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아파! 아파아파!!”
용주에게 찢긴 글러트니가 울부짖었다.
“플레임 세츄레이션!”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작렬하는 형만의 스킬.
혜성처럼 쏟아진 화염은 글러트니의 몸을 불태웠다.
“뜨거워! 배고파!”
글러트니를 향한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잘려 나갔던 꼬리를 재생시킨 용주는 바짝 당긴 꼬리를 깨물었다.
마찰에서 이어진 대회전 베기.
정확하게 적중한 공격은 글러트니에게 깊고 긴 상처를 만들어 냈다.
“애송이!”
불사조들을 일으킨 형만이 용주를 불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이 하고 있는 말은 명확했다.
그는 지금.
저 관을 처리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카각!”
교차하는 두 사람.
글러트니의 양 옆구리에 동시에 상처를 낸 두 사람은 빠르게 멀어졌다.
‘한태영 녀석부터 꺼내야 해. 부수는 건 그다음.’
관과 가까워질수록 차원 압력이 몸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저 중심부는 다른 곳보다 차원 압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끼익~!
조개껍데기의 틈처럼 살며시 열린 관뚜껑 사이로 수많은 손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수히 쏟아지는 손길들 사이를 뚫고 달리던 용주는 정확한 타이밍에 점멸을 사용했다.
공중에 떠 있는 관뚜껑을 찍어 누르는 용주.
그 순간 용주가 느낀 차원 압력의 힘은.
시련의 방에서 차원의 경계를 넘었을 때 느꼈던 것의 하위 호환 같은 느낌이었다.
‘내놔.’
관뚜껑을 쥐어뜯은 용주는 안에 있던 태영을 끌어냈다.
태영을 감싼 손들은 그를 놓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용주는 그 모든 걸 힘으로 뜯어냈다.
광폭화 상태의 용주를 짚은 손들은 바짝 메말라 버렸다.
‘됐어.’
왼손으로 태영을 감싼 용주는 그대로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둘로 갈라진 꼬리는 원을 그렸고, 그리드의 관을 세로로 잘라 버렸다.
“칵…!”
지면에 착지한 용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오스 게이트가….
소멸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부턴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보고 싶은데, 혹시 더 준비해 둔 카드라도 있는지?”
엔비와 마주 보고 있던 이안이 물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플랫폼은 다른 공간에 일부 잠식되어 있었는데, 여러 세계가 이리저리 뒤섞인 정돈되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풍경들의 공통점은 딱 하나.
누군가의 피와 살로 붉게 물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저 녀석의 목숨이 몇 개인진 몰라도, 어차피 시간 벌기용이었잖아? 분명 어썸한 뭔가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희 보스란 자가 거기까진 말 안 해주던가?”
“유감스럽게도 보스의 계획이랑 지금 상황이 꽤 다르거든요.”
“원래대로라면 날 더 오래 붙잡아뒀어야 했나 보지?”
“뭐. 그것도 있고, 다른 것들도 있고 그래요.”
프라이드의 타깃 확보 실패.
용주의 도착.
그리드의 패배.
성덕과 러스트의 만남.
글러트니의 폭주.
자신이 러스트를 보내준 것 말고도 이상적인 계획에서 틀어진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장 핵심이 되었던 계획은 이미 다 이루었으니까.
“아쉽게도 여기까지인가 보네요.”
가슴골에 손을 넣은 엔비가 무언가를 던졌다.
글러트니의 발밑에 떨어진 건 이형 워프 장치.
바닥에 열린 포탈은 글러트니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쉬워할 거 없어. 하나가 끝난다는 건 다른 하나가 시작된다는 뜻이니까.”
이형 워프 장치가 만든 포탈이 순간 뒤틀리며 소멸했다.
“어디 느긋하게 데이트나 즐겨 보자고. 우리 할 이야기가 아주 많잖아. 안 그래?”
“어머~ 그런 스윗한 목소리를 내실 거면 좀 더 일찍 작업을 걸어 주시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어울려드렸을지도 모르는데.”
엔비가 또 하나의 이형 워프 장치를 던졌다.
