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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40화 (240/357)

240화

* * *

계단을 내려간 용주는 지하 2층의 플랫폼으로 진입했다.

멈춘 지하철이 한 대 보였고, 마찬가지로 누군가 지나간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화끈하게도 저질러 주셨군.’

차이가 있다면 이쪽의 흔적은 누가 봐도 확실하다는 것.

저 앞에 부자연스러운 싱크홀은 분명 이안이 만든 것일 터.

‘게이트는 이 아래인가.’

또 한 번 공간을 흔드는 진동.

싱크홀 앞에 선 용주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고기처럼 생긴 언노운 한 마리가 스윽 지나가는 게 보였다.

이안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의문들을 뒤로한 용주는 싱크홀로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다섯 개의 카오스 게이트.

게이트들은 모두 관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다음 보이는 건 폐쇄된 승강장의 모습이었다.

승강장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었는데, 여러 언노운들의 유해가 철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건 녀석의….’

관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게 그리드가 지고 다니던 것이었음을.

녀석과 전투를 펼쳤을 때 녀석은 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들고 나오지 않았다고 했으니, 이 사태가 벌어지면서부터 쭉 여기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쿠궁…!

지면에 착지한 용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 진동은 카오스 게이트가 만드는 게 아니었다.

진원지는 초승달 모양의 차원의 틈.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불안정하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차원은 요동치고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문을 사용할 생각이 없으신가 보네요.”

균열을 살피던 용주에게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에 난 구멍은 문이 아니라고 학교에서 안 가르쳐 주던가요?”

모습을 드러낸 이는 엔비.

메스 한 자루를 쥐고 있는 엔비는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 전 저쪽으로 이동했던 언노운은 얇게 회 떠져 있었다.

“팬텀….”

“아~ 그렇죠. 당신은 절 모르겠네요. 전 당신에 대해 많이 들었는데요, 용주 씨.”

엔비가 메스를 가볍게 털어 냈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엔비. 누나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어요. 이래 보여도 용주 씨보단 연륜이 있으니까요.”

“엔비라고? 네가?”

엔비.

처음 윤현이 습격해 왔을 때부터 들었던 이름이었다.

“후후. 혹시 생각한 것 이상으로 미인이라 놀라셨나요?”

“그런 농담에 어울려 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농담이라뇨. 200% 진심이랍니다.”

잘게 잘라 낸 언노운의 살점 한 점을 집은 엔비가 그걸 먹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는 용주 씨는 사진빨이 영 안 받는 타입인가 보네요. 실물이 훨씬 나은 걸요. 특히… 그 피에 흠뻑 취한 쇄골. 아주 섹시한 걸요. 당장이라도 탐하고 싶을 만큼.”

입술을 훑은 엔비가 들고 있던 살점을 던졌다.

살점은 불안정한 차원의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안은 어딨냐?”

“벌써 본론인가요? 이제 막 만난 참인데.”

“너랑 말장난이나 하자고 여기 온 게 아니다.”

“음. 그런가요. 글쎄요. 화장실이라도 가신 거 아닐까요?”

“…….”

“어머 어머. 그 눈빛 좋은데요? 아주 황홀한 얼굴이에요. 역시 연상보단 연하가 보는 맛이 있네요.”

용주의 반응에 엔비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재주로 들어오신 걸까요? 당신이 가진 마나로 버틸 수 있는 차원 압력이 아닐 텐데요.”

엔비가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렸다.

보스의 계획 중엔 그가 여기 도착하는 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차원 압력이 너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형편없었나 보지.”

“음. 그런가요.”

걸음을 옮기던 엔비가 구멍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윤현과는 즐거우셨나요.”

“…….”

“표정을 보아하니 영 아니었나 보네요. 그의 마지막을 자기 손으로 끝내지 못한 게 아쉬운가요?”

“처음부터 버림패였던 거냐?”

“버림패라뇨. 잘 성장한 나무에서 과실을 거두는 건 노고에 대한 당연한 보상 아닌가요?”

엔비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이번엔 제 차례네요. 프라이드는 어떻게 됐죠?”

“…죽었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알기 쉬운 거짓말. 제가 기대한 답변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요.”

엔비가 가볍게 손을 펼쳐 보였다.

