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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43화 (243/357)

243화

“멋진 추리 잘 들었습니다. 스스로를 지켰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네요.”

이준이 안경테를 올려 썼다.

“네 맞습니다. 전 자신을 지켰을 뿐이죠. 왜냐면 그 이상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제가 하는 일에 제가 다리를 걸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준이 일으킨 힘의 파장이 주변에 있던 모든 걸 날려 버렸다.

찢겨 나간 글러트니는 액체처럼 흘렀고, 엔비와 형만 역시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갔다.

그의 힘에 자리를 지킨 건 이안뿐이었다.

“그런데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린 거 아닙니까? 전 당신이 이것보단 똑똑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

“당신은 지금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절 몰아세우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건 틀렸습니다.”

소매를 살짝 걷은 이준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큰 계획엔 그만한 변수들이 산재해 있는 법이죠. 전 그런 변수들을 통제하는 대신 개개인에게 자율권을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위험을 감수하며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그건 제 계획이 이미 최종장이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저은 이준이 글러트니를 짓누르던 벡터를 걷어 냈다.

몸을 복구한 글러트니는 괴물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정신없이 폭주하던 그는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었다.

“박형만 헌터, 이용주 헌터, 한태영 헌터,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안수지 헌터에게까지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군요. 당신들이 그 미지의 공간을 발견해 준 덕분에 제 계획에 활로가 뚫렸습니다. 같은 공간을 발견하는 데엔 실패했지만, 열쇠를 가져다준 건 역시 당신들이었죠.”

가볍게 발을 구른 이준이 순식간에 용주의 앞에 도착했다.

“제가 이 자리에 온 건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한 가지를 대신 처리하기 위함입니다. 부하의 실책을 책임지는 건 리더가 해야 할 일이죠.”

순식간의 용주의 머리를 붙잡은 이준은 그대로 용주를 찍어눌렀다.

두개골을 강타한 충격에 용주는 순간 의식을 놓칠 뻔했다.

선로 쪽으로 날아간 태영은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카…악!”

날카로운 꼬리를 휘두른 용주는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순간 온몸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력이 용주를 덮쳐 왔다.

용주가 딛고 있던 플랫폼이 아래로 꺼졌고, 치켜세웠던 꼬리가 용주의 몸을 꿰뚫었다.

용주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붉은 아지랑이는 낮게 내리깔리고 있었다.

“카…아악…!”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압력 속에서도 용주는 일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런데.

“!”

순간,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엄청난 통증이 대뇌를 관통했다.

기우뚱하고 기운 용주는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간신히 고개를 돌린 용주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뜯겨 나가고 없었다.

손만이 아니었다.

왼쪽 다리에도 감각이 없었다.

“카… 카악…!”

정신을 집중한 용주는 꼬리로 왼쪽의 무게중심을 잡아 보려 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통증이 용주를 덮쳤다.

조금 전 느꼈던 통증과는 달랐다.

방금 그게 외부로부터 기인한 통증이라면 이건 내부로부터 기인한 통증.

둑이 무너지듯 통증은 순식간에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단 것 정돈 용주도 느낄 수 있었다.

용주의 전신을 뒤덮던 광폭화 상태는 증발하듯 사라져 갔다.

“슬슬 한계이신 모양이군요. 그리드가 알면 참 좋아하겠습니다.”

순간, 용주의 아래에 공간의 균열이 생겼다.

“뭐, 그건 그거고, 일단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정제된 결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원석은 소중하거든요.”

포탈 안으로 사라져 버린 용주.

포탈을 열었던 이준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방금 그건.

자신이 연 균열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준. 잠깐 같이 가줘야겠어.”

순식간에 몰아치는 한기.

일대를 전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은 차원은 빠르게 사라졌다.

“미안하지만, 여기 좀 부탁할게. 난 친구랑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같은 차원을 연 이안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플랫폼에 열린 작은 균열에선 용주가 툭 떨어졌다.

“자~ 그럼. 부탁한다는 말을 방해해보도록 할까요? 원래 그러라고 있는 말이잖아요.”

엔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검을 움켜쥔 형만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몸으로 더 해보실 생각이신가요?”

“너희들의 목적이 이 애송이라면, 더더욱 줄 수 없지.”

형만이 이를 악물었다.

신경이 망가졌는지 그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부자연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형만 씨, 우리 사이에 이러지 말자고요. 러스트를 보내준 건 바로 저라고요.”

“…….”

“음.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단 얼굴이시네요. 그렇지만 저기 저 상태를 좀 보시라고요.”

엔비가 용주를 가리켰다.

용주는 날아간 자신의 팔을 향해 꾸역꾸역 기어가고 있었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놀랍기도 한 광경이었다.

인간이 저런 상태로 정신을 붙잡고 있을 수 있다는 부분이 말이다.

“쇼크사는 피한 모양이지만, 과다출혈은 현재 진행형.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지 않나요?”

왼손을 보인 엔비가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의 손에 깃든 초록빛은 그녀가 의료 헌터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저희 쪽도 용주 씨가 죽는 건 바라지 않아요. 순순히 넘겨 주시는 게 서로를 위해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엔비의 시선이 용주를 따라 움직였다.

자기 팔을 집은 용주는 잘린….

아니, 으깨져 절단된 자신의 팔을 어깨에 가져가고 있었다.

“정신력 하나는 인정해 드릴 수밖에 없네요. 두 사람 전부요. 하지만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살고 싶으시다면 순순히….”

이야기를 이어 가던 엔비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분명 잘려 나갔던 팔이 붙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특별한 뭔가를 한 것 같지도 않았고, 의료 헌터의 힘에 의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절단면의 봉합은 상당히 조잡했다.

외상은 여전했고, 말 그대로 뼈와 최소한의 신경만 붙은 정도로 보였다.

