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쾅!
잠잠했던 해수면에서 터져 나오는 수증기 폭발.
180도 뒤집힌 세상의 바다는 하늘이 되어 있었다.
폭발을 타고 유적 안으로 떨어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칼날이 부딪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힘은 일대의 유적을 한낱 돌덩이로 만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무대는 한 장소에 그치지 않았다.
공간 전체가 하나의 투기장.
둘의 속도와 움직임은 땅과 하늘을 가리지 않았다.
“S급 헌터라고 다 같은 건 아니라고. 수백의 세계와 수천의 질서가 있어도. 내 앞에선 무력해.”
거대한 석상 위로 날아간 이준이 가볍게 발을 디뎠다.
“내가 바로 질서 그 자체니까.”
폭발적인 속도를 제공해 준 석상의 상반신은.
터져 흩뿌려졌다.
운동량 벡터 조작.
평범한 동작이 만드는 힘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왼쪽으로 파고든 이안이 칼날을 휘둘렀다.
신기루 같은 잔해가 벗겨진 칼날은 이준의 코트를 찢어 놓았다.
‘호오?’
계속되는 공방 속에 같은 현상은 몇 번이고 일어났다.
“부딪치는 순간 세계 위에 세계를 덧씌우는 방식인 건가? 그런 식으로 계산을 힘들게 하겠단 심산인 모양이지?”
이안이기에 가능한 방법.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이준은 모래를 퍼 올렸다.
날아가는 자갈과 모래알은 흡사 산탄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셈이지.”
공간의 비틀림을 따라 자갈과 모래가 다른 차원으로 날아갔다.
날아간 자갈과 모래는.
이준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시도는 좋았어.”
자갈과 모래의 운동량을 0으로 만든 이준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늪으로 변한 땅이 발목을 붙잡고 있었고, 하늘에 거꾸로 선 이안이 바다를 밟고 서 있었다.
한 방울 일렁임을 남긴 이안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힘과 거리.
속도와 중력.
모든 계산을 마친 이준은 그의 공격을 막아섰다.
그런데.
“……!”
길게 찢어진 상처를 따라 피가 흩뿌려졌다.
이안의 검은 분명 오른쪽에서 치고 들어왔다.
그런데 상처는 왼쪽 어깨에서부터 대각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공격에도 이준은 정확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공격을 막을 순 없었다.
찢긴 왼팔엔 화상과 동상 자국이 동시에 생겨났다.
“그래. 그런 거였나?”
몰아치는 이안의 공격에 이준이 씨익 웃어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바닥을 늪으로 만든 것도, 하늘에 거꾸로 서 있던 것도 다 내 오감을 속이기 위한 수였던 모양이지? 제법이야, 안.”
왼쪽 옆구리로 치고 들어오는 이안의 올려치기.
당연히 해야 할 반응을 포기한 이준은 칼날을 오른쪽으로 당겼다.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 두 칼날은 서로 부딪치며 차원을 흔들었다.
“같은 듯 보이는 다른 세계. 내 다리를 붙잡았던 건 내 벡터가 정상적으로 계산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위함이었던 거지? 사실 그건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뀐 거였는데 말이야.”
이어지는 이안의 공격에 이준은 정확히 반응했다.
좌우가 반전된 또 다른 질서가 있는 세계.
확실히 까다로운 규칙이었다.
전투에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실력이 있으면 있을수록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하니 말이다.
하지만 까다롭다고 해서 상대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작동하는 원리만 알면, 그에 따라 다시 계산하면 그만이었다.
“즉흥적인 것치곤 꽤 여러 가지 수를 생각해 뒀네. 누가 보면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알고 있었던 줄 알겠어.”
“그럴 리가 없잖아.”
“실은 무의식적으로 상상하고 있던 거 아니야? 100%를 동원해 날뛰고 싶었던 거 아니냐고?”
바람을 조작한 이준이 칼날처럼 바람을 뿌렸다.
바람에 찢긴 차원을 타고 나온 두 거인의 손은 이준을 가운데 두고 부딪쳤다.
“게이트가 열리면 신세계가 펼쳐질 거야. 언제든 너의 100%를 펼칠 수 있을 거라고.”
한 손으로 거인의 주먹을 받아넘긴 이준이 손을 내밀었다.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웃기지 마.”
부서진 거인의 손을 뛰어넘은 이안이 이준을 내리찍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충고만 해줄게.”
이준의 칼날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허상이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지면에 생겨나는 칼자국은 가히 치명적.
힘과 속도를 극한까지 조작한 이준의 고속검은 이안의 검을 흩트려놓았다.
“숨겨둔 비수가 있었으면, 목을 땄어야지, 친구.”
이안의 쇄골과 목 얼굴에 이르기까지.
거의 동시에 피가 흩뿌려졌다.
“…….”
이준에게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 이안은 움켜쥐고 있던 왼손을 펼쳤다.
그의 손을 떠나는 작은 구체.
강착 원반을 두르고 있는 구체는 초소형 블랙홀을 보는 것 같았다.
이준은 저 검은 구체를 조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저 구체는 마치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 *
보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보이는 거라고는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어둠을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게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손을 아무리 가까이 가져가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중력 역시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입을 통해서도 아무런 말도 나가지 않았다.
‘소리를 전달할 물질이 없는 건가?’
상황을 타개하려던 이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안…. 이런 걸 숨겨 두고 있었던 거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무중력 공간엔 어떤 물질도 들어 있지 않았다.
물론, 산소도.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나가야 해.’
힘을 집중한 이준은 이 공간 자체를 깨부수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이곳은 말 그대로 무의 공간.
벡터를 계산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던 그때.
“……!”