떠오른 별자리는 프라이드와 닮아 있었다.

“설마 프라이드가 당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돌릴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가 맡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면서.”

“녀석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거다. 뭐가 됐든 곧 만나게 될 거니까.”

거두절미한 용주는 곧장 광폭화에 들어섰다.

“카…가각!”

고통에 반응하듯 기괴하게 꺾이는 용주의 머리.

광폭화의 연속된 사용에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경련이 일어난 왼팔이 순간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비틀거렸고, 슬개골과 대퇴골이 탈구된 것처럼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이를 악문 용주는 왼팔을 힘껏 디뎠다.

이 통증도 버텨 내야만 했다.

“흠…. 그 모습이 그건 가 보죠? 프라이드랑 그리드가 그토록 관심을 보였던 심연 말이에요.”

순식간에 접근해 온 용주의 공격.

용주의 손톱을 피해 낸 엔비는 용주와 교차하며 지나갔다.

“실제로 보니 더 기괴하네요. 그 둘이 그렇게 관심을 보인 게, 음…. 글쎄요. 제 기준에선 선뜻 이해가 되진 않는데. 전 원래 모습이 더 좋은데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엔비가 한 바퀴 돌린 메스를 쫙 뻗었다.

그와 동시에 쏟아져 내리는 핏방울.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에 용주는 자신의 왼손을 곁눈질했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손톱 아래 생긴 작은 상처에서 말이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네요. 프라이드가 왜 당신을 언노운이라고 표현했는지도 이해가 가요. 뭐, 그 애가 당신을 그렇게 표현한 건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용주의 공격에도 엔비는 쉽게 틈을 내어 주지 않았다.

몰아치는 쪽은 용주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처가 늘고 있는 쪽 역시 용주였다.

“당신은 절 공격하는데 아무런 망설임도 없네요. 정말 죽일 생각으로 임하고 있죠. 그렇죠?”

용주를 두른 갑피는 상당한 강도를 지니고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엔비는 계속해서 용주에게 데미지를 누적해 가고 있었다.

아주 간단하단 듯이.

“멋드러진 칼, 화려한 스킬.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 생명을 빼앗는 데 그런 거창한 게 정말 필요할까요?”

물음을 던진 엔비에게 네 개의 촉수가 달려들었다.

불규칙하게 꺾이는 촉수는 빠르고 날카로웠지만, 목표했던 것을 꿰뚫지는 못했다.

네 개의 촉수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은 엔비는 메스를 톡톡 두드렸다.

“생명을 구하는 이 메스 한 자루면 수백도 죽일 수 있답니다. 아주 간단하게요.”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수많은 핏방울들.

촉수에 생긴 수많은 상처는 안쪽에서 터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으로 거리를 좁혀 오는 엔비.

뒤쪽으로 가볍게 도약한 용주는 허공을 밟고 사라졌다.

“!”

용주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그로부터 1초 뒤.

지면을 긁으며 방향을 꺾는 용주의 꼬리는 날카로운 초승달을 그렸다.

“제법인데요? 설마 했지만, 이 정도 상처를 입을 줄이야.”

갑작스럽게 뒤를 잡힌 엔비는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물러났다.

용주의 저 이질적인 움직임.

말로는 들었지만 확실히 신경 써야 할 움직임이었다.

“왼손을 끌어당겼었죠? 조금 전에. 그게 위치를 옮기는 스킬의 트리거인 모양이죠?”

물음을 던진 엔비가 왼손으로 상처를 짚었다.

그녀의 손에 감도는 초록의 빛은 그녀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하고 있었다.

“99.99%의 의료 헌터들은 자신들의 힘이 생명을 구하는 힘인 줄 알죠.”

불과 몇 초 만에 찢긴 상처를 치유한 엔비가 다시금 거리를 좁혀 왔다.

촉수 사이를 통과하는 엔비.

피하는 데 그치지 않은 그녀는 용주의 촉수 곳곳에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뒤쪽으로 물러난 용주는 촉수들을 끊어 냈다.

점점 좁혀지는 두 사람의 거리.

엔비가 충분히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던 용주는 지면을 내리찍었다.

솟구치는 피의 물결에 엔비의 움직임이 잠시 주춤거렸다.

