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슬로스? 슬로스라면 아까 식물과 곤충을 사용하던 그분인 것 같은데, 그분이라면 이미 도망갔는걸요.”
엔비와 시선을 맞췄던 나은이 고개를 돌렸다.
저 아래 용주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쪽을 향해 길게 이어진 이 엄청난 양의 출혈이 의미하는 건….
분명 하나겠지.
“의료 헌터가 근처에 있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네요.”
선로로 내려가려는 나은에게 순식간에 대검이 날아들었다.
무형검을 휘두른 나은은 형만의 공격을 정확히 가드해 냈다.
“무의미한 소모전이에요. 전 적이 아니라고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거친 불길이 나은을 몰아붙였다.
입꼬리를 올린 엔비가 시야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중간에 흠칫하긴 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렇겐 안 돼요.”
불길에 휩싸인 나은의 검이 형만의 것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
순간 피어오른 불의 장벽에 엔비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건 형만이 일으킨 불길이 아니었다.
‘이 녀석….’
피어오른 불길에 형만이 잠시 공격을 멈추었다.
그녀가 정말 팬텀이라면, 조금 전 그 행동엔 확실히 의문이 들었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다리를 붙인 용주가 플랫폼을 기어 올라왔다.
오른손과 오른발에만 의지한 용주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형만을 지나친 나은은 용주에게 다가갔다.
출혈량이 워낙 많아서 어디 하나 절단이라도 된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렇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별일 없었나 보군.”
“지금 그런 말이나 하실 때예요?”
나은이 용주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초록빛이 감도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서서히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그때.
쿠릉!
쿠르르릉!!!
공간 전체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하게 손상됐던 몇 개의 대들보가 무너지며 천장이 내려앉았고,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더미와 시체들이 공간을 둘로 갈라 놓았다.
붕괴를 직감한 형만은 서둘러 태영을 둘러업었다.
이대로 있다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야기는 나중에. 일단 여기서 나가지.”
고개를 끄덕인 나은이 용주의 무릎과 목을 받쳐 들었다.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한 동작만으로 허벅지와 어깨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 애송이는 그 정도로 안 죽는다. 바퀴벌레보다 더 끈질긴 놈이니.”
놀란 그녀에게 한마디를 던진 형만은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폭발을 동력 삼아 단번에 뛰어오른 형만은 아직 붕괴가 진행되지 않은 지반에 착지했다.
나은은 그가 그린 동선을 그대로 따라갔다.
“엔비. 보내줄 거야?”
손가락을 쪽쪽 빤 글러트니가 물었다.
멈추라고 말한 그녀의 명령 이후로 글러트니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죽어 버리면 뭣도 아니게 되어 버리니까.”
“용서는?”
“내가 잘 말해 줄게. 보스도 분명 용서해 주실 거야.”
“정말?”
“그럼~ 그러니까 우리도 이쯤에서 슬슬 나가자. 햄버거 패티가 되기 전에 말이야.”
“햄버거 패티~? 맛있겠다.”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올려다보던 엔비가 포탈을 열었다.
어둠 속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한기가 몰아치는 얼음의 세계.
하얀 설원에 선 이안이 이준을 노려보았다.
그를 중심으로 세계는 심하게 뒤틀려 있었는데, 마치 그곳만 로딩이 되지 않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방금 한 이야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머리가 그 정도로 안 돌아가진 않을 텐데, 안.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정말 네가 팬텀의 보스인 거야?”
“왜? 믿기 힘든가 보지?”
“당연하지. 그걸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안이 손을 움켜쥐었다.
이준의 반응은 침착함을 넘어서 평온했다.
“…네가 송이를 죽였다고?”
“정확히 말하면 난 거들어 준 것뿐이야. 유용한 재료와 유용한 도구를 얻는 일석이조의 수였지. 서로 윈윈하는 아주 좋은 거래였다고.”
“유용한 재료…. 그럼 아까 들었던 그 이야기도 사실인 거야? 팬텀 중 한 사람이 송이였다는 것 말이야.”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지. 그릇에 담긴 건 분명 한송이였지만, 그릇 자체는 새로 빚은 거였으니.”
“그릇?”
“헌터들의 힘을 추출하는 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냐, 지난번에 분명 그렇게 물었었지?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고.”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이준이 한 가지 물건을 꺼내 보였다.
윤현에게서 뜯어낸 결합된 이형 리액터였다.