모든 걸 덮던 어둠이 갑작스럽게 깨져 나갔다.
밝은 빛 속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저 아래 펼쳐진 세계가 보였다.
광활하게 펼쳐진 나선형 은하.
그곳에 비정상적인 모습의 도심이 겹쳐 있었다.
누군가의 피와 살로 가득 찬 도심.
그 중심엔 고통스러운 듯 주저앉아 있는 이안이 있었다.
“아아~ 정말 아까웠어, 안. 조금만 더 했으면 정말 날 쓰러뜨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타들어 가는 기도의 통증을 삼켜낸 이준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안에게선 간헐적으로 무언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액체도 기체도 아닌 물질엔 전혀 다른 여러 세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헝클어진 질서가 말썽을 부리는 모양이지?”
자세를 낮춘 이준은 망설임 없이 검을 쑤셔 넣었다.
가슴 정중앙을 관통당한 이안의 입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긴 무너진 질서를 그 단시간에 이 정도 추스른 것도 대단하지. 상대가 나만 아니었다면, 널 여기까지 몰아세우는 사람은 없었을 거야. 네가 약해졌다고 해서 다른 녀석들이 강해지는 건 아니니까.”
이안의 어깨를 붙잡은 이준이 더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 알려줄까, 안?”
물음을 던진 이준이 잠시 호흡을 골랐다.
“네가 상대했던 글러트니는 말이야, 다른 녀석들이랑 달라. 녀석의 안엔 끊임없이 생명을 갈구하는 언노운이 들어 있거든. 내 역작이지. 사료를 만들어 주기 전까진 꽤 애먹었지만 말이야.”
“죽일 거면…. 혈류를 조작하는 것만으로도 끝낼 수 있을 텐데?”
이안이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녀석의 칼날은 심장을 빗겨 갔다.
분명 일부러 그런 거였다.
“그럴 거였으면, 한 번에 끝냈을 거야.”
“왜? 이참에 나도 걸어 다니는 시체로 만들 생각인가 보지?”
“아니.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할 생각은 없어.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대신….”
상처를 타고 일종의 주박이 그려졌다.
금이 간 이안의 세계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네 힘엔 족쇄를 걸어 둘 거야.”
칼날을 뽑아낸 이준은 이안의 은시계를 떼어 갔다.
“함께할 생각이 생기면 언제든 찾아와. 함께할 생각이 없다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네가 날 방해하면, 나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를 악문 이안은 자신의 세계를 구겼다.
무너진 승강장으로 돌아온 이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었다.
이준은 세계 속에 있지 않았다.
“무의 헌터는 여기서 끝난 거야.”
은시계를 들어 보인 이준이 포탈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회수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지.”
걸음을 멈춘 이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익숙한 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자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서아….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준이 검을 집어넣었다.
“필요한 만큼은 가지고 있으니 당장 급할 건 없겠지.”
그리드의 체티가 부서진 시점에서 보관에 대한 장애가 생겼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어디 도망갈 녀석이 아니란 건 벌써 여러 차례 입증했고.
일이 벌어지면 굳이 찾지 않아도 제 발로 올 게 분명했다.
만약 그사이에 녀석의 힘이 더 강해진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더 좋은 재료는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게 분명하니까.
“잘 있어, 안. 서아한테 안부 전해 주고.”
가볍게 손을 흔든 이준이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바닥엔 주인 잃은 안경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젠장, 이준. 무슨 짓을.”
상처를 짚은 이안이 머리를 박았다.
몸에 남은 상처보다 마음에 생긴 상처가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
“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대체 언제부터….”
막지 못했다.
막아야만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네가 송이를 죽였다고? 그럼 다른 녀석들은? 팬텀의 다른 녀석들도 네가 다 그렇게 만든 거야?”
글러트니는 언노운을 기반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 한 녀석만.
그렇다는 건 나머지에게는 인간의 영혼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최소 6명.
거기에 윤현이나 도준 같은 케이스가 더 있다고 가정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게 누군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만들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던 거냐고?”
유희.
이준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때 녀석이 보인 얼굴은.
이안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럼 다른 헌터들은 왜 죽인 거야? 팬텀이 빼앗아 간 목숨은 뭘 위했던 거냐고?”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무력감이 밀려왔다.
이준을 그렇게 가까이서 오래 봐왔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그가 그 많은 일을 계획하고, 엇나가는 동안 자신은 그를 막기는커녕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뭐가 무의 헌터야? 뭐가 S급 헌터냐고!”
주먹을 움켜쥔 이안이 바닥을 내려쳤다.
무의 헌터란 이명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헌터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안?”
그때.
이안을 발간한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파란 나비 리본으로 묶은 포니테일.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는 그녀가 바로 이준이 말했던 신서아였다.
“이안! 어떻게 된 거야?”
이안과 눈높이를 맞춘 그녀가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흰 티셔츠엔 금세 피가 튀었다.
“이거 영 못 보일 꼴을 보였네. 한심하게시리.”
이안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해외에 나가 있는다고 들었었는데?”
“그런 이야기나 할 때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버럭 소리를 지른 서아는 이안의 윗도리를 들쳤다.
가슴을 관통한 상처는 너무 위험한 곳에 있었다.
심장을 빗겨 간 게 우연이기가 더 힘든 위치였다.
이건 분명 일부러 피해 간 거였다.
게다가 상처 부위를 타고 이상한 문양 같은 게 자리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문양이었다.
“누가 이런 거야? 네가 아무한테나 당했을 리는 없고.”
짐작 가는 상황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도 않고.
“설마… 정말 이준이 그런 거야?”
이안의 침묵에 그녀가 참았던 물음을 던졌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
그리고 질문을 받는 사람.
두 사람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