물론, 결과는 마찬가지.
이안의 차원은 워프 장치를 그대로 삼켜 버렸다.
“미안하지만, 거부권은 없다고.”
“음~ 그런가요? 그 시점에서 이미 데이트는 아닌 것 같은걸요.”
“어쩔 수 없다고. 다 너희가 자초한 일이니까.”
뺨에 튄 피를 닦아 낸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그때.
“!”
두 사람 사이에 갑작스럽게 공간의 균열이 일었다.
이쪽에서 열린 포탈이 아니었다.
이건 어딘가로부터 이어진 출구였다.
이안은 균열을 닫지 않았다.
닫지 않은 것도 맞고, 닫지 못한 것도 맞았다.
포탈을 타고 전해지는 힘은 이안이 알고 있는 자의 것이었다.
“카오스 게이트는 무사히 닫은 모양이네.”
포탈을 나선 바람머리의 사내가 안경을 올려 썼다.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헌터 길드의 수장 이준이었다.
“준?”
이준과 마주한 이안이 의문을 표했다.
물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일어난 일은 유례가 없던 초유의 사태였고,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이준 역시도 헌터. 그것도 이름을 날리던 S급 헌터였으니까.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내가 여기 온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이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만과 엔비.
거기에 용주와 글러트니까지 봤음에도 그는 전혀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너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이야기 얼마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 이번엔 어떤 의미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안?”
“너라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네가 맡은 자리에 어울리는, 책임감 있는 행동이니까.”
“그래. 확실히 그게 더 나다운 행동이긴 하지. 인정할게.”
이준이 어깨를 들썩인 그때.
“박형만…! 먹을 거야!”
글러트니가 다시금 형만을 공격하고 나섰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든 이준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보…!”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던 글러트니의 몸은 순간 찌그러지며 압축되었고, 짓밟힌 깡통처럼 퍼진 몸에선 피가 솟구쳤다.
“조용히 해주겠나? 좀 시끄러운데.”
그 상태가 되고도 글러트니는 죽지 않았다.
그는 일어서기 위해, 몸을 복구하기 위해 꿈틀거렸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벡터 조작…. 신의 힘이라 불리던 그 힘은 예전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군.”
글러트니를 손쉽게 제압한 이준의 곁에서 거친 불길이 맹렬하게 솟아올랐다.
자신을 감싼 불길에 이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분노?
증오?
형만의 얼굴은 아군을 바라보는 것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이준….”
“썩 달가운 반응은 아니군요. 그간 미운털이 박힐 일들이라도 있었던가요?”
이준이 가볍게 손을 내밀자 형만의 불길이 그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그의 손안에서 타오르던 불길은 힘없이 사라져 버렸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제게 칼날을 겨누시다니,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니신 모양이네요. 그래요. 어디 말씀해 주시죠.”
“여기 오기 전 성덕과 만났다.”
“그러셨군요.”
“녀석은 죽었다.”
“…그거 유감이네요. 그만큼 연륜 있고 실력 있는 헌터는 얼마 없는데요.”
이준이 짧은 묵념을 보냈다.
“오랜 전우를 잃게 되어 유감입니다.”
“녀석과 함께 있던 마지막 자리엔 러스트란 녀석도 함께 있었다.”
형만의 이야기에 이준이 엔비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셨군요. 그럼 오성덕 헌터님을 살해한 건 그 러스트란 자인 모양이군요.”
“러스트는 송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목소리를 하고 녀석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지.”
“환각의 일종을 사용하는 적이었나 보군요. 그것도 아니면 모방?”
“아니. 환각이나 모방 같은 게 아니었다. 거기 있던 건 틀림없는 송이였어.”
단호한 형만의 목소리.
“잠깐만! 송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놀란 이안이 물었다.
한송이.
이안 역시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이런 말 하는 건 저로서도 참 괴롭지만… 헌터님, 현실을 직시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송이 헌터님께선 돌아가셨습니다. 그걸 가장 잘 아는 건 헌터님이실 텐데요.”
“오성덕 녀석이 그러더군. 온전한 그녀를 얻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살해했다고.”