“이형 리액터. 언노운에게서 나온 이형 결정체를 가공해 내가 직접 만든 물건이지. 아, 물론 다른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건 작은 파편 조각 정도야. 덕분에… 가끔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고.”
“이형 리액터?”
“그래. 녀석을 사용하면 헌터들의 정수를 추출할 수 있어. 물론, 언노운에게도 반응하지. 이걸로 추출해 낸 정수를 이형 결정체로 빚은 몸에 넣는 거야. 딱딱했던 몸은 정수와 공명하며 점차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가. 생전 그대로의 모습일수록 온전한 힘에 가까워지지.”
“그런 게 정말 가능하다고…?”
“리액터의 재료로 사용된 이형 결정체는 최소 SS급으로 추정되는 물건이었어. 리액터에 그런 힘이 담긴 건 순전히 원석의 힘이었지.”
“SS급?”
“그래. 너라면 당연히 의문이 들겠지. SS급의 이형 결정체.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니까.”
이준의 손을 떠난 리액터가 저절로 떠올랐다.
검은 화염을 머금고 있는 리액터의 중심부엔 붉은 결정이 박혀 있었다.
“그럼 이건 어디서 났을까? 실은 나도 몰라. 그냥 어느 순간 가지고 있었거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당연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여기선 말이 돼, 안. 왜냐면 그게 사실이니까.”
느긋하게 뒷짐을 진 이준이 리액터 주위를 거닐었다.
“부자연스럽게 사라진 기억이 있다는 걸 인지했지만, 크게 상관하진 않았어. 그것보단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했지.”
걸음을 멈춘 이준이 떨어지는 눈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결정했어. 이걸로 내가 진정 원하던 걸 실현하겠다고.”
“원하던 거?”
“그래. 그럼 여기서 문제. 내가 원하던 건 뭐일 것 같아, 안? 날 가장 오래, 그리고 가까이서 봐 왔던 너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
이안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힘, 돈, 명예, 권력, 가족, 사랑….
그에게 결핍되어 있는 게 떠오르지 않았다.
“타임 오버. 역시 너무 어려운 문제였던 모양이네.”
손목시계를 보던 이준이 소매를 내렸다.
“난 평화가 싫어, 안. 아주 치가 떨릴 만큼 말이야.”
평소랑 같은 얼굴.
평소랑 같은 표정.
평소랑 같은 말투로 이야기한 이준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이안이 말을 더듬었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은 어제랑 똑같아. 내일은 오늘이랑 똑같고,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겠지. 난 이 평화에 구역질이 나.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고.”
이준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힘, 돈, 명예, 권력, 그런 걸 원하는 건 결핍된 녀석들이야. 진정 모든 걸 가진 자는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난 유희를 원해. 기존 질서론 통제되지 않는 큰 혼란 말이야.”
“…….”
“S급 게이트가 열리는 건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대형 이벤트야. 남들 다 즐기는 유희를 우리만 즐기지 못한다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물음을 던진 이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희란 건 말이야. 즐기고 싶을 때 즐겨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거야. 게다가 SS급 이형 결정체가 있다는 건 우리가 지금까지 상대해 보지 못한 강한 녀석이 있다는 이야기잖아? 아니, 정확히는 상대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더 가깝겠지.”
이준이 안경을 벗었다.
이준의 광기 어린 옅은 미소는 이안에게 섬뜩함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난 알고 싶어. 느끼고 싶다고. 그 혼란을, 파괴와 희열을!”
“……!”
서리 바람을 뚫고 떨어진 얼음 말뚝들이 이준의 주변에 떨어졌다.
말뚝들의 크기는 2m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기억의 공백이 왜 생겼는가. 거기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봤어. 그동안 어떤 혼란이 있고, 어떤 희열을 느꼈든 모두 리셋당해서야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결과를 도출해 냈지. 만약 기억의 공백이 언노운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죽이지 않으면 되는 거야. 사육하며 즐기는 거지.”
순간 이형 리액터에 금이 가며 깨졌다.
하지만 그건 앞에서 보이는 착각일 뿐이었다.
실제로 부서진 건 리액터 주변의 차원.
리액터 본체는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
“게이트의 통제권은 나한테 있어. 여는 것도 닫는 것도, 닫지 않는 것도 내 마음대로지. 한 번 연 게이트가 다음번에도 열린단 보장은 없어. 그러니 첫 게이트는 최대한 오래 열어 둘 생각이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말이야.”
