같긴 한데….
포니테일을 한 걸 보니 또 또래 같기도 하고.
“옆에 앉아도 될까요?”
“그래, 뭐….”
서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쪽이랑은 그래도 구면인데, 이쪽이랑은 초면인 것 같네요.”
“이용주랑 아는 사이라고?”
“신서아. 우리나라에 하나뿐이라는 S급 의료 헌터다.”
용주가 무미건조하게 이야기했다.
용주는 그녀와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의료 헌터? 게다가 S급이라고?!”
“수지, 아무래도 조금 무리한 모양이더라고요. 쉬지도 않고, 잠도 안 자고, 의료 헌터라고 능력이 무한한 것도 아닌데…. 그냥 자게 놔뒀어요. 휴식이 가장 좋은 보약일 테니까.”
“아…. 그래? 그런데 이 녀석이랑은 어떻게….”
“팬텀 사태가 있던 날 거기서 만났거든요. 팔다리가 다 뜯겨 너덜거리는 아주 끔찍한 몰골이였죠.”
“팔다리가 다 뜯겨…?!”
화들짝 놀란 서윤의 시선이 용주를 향했다.
“그렇게 놀라실 건 없어요. 딱히 제가 재생시키거나 해드린 건 아니니까. 무슨 재주를 부리신 건진 몰라도 잘 붙여 놓으셨더라고요. 조금 간당간당해 보이긴 했지만요.”
“…….”
어딘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 서윤이 용주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런데 웬 마스크? 알레르기라도 있는 거야?
“알레르기 같은 건 없어요. 대신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게 이 안에 있죠.”
“괴로운 거?”
서윤이 의문을 표했다.
S급 의료 헌터라면 부상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게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쪽은….”
“서윤이라고 불러.”
“서윤 씨는 아직 어리니까 걱정할 거 없겠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여자한텐 아주 큰 상처가 생긴답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의사나 의료 헌터도 그걸 막을 순 없죠.”
“상처? 어리다고?”
“상처의 이름은 통상 이렇게 부르죠. 주름이라고.”
싱긋 웃어 보인 서아가 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시간을 확인한 이안은 마이크를 잡았다.
“정신없는 와중에 다들 모여 줘서 고마워. 오늘 자리를 마련한 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야.”
이안이 장내를 둘러보았다.
“길드 본부가 날아간 건 다들 알고 있을 거야. 안타깝게 희생된 사람들과 유가족들에겐 정말 면목이 없어.”
짧은 묵념을 보낸 이안이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서는 게 쉽진 않았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고. 하지만 모두가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번 사건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일 테니까.”
이안이 앞에 놓았던 대본을 치웠다.
적어온 건 여기까지였다.
“이번 카오스 게이트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야. 누군가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거지.”
“누군가 인위적으로?”
“그게 누굽니까?”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이안의 이야기에 여러 꼬리표가 붙었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 있는 건 팬텀이라는 조직이야. 그리고 팬텀의 보스가 바로… 이준이었지.”
이안의 이야기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준이라면….”
“길드의….”
“류은(瀏誾)의 헌터라고 불리던…?”
“믿기 힘든 거 다 알아. 믿고 싶지도 않을 거고. 하지만 사실이야. 그리고 길드를 날려 버린 것도 바로 녀석이지.”
“말도 안 돼….”
“길드가 통째로 날아간 원인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었지. 경찰도 국과수도 제대로 된 답은 아직까지 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어. 특별한 폭발도 없었고, 화약 반응이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그건 이준이 그런 거야. 태스크 포스도 분명 같은 답을 내릴 거야.”
“그럴 수가.”
“게이트는 닫혔다고 그랬죠?”
“그럼 이준 헌터도….”
쏟아지는 질문에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유감스럽게도 이준도 팬텀도 아직 건재해. 난 준이를 막지 못했어.”
“무의 헌터가….”
“류은의 헌터에게 졌다고?”
“이번 게이트는 닫았지만, 같은 일은 분명 또 일어날 거야. 아니, 이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혼란이 찾아오겠지.”
