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고통은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편안한 죽음이지요.”
성덕을 베어 낸 라스가 쇠사슬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아니야! 이건 다 환각일 뿐이야! 죽을 리가 없잖아?”
“믿든 믿지 않으시든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고개를 돌리던 라스가 급하게 다시 성덕을 바라보았다.
“아, 참. 그때가 오면 이 말을 전해 달라고 말씀하셨었죠. ‘널 위한 계획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있는 건 오로지 날 위한 계획뿐이었지.’라고요.”
“뭐…라고?”
“전 분명 전해드렸습니다.”
라스의 시선이 형만에게로 향했다.
“다음은 당신 차례입니다. 보스께선 이 일의 목격자 또한 전부 제거하라 명하셨습니다.”
“……!”
다급하게 움직인 러스트가 형만의 앞을 가로막았다.
“러스트?”
“안 돼.”
러스트의 단호한 목소리.
걸음을 멈춘 라스는 쇠사슬을 늘어뜨렸다.
“지금 저와 맞서실 생각이신 겁니까?”
“…….”
“그게 의미하는 게 뭔지는 아시리라고 생각하는데요. 충분히 영리한 사람이시니.”
“절대 못 비켜.”
비틀린 라스의 그림자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전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싫어.”
“그럼 비켜 주십시오. 지금이라면 없던 일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안 돼.”
“병행할 수 없는 선택지란 거 아실 텐데요.”
“그래서 정한 거야.”
“…그렇군요. 그거 유감입니다.”
오른발을 높이 치켜든 라스가 땅을 내리찍었다.
그를 잡고 있던 그림자는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나도 그래.”
깨진 그림자를 다시 엮은 러스트가 라스를 휘어 감았다.
지면에 고정된 쇠사슬.
양팔을 끌어당긴 라스는 그림자를 끊어 내려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러스트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너… 뭐 하는 거냐?”
당황한 형만이 물었다.
“글쎄….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양팔을 한 대 모은 러스트가 필사적으로 라스를 저지했다.
“너 정말…. 너 정말 한송이인 거냐?”
형만이 말을 더듬었다.
믿을 수도 없고, 믿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 난 몰라.”
“그럼 어째서 날 찾아왔던 거냐? 왜 날 지켜 주려는 거지? 대체 무엇을 위해!”
몰아치는 형만의 물음.
고개를 돌린 러스트는 그와 눈을 맞췄다.
“글쎄. 왜일까?”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은 러스트가 또 하나의 그림자를 뻗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남아 있는 힘만으론 라스를 저지할 수 없었다.
“악당이란 원래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인 거 아니겠어?”
형만을 중심으로 모여든 그림자.
웅덩이진 그림자는 형만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깊은 고뇌에 찬 형만은 딱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열무’라고.
“!”
형만의 한마디의 러스트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열무라니.
도저히 지금 상황에 나올 단어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러스트만은.
아니, 송이만은 이 단어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왜냐면 이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태명이었으니까.
“됐다. 그거면 충분해.”
불길을 두른 형만이 러스트의 힘에 저항했다.
“저항하지 마. 제발 부탁이야.”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이것밖에 없어.”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이대론 못 헤어져!”
형만의 목소리에 작은 흔들림이 일었다.
두 사람이 짧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라스가 오른손의 구속을 끊어 냈다.
결심을 내린 러스트는 형만에게 달려갔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야.”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봤자인 거 알잖아?”
“내 기억은 단지 빌린 거야. 송이는 죽었어. 너도 잘 알잖아. 저 미친 사람의 헛소리는 잊어버려.”
러스트가 그림자의 웅덩이에 손을 담갔다.
형만의 어깨를 타고 오른 그림자는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난 그저 지독한 살인마일 뿐이야. 네 기억을 좀먹는 끔찍한 악마일 뿐이라고.”
형만의 목을 타고 오른 그림자가 형만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한 일은 전부 널 무너뜨리기 위함이었어. 널 이용해 먹기 위한 연극일 뿐이었다고.”
“…….”
“기억나? 마지막에 내가 했던 연극. 널 내 망상 속에 머물게 하려고 했잖아. 네 소중한 사람과 네 소중한 기억을 이용해 가면서까지.”
“…….”
“왜 그랬냐고? 글쎄…. 다른 사람의 기억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더니,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나한텐 그저 단순한 놀이였던 거지. 너도 이 기억들도. 단순한 유흥일 뿐이야. 러스트…. 색욕이란 건 원래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법이잖아.”
왼손을 뻗은 러스트가 형만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때.
“거짓말은 여전히 서투르네.”
형만이 이빨로 그림자를 찢어 냈다.
“왜 안 믿는 거야?”
“그런 얼굴로 믿어 달라고 하면,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얼굴?”
러스트가 자신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자신은.
울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지금 모습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댔지. 그럴 거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하지만….”
다 꺼져가던 형만의 불꽃이 다시 한번 타올랐다.