그때.

엔비가 딛고 있던 지반이 크게 훼손되며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도약한 엔비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반을 찢고 나오는 건 용주의 촉수들이었다.

지반 아래를 뚫고 들어온 촉수는 잘라 냈던 촉수들의 끝과 이어지며 엔비를 조여 오고 있었다.

마치 낙엽 갈퀴 같은 모양으로.

“카각…!”

움직임이 제약된 엔비를 향해 용주는 날카로운 꼬리를 뻗었다.

뒤는 촉수, 앞은 꼬리.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엔비는 침착했다.

용주의 꼬리 끝에 정확히 올라탄 엔비는 미끄럼틀을 타듯 꼬리를 타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는 그녀의 메스를 따라 출혈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빛엔 언제나 어둠이 동반되는 법이에요. 살릴 수 있다는 건 반대로 죽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거의 마지막까지 꼬리를 타고 내려온 엔비가 메스를 휘저었다.

“죽이는 건 때론 살리는 것보다 쉽죠.”

8 : 2의 비율로 잘려 나간 꼬리는 그대로 땅에 뚝 떨어져 버렸다.

‘이 녀석….’

늘어난 상처와 함께 줄어드는 HP.

남아 있는 2 만큼의 꼬리를 회수한 용주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 그래. 그때랑….’

방금 그 공격을 받으며 한 가지 느낀 게 있었다.

녀석의 메스에 베일 때 느끼는 고통은 단순히 신체에 기인한 것관 달랐다.

방금 그건 부정합 개입을 사용했을 때 생명력이 빠져나갔던 그 감각과 유사했다.

‘녀석이 한 말은 혹시 그런 의미인가?’

살릴 수 있다는 건 반대로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녀석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어쩌면.

상처를 회복시키고, 생명을 불어넣는 의료 헌터의 힘을 녀석은 반대로 사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게 실제 가능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전투가 한창이던 그때.

카오스 게이트에서 또 한 무리의 언노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을 너무 지체한 건가?’

방향을 돌린 용주는 일단 달려드는 언노운들을 정리해 나갔다.

공격을 받는 건 용주뿐만이 아니었다.

용주를 지나친 언노운들은 엔비를 타깃으로 잡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메스를 휘저은 엔비는 언노운들을 순식간에 도륙해 버렸다.

“카각!”

나방 날개를 잡아 찢은 용주는 놈의 몸통을 꾸적꾸적 뜯어먹었다.

이빨이 있는 머리와 독이 있는 배 쪽은 먹지 않고 대충 던져 버렸다.

페이탈 붐은 사용하면 보다 많은 녀석들을 한 번에 정리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저기 그걸 쐈다간 분명 관에 대미지가 갈 게 분명했다.

관은 닫혀 있었지만,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저 안엔 태영이 있을 거다.

‘저 카오스 게이트들, 분명 저 관과 어떤 연관이 있을 거야. 날려 버리면 분명 카오스 게이트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이 가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태영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가장 쉽고 빠른 길이 뭔진 알지만, 지금 그걸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큭…!’

쌓이고 쌓이는 시체와 고이고 고이는 핏물.

용주에게 이상이 생긴 건 바로 그때였다.

오른쪽으로 급히 방향을 꺾던 용주가 몸을 지탱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선로 아래로 날아가 버렸다.

‘젠장. 팔이!’

시체 더미 위로 떨어진 용주가 오른 어깨를 붙잡았다.

손등을 타고 어깨까지 이어지는 극심한 통증은 외부적인 요인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온전히 육체의 한계에서 오는 문제.

계속된 광폭화로 몸도 정신도 완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아니. 약한 소리 하지 마. 움직이지 못하면 죽는 곳이야, 여긴.’

오른 어깨에 기다란 손톱자국을 남긴 용주는 스팀팩을 사용했다.

약간이긴 하지만, 고통이 조금 무뎌지는 것 같았다.

그때.

“!”

거대한 언노운 한 마리가 선로를 가르며 헤엄쳐 오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킨 용주는 녀석과의 충돌에 대비했다.

그런데.

용주를 불과 몇 미터 앞두고 튀어 오른 녀석은 용주가 아닌 엔비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마치 의도적으로 용주를 피해 간 듯한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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