“…….”
“이걸 정말 말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 혼란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역시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이안의 시선이 서아를 향했다.
“길드는 처음부터 다시 일어서야 해. 카오스 게이트가 있는 한 길드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니까. 하지만 길드를 혼자 일으키는 건 불가능해 세상 그 누구라 할지라도.”
주먹을 움켜쥔 이안이 주변의 풍경을 바꾸었다.
물결치며 퍼져 나간 폐허 속엔 위령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위령비엔….
희생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길드를 일으키려면 구심점이 필요해. 현명하고, 경험 많고, 포용력 있는…. 그러면서 신뢰받고, 절대 정의롭지 못한 곳에 눈을 돌리지 않을 그런 사람이.”
“그런 거라면 역시 이안 헌터님이….”
“아니면 서아 님?”
많은 헌터들의 시선이 서아에게 쏠렸다.
S급 의료 헌터.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그녀만큼 거기 적합한 인물이 없어 보였다.
“유감스럽게도 난 적임자가 아니야. 서아라면 충분히 적임자라고 생각하지만, 극구 사양하더라고. 자신은 그런 그릇이 못 된다면서.”
“이안 헌터도, 서아 헌터도 아니라면 대체 누가….”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 딱 한 명 떠오르더라고.”
“그게 누군데? 시간 끌지 말고 빨랑빨랑 말해.”
턱을 괸 시우가 이어폰을 톡톡 두드렸다.
“난 적임자를 우리 박형만 헌터라고 생각해.”
“박형만?”
“샐러맨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 형만에게 쏠렸다.
형만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이야기, 금시초문이었다.
“그럴 그릇이 못 된다고 사양한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이야길 하고 나한테 뭔가 기대하는 건 아니겠….”
“아니. 우리 박형만 헌터밖에 없다고 확신해.”
“…….”
“무너진 걸 바로 세우는 건, 원래 있던 걸 보수하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 너만큼 올곧고, 우직한 사람이 중심을 잡아줘야만 해.”
“…무리다. 나는 그럴 그릇이 못 돼.”
“네가 못한다면, 아무도 못 한다는 거야.”
“…….”
너무도 단호한 이안의 목소리.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에 형만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 굳이 헌터들을 이 자리에 모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샐러맨더 아저씨라면 난 무조건 찬성이야.”
모두의 침묵을 깬 시우가 한 손을 들었다.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구심점이 필요한 거라며. 더 말이 필요해?”
“나도. 찬성이야. 뭐, 먼저 거절한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미안하지만 말이야.”
서아가 시우의 말을 이어받았다.
“이준은 우리에게 많은 걸 앗아 갔어. 소중한 사람, 소중한 추억, 소중한 믿음…. 빼앗긴 건 되찾을 수 없지만, 아직 남아 있는 걸 지킬 수는 있어. 지금 필요한 건 의사가 아니야. 유능한 백의종군이지.”
“…….”
“사람이 좀 무뚝뚝하긴 해도, 그게 오히려 굉장히 믿음직스럽긴 하지.”
“그래, 뭐. 녀석이라면….”
“믿고 등을 맡겨도 되긴 해.”
“경험도 많잖아. 내부 사정이나, 돌아가는 판도 누구보다 잘 알 거고.”
“헌터들한테도, 서포터들한테도 평판이 한결같긴 하지.”
“여기 없는 다른 녀석들도 불만 없지 않을까?”
서아의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던 이안은 다시 형만을 바라보았다.
수락할 거냐?
아니면 수락당할 거냐?
그의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비겁한 녀석.”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형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알았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 짐, 내가 한번 져보지.”
형만의 결심에 여기저기서 응원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단…!”
조건을 단 형만이 잠시 숨을 골랐다.
“상호 감시하고 보완할 자리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한다.”
“음…. 그래?”
“객관적인 눈으로 나와 내 주변을 감시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뭣하면 날 막아설 수 있는 사람.”
왼손을 든 형만이 이안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이안. 빠져나갈 생각 하지 마라. 거부권은 없으니.”