손을 내민 이준이 리액터를 회수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원하는 건 새로운 질서로 통제되는 혼란이니까. 어제와 오늘은 다를 거야. 오늘과 내일은 또 다를 거고. 왜냐면 내가 바로 새로운 질서일 테니까.”
“…진심인가 보구나.”
이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물론이지.”
“그래? 그럼….”
순식간에 이준 앞에 나타난 이안이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널 그냥 둘 수야 없지.”
날아가는 이준의 뒤로 빙산이 치솟았다.
거리를 좁힌 이안은 한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거미줄처럼 뻗쳐 나가는 새하얀 균열.
빙산을 관통한 이안을 기다리는 건 수천의 얼음 돌기였다.
벡터를 조작한 이준은 급작스럽게 멈춰 섰다.
조작된 힘에 그대로 노출된 얼음 돌기들은 차원과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설원의 차원이 깨지며 뜨거운 사막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준의 멱살을 낚아챈 이안은 그대로 그를 내던졌다.
또 번 차원이 깨져 나가며 나타난 건 끓어오르는 마그마 지대.
왼손을 높이 치켜든 이안은 손을 떨구었다.
추락하는 거대한 달.
화산의 해일을 일으키며 깨져 버린 차원에서 두 사람의 힘이 평행선을 그렸다.
그때.
구름을 가르며 또 하나의 달이 달 위로 떨어졌다.
차원은 두 사람을 고대수의 숲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글러트니가 난동을 치는 바람에 질서가 아직 엉망일 텐데.”
하늘을 밟고 선 이준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곳의 중력은 지구 중력과는 달랐다.
하지만 이준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력이 다르면 벡터를 다시 계산하면 그만이니까.
“괜찮다 아니다 할 문제가 아니니까.”
이안의 부름에 각기 다른 다섯 마리의 용들이 날아올랐다.
다섯 용들은 각기 자신들의 용군단을 이끌고 있었다.
“반드시 막아 주겠어. 친구니까.”
이준을 포위한 푸른 용과 붉은 용 군단이 일제히 화염을 토해 냈다.
브레스는 이준을 덮치지 못하고, 물처럼 주변을 흐를 뿐이었다.
“친구면 나랑 같이한다는 선택지도 있잖아. 안 그래?”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를 중심으로 흐르던 물결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수많은 용들이 불길 속에 스러졌다.
“그런 선택지는 없어, 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말도 안 꺼냈던 거고.”
이준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세 무리의 용 군단.
지면에서 솟구친 모래의 사슬이 순식간에 이준을 구속했다.
모래 사이에서 피어난 꽃잎들은 머금고 있던 수면과 마비 가스를 내뱉었다.
불길을 휘감은 검은 용들은 곧장 이준에게로 돌진했다.
“그럼 나도 전력으로 널 깨부숴야겠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이준을 휘어 감고 있던 구속이 순식간에 깨졌다.
떨어지는 사슬들을 조작한 이준은 모든 사슬을 직각으로 세웠다.
그리고.
날아오던 검은 용들의 벡터를 역방향으로 돌렸다.
그러자.
콰지직…!
목이 부러진 용들이 낙엽처럼 쏟아졌다.
운이 좋은 녀석들은 그대로 땅에 떨어졌지만, 그렇지 않은 녀석들은 사슬의 잔해에 꿰뚫렸다.
불과 몇 초 만에 만들어진 용들의 무덤.
용들의 죽음을 지켜보던 이안은 차원을 구겼다.
하나의 세상인 것처럼 보이던 고대수의 숲은 이안의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종이 뭉치가 되어 있었다.
손에 힘을 준 이안은 세계를 힘껏 구겼다.
그 순간.
이안이 딛고 있던 바닥이 깨지며 다른 세계가 나타났다.
이준은 물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널 상대하면서 내가 아무런 준비도 안 했으려고? 너 다음으로 여길 잘 아는 건 나인데.”
하늘 위에서 떨어진 이안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착지했다.
물은 고작해야 발목 높이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준비됐어, 안? 망가진 질서의 순환에 휩쓸릴 준비.”
씨익 웃어 보이는 이준의 뒤로 거대한 산이 나타났다.
산은 점점 더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저건….”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똑같은 산이 뒤쪽에서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이 아니었다.
저건….
파도였다.
쿠구구구……!!!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밀려온 파도는 두 사람을 덮쳤다.
해일 위론 또 다른 해일이 쏟아졌고, 그 위론 또 다른 해일이 포개어졌다.
연못보다도 수심이 얕았던 곳은 어느새 대양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