“오성덕 헌터님께서?”
“녀석의 말을 듣고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설마설마하며 계속 그 가능성은 부정했지. 하지만 역시 그것 말고는 말이 되지 않았다.”
“…….”
“내 시간은 그날에 멈춰 있다. 누가 어디 있었는지,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난 오늘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
“그날 토벌팀의 리더는 너였다. 편성부터 모든 계획을 수립한 건 너였지.”
“도의적인 책임이라면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치밀하게….”
“그리고 송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너랑 성덕이었다.”
이준의 말을 가로챈 형만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 녀석이 정말 그녀를 살해했다면… 네가 모를 리가 없겠지. 이 개자식아!”
순식간에 터져 나온 푸른 화염이 일대를 뒤덮었다.
형만의 주먹에 시원에게 후려 맞은 이준은 글러트니와 부딪치고서야 멈춰 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준은 침착하게 안경을 다시 썼다.
“너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불지옥에 떨어져 영혼 한 점 남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방금 그건 제가 일부러 맞아드린 거란 거 아시겠죠, 샐러맨더?”
달려들던 형만이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뭔가 엄청 거대한 일격에 맞지 않고서야 불가능할 정도의 힘과 속도였다.
“준아,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방금 내가 들은 게 대체 뭐냐고?!”
이준 앞을 막아선 이안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
“아직도 그렇게 뻔뻔하게 가면을 쓰고 있을 생각이냐?”
불길을 두른 형만이 순식간에 이준의 뒤로 파고들었다.
형만의 검은 정면을 향했지만, 칼날이 만든 상처는 이준이 아닌 천장에 생겼다.
“잘 아실 텐데요. 샐러맨더, 당신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제게 상처 하나 낼 수 없다는 건. 영혼을 불사르는 정도로 과연 절 상대할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형만의 대검이 부자연스럽게 멈춰 섰다.
또 한 번 날아간 형만의 가슴엔 마치 그의 대검에 베인 듯한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상처에 굴하지 않은 형만이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왜 녀석이 지금 타이밍에 여기 나타난 건지!”
형만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형만의 몸에선 피가 튀었다.
“왜 녀석을 보고 팬텀들이 아무런 적대심이나 경계심을 표하지 않는지!”
형만의 불길은 형만을 불살랐고, 형만의 분노는 형만을 찢었다.
“왜 길드가 그간 그렇게 사건에 소극적이었고, 왜 그렇게 무능했는지!”
힘껏 휘두른 형만의 검이 저 멀리 날아갔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손 가죽은 전부 찢겨 있었고, 그의 손가락은 엉망으로 부러져 있었다.
“어떻게 팬텀이 길드의 정보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이형 워프 장치를 가지고 있는지…. 모든 게 하나로 설명되잖아?”
망가진 손으로 대검을 움켜쥔 형만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녀석이 바로 팬텀의 보스다.”
“……!”
충격적인 형만의 한마디에 일대가 고요해졌다.
이안은 말없이 이준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고.
아니라고 말하라고.
그는 무언중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아….”
작은 한숨을 내쉰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크흣! 흐하하핫!!”
웃기 시작했다.
“준아…. 너….”
“내가 팬텀의 보스라고? 정말 그 말을 믿는 거야, 안?”
“…….”
“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를 했어. 이번만 해도 그렇잖아. 난 A급 헌터들에게 주요 대피 시설 보호를 명령한 장본인이야. 내가 팬텀의 보스라면 왜 그랬겠어?”
“그래야 이 게이트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테스트할 수 있을 테니까. 한정된 팬텀의 인원으로 모든 헌터를 상대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겠지.”
형만이 즉각 반박했다.
“생각해 보면 넌 줄곧 그래 왔다. 형식적으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대처를 함으로써 정당성과 타당성을 지켜 왔지.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넌 너 스스로를 지켰을 뿐, 아무것도 지키지 않았어.”
“…….”
몰아치는 형만의 이야기에 이준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짝! 짝! 짝!
짧고 간결한 세 번의 박수로 화답했다.
이준은.
상당히 만족스럽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