받은 걸 그대로 돌려준 형만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게 한 방 먹은 이안은 가볍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 * *
“그래서 왜 따로 보자고 한 걸까나?”
출입구 쪽을 바라본 서윤이 물었다.
용주, 형만, 시우, 서윤, 이안, 서아.
모두가 돌아간 회의장엔.
용주를 포함해 신설동역에 있던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용기가 부족했었다고 말해 둘게.”
“용기?”
이안의 대답에 서윤이 갸웃했다.
“그래. 용기. 모두에게 말할 용기가 없었거든. 그에 따른 혼란을 대비할 용기도.”
“그게 무슨 소리래? 도통 이해를 못 하겠는데?”
“…이걸 좀 봐줄래?”
작은 한숨을 삼킨 이안이 윗도리를 벗었다.
“가, 갑자기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란 서윤이 두 눈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이안의 가슴엔 동그란 타투 같은 게 하나 그려져 있었다.
“그게 뭔데? 이안 아저씨, 그런 문신 없지 않았어?”
시우가 의문을 표했다.
“저건 일종의 주박이야. 상대방의 힘을 봉인하는 주박.”
팔짱을 낀 서아가 대답했다.
“주박? 그런 게 왜 이안 아저씨한테.”
“이준한테 당한 거다.”
이안이 주박에 손을 올렸다.
“그렇지만 아까 분명 다른 차원 불러오지 않았어?”
서윤이 물었다.
아까 봤던 위령비는 분명 허상이 아니었다.
“100%를 다 묶어 두진 못한 모양이더라고. 그렇지만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얼마 되지 않아. 고작해야 10% 많이 쳐봐야 20% 정도겠지.”
“20%?”
“그래.”
“그거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이준이란 녀석이 또 게이트를 열 거라며. 그땐 어떻게 해?”
팬텀의 다른 녀석들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단 생각이 있었다.
이번처럼 아무런 대비도 되지 않은 상황도 아닐 테고.
오더도 지금과는 다를 테니까.
하지만 가장 믿을 만한 점은 이쪽엔 S급 헌터가 둘이란 것이었다.
1 : 1이 아닌 2 : 1의 상황이라면, 지금과는 결과가 많이 다를 테니까.
“아줌마가 어떻게 못 하는 거야?”
시우가 물었다.
“아줌마는 누가 아줌마란 거야?”
서아가 시우를 확 쥐어박았다.
“나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저거 기본적으로 다친 게 아니야.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럼 차라리 잘라내고 새로 만드는 건 어때? 아줌마라면 할 수 있잖아.”
“주박은 눈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심장까지 이어져 있어. 네 말대로 하면 어떻게 될지 알겠지?”
“…….”
시우가 어깨를 들썩였다.
신의 권능을 가졌다고 불리는 S급 의료 헌터라도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순 없었다.
“그런데 왜 그걸 우리한테 말한 거냐? 왜 하필 우리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용주가 물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야. 하나는 여기 있는 전원 팬텀과 붙어본 경험이 있다는 거. 아…. 뭐, 서아는 좀 예외긴 하지만 봐달라고. 이 멤버라면 전적으로 믿을 수 있으니까.”
“그럼 다른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움직일 사람들일 테니까. 그래. 설령 S급 게이트가 열리고, 이준을 상대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
“카오스 게이트를 다시 열기 전에 준이를 찾아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할 거야. 하지만 지금까지 못 한 걸 할 수 있단 보장이 없어. 노력은 해보겠지만 준이가 그렇게 허술하지도 않을 테고. 지금 할 수 있는 건 게이트가 열렸을 때를 대비하는 거라고 생각해.”
“대비?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서윤이 물었다.
“이준은 날 대비하기 위해 글러트니란 녀석을 준비해 놨었어. 그럼 이번엔 내가 비밀 병기 하나를 만들어 두면 되는 거야.”
“비밀 병기?”
“그래. 비밀 병기.”
이안의 시선이 용주에게 향했다.
지금껏 이준이 상대해 본 적 없는 타입의 적.
거기에 적합한 건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