팔의 움직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다리를 향해 기어가는 용주는 여전히 오른손에 의지해 포복을 하고 있었다.

“이거 놀라운데요. 정말로 과다출혈로 죽는 일은 없겠어요.”

글러트니와 나란히 선 엔비가 자세를 낮췄다.

글러트니는 아직까지도 덜덜 떨고 있었다.

“글러트니, 보스가 원하는 걸 가져오면, 다 용서해 주실 거야.”

“용서해 줘? 정말?”

“그럼. 보스가 얼마나 자상하신데.”

“글러트니 마음대로 나온 것도?”

“그럼. 다 용서해 주실 거야. 덤으로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거고.”

“먹을 거?”

“그럼~ 가서….”

대화가 한창이던 두 사람 사이에 폭발이 일었다.

불의 장벽으로 용주를 갈라 놓은 형만은 가지고 있던 이형 워프 장치를 던졌다.

결정은 정확히 절단된 용주의 다리 옆에 떨어졌다.

‘팔이 말을 안 들어.’

아무리 나아가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전투 속행’으로 붙인 팔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멀쩡하게 붙어 있는 신체도 지금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데, 간신히 붙여 놓은 곳이 멀쩡히 움직일 리가 없지 않은가.

찢겨 나간 다리를 붙잡은 용주는 올라오는 구역감을 삼켜 냈다.

형만이 던진 이형 워프 장치.

그건 아마 혼자라도 여길 나가라는 소리일 것이다.

지금 상태로 둘을 상대하는 건 무리일 거라고 판단한 거겠지.

‘혼자 나갈까 보냐.’

상처 부위에 허벅지를 가져간 용주는 잘린 부위가 붙길 기다렸다.

콰앙!!

불의 장벽 너머에선 계속해서 폭발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빨리…. 빨리…!’

희미하지만 다리의 감각이 느껴졌다.

용주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어…?!’

순간, 꼬꾸라진 머리가 땅에 부딪혔다.

깨진 이마에선 피가 흘렀고, 콧등에서도 고통이 밀려왔다.

왼발의 감각이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뭐가 어떻게….’

정수리를 바닥에 박은 용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붙었던 왼발이 다시 절단되어 있었다.

둘 중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붙는 데에 필요한 시간이 부족했거나.

붙은 후에 후속 조치가 너무 미흡했거나.

어느 쪽이든 당장 해야 할 일엔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다리를 붙여야 했다.

‘움직여….’

오른손을 움켜쥔 용주는 아득바득 기었다.

‘움직이라고.’

다리를 향해 손을 뻗은 용주의 눈에선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두근!

터질 것 같던 심장이 순간적으로 고요해졌다.

‘이건….’

언젠가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시련의 방에서 또 다른 자신과 상대하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무너져 내린 천장의 파편들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은 그 아래에 깔려 사라졌고, 마지막에 보이던 손은 힘없이 축 늘어졌다.

두근…두근….

느려졌던 심장박동이 다시 빠르게 뛰어왔다.

분명 조금 전 떨어졌던 천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게 그때 일어났던 것과 같은 거라면….’

그때.

자신은 녀석에게 공격받아 눈을 잃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현실이 되었다.

만약 지금 이것 역시도 그것과 같은 선상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움직여야 했다.

당장.

쿠르르릉!!!

“!”

갑작스럽게 시작된 붕괴에 형만이 곧장 방향을 틀었다.

무너져 내린 천장은 용주가 있던 일대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글러트니, 멈춰!”

엔비가 급하게 글러트니를 불러 세웠다.

“오…. 안 돼.”

외마디 탄식을 머금은 엔비가 형만의 뒤를 쫓았다.

“…….”

붕괴 현장으로 달려온 형만은 용주의 기운에 집중했다.

희미하긴 하지만 녀석의 기운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용주는.

이 아래 있지 않았다.

잔해를 뛰어넘은 형만은 길게 이어진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길게 뻗은 핏자국은 선로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애송이 녀석.’

용주의 모습을 확인한 형만이 숨을 골랐다.

무사하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어찌 됐든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위쪽 상황이 대충 정리됐다 싶어 내려와 봤는데, 이거 상황이 완전 난장판이네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낯선 여성의 목소리.

고개를 든 형만은 붕괴 현장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흩날리는 금발의 머리와 눈동자 없는 흰자위.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난 저자를 형만은 알고 있었다.

“눈?”

나은의 얼굴을 확인한 형만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경계했다.

왜냐면 그가 아는 한 그녀는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러스트의 정체는 송이였다.

그렇다면 저기 있는 나은 역시도 팬텀의 일원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상황은 정말 최악이었다.

“절 경계하시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괜찮아요. 전 당신의 적이 아니니까.”

잔해를 밟은 나은이 보드를 타듯 미끄러져 내려왔다.

한 걸음 물러난 형만은 선로와 바짝 붙었다.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슬로스~ 어서 와. 늦었네? 또 어디서 낮잠이라도 자고 있던 거야?”

형만의 눈치를 살피던 엔비가 능글맞게 이야기했다.

지금 상황이 100% 이해가 된 건 아니지만, 상황과 대사로 눈치껏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눈’이라 부를 만한 건 역시 태스크 포스.

저자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게 그 생각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그리드의 이야기대로면, 현 태스크 포스의 눈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성이었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하나.

저기 있는 사람은 죽었다고 알려진 선대 눈이란 유추가 가능했다.

형만이 그녀를 경계하는 건 그녀가 TF인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단 그녀가 러스트와 마찬가지로 되살아난 자일 거라 생각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슬로스의 이름을 고른 건 그가 형만과의 접점이 가장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여기서 형만이 눈을 공격해 준다면, 용주를 회수하는 게 한결 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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