분명 그럴 만한 마나는 이제 남아있지 않을 텐데.
형만의 불꽃은 그림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너 역시도 잃지 않을 거다. 네가 어떤 이름을 하고 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상관없어. 너는 너니까.”
“…제발 그러지 마. 난 팬텀이야. 살인자고, 존재해선 안 되는 존재야.”
“내가 쟁취해 낸 지옥이다. 악마든 귀신이든 살인자든. 있을 테면 있으라지.”
홍해를 가르듯 그림자를 가른 형만이 대검을 들었다.
여기서 헤어지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물러날 수 없었다.
절대로.
“…….”
고개를 돌린 러스트의 눈에 성덕이 보였다.
위아래가 분리된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형만의 실력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스의 실력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형만의 분투는 놀라웠지만, 그것만으론 라스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이대로 두 사람이 맞붙는다면.
형만은.
죽는다.
“미안.”
형만에게 달려든 러스트가 그를 넘어뜨렸다.
형만의 팔다리를 타고 오른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그를 잠식했다.
라스를 구속하던 그림자 중 대부분이 지금 이쪽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한송이! 뭐 하는 거냐?!”
“그 지옥에 내 자리는 없어.”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끔찍한 현실보다, 망상 속이 훨씬 행복하다면, 굳이 현실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 기억해?”
“…….”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망상 속에서 그녀가 던졌던 질문이었다.
“당신 말대로 난 당신이 사랑한 사람이 아니야. 당신이 그리워하던 사람도 아니고.”
러스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형만의 뺨 위로 떨어졌다.
“당신이 사랑했던 곳에 난 있으면 안 돼. 그게 당신을 위한 일이고, 당신이 사랑한 사람을 위한 일이야. 나한텐 당신을 빼앗을 자격이 없어.”
왼손을 든 러스트가 형만의 입술을 덮었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지옥이라고 했지? 깊고 싶은 심연 속이라고.”
“…….”
“송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왜냐면,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녀의 눈물에 형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물샘에서 무언가 가득 차오르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있을 곳은 그런 곳이 아니야. 송이는 분명 당신이 행복하길 바랄 거야.”
러스트가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형만의 얼굴을 덮은 그림자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워 가고 있었다.
“사랑했고,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할 거야. 영원 그 너머에 있더라도.”
러스트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형만은 이제 거기 없었다.
“제 임무에 끝내 훼방을 두셨군요. 놀라운 저력이었습니다.”
왼손의 구속마저 끊어 낸 라스가 서서히 거리를 좁혀 왔다.
형만을 무사히 탈출시킨 러스트는 눈가를 닦아 냈다.
“이루시려던 건 다 이루신 겁니까?”
“응.”
“제가 그를 다시 찾아내 임무를 완수할 거란 생각은 안 하시는지요.”
“안 해. 그럴 거였으면 적당히 맞춰 주지도 않았겠지.”
“…아무래도 오해를 샀나 보군요. 전 그랬던 적이 없습니다만.”
“…….”
눈웃음을 지어 보인 러스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뭐지?’
역 근처에 도착한 용주에게 한 가지 변화가 감지되었다.
회색으로 물들었던 도시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러스트 녀석. 스킬을 해제한 건가?’
용주는 혼자였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서윤은 수지가 돌보고 있었다.
용주라고 이렇게 위험한 곳에 둘만 두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역시 마음에 걸렸다.
수호의 말대로면 이안이 도착하고도 시간이 꽤 흘렀을 터인데, 게이트는 아직 닫히지 않고 있었다.
‘임나은. 그 녀석도 아직 안 보이고.’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생각만으로 답을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마침내 보이는 신설동역.
3번 출입구라 적힌 출입구엔 수많은 언노운들이 뒤엉키며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아무래도 멀리서부터 들렸던 괴성의 정체가 바로 저거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곳엔.
눈에 익은 자가 한 명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전투 태세를 갖춘 용주가 물었다.
거기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승우였다.
“이용주 헌터. 이런 곳에서 보니 눈물 나게 반갑네요.”
언노운의 머리를 잘라 낸 승우가 뒤로 물러났다.
승우의 검은 이미 피에 흠뻑 취해 있었다.
아무래도 이 중 상당수의 언노운은 승우가 부리고 있는 녀석들인 모양이었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건 다른 녀석들도 여기 있단 거냐?”
용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금화, 예나, 주원.
세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네. 모종의 이유로 중간에 흩어져 버렸지만, 분명 근처에 있을 겁니다.”
승우가 역으로 용주를 살폈다.
용주가 혼자 있다는 건 아마.
그에게도 자신들이 겪은 일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어떻게 이곳의 위치를 안 거냐? 서울에 있었을 것 같진 않은데.”
“서윤 헌터가 메시지를 남겨 놨다고 하시더군요. 마침 하던 것들도 마무리된 참이었고.”
승우가 코트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
“그 녀석, 안 해도 되는 짓을….”
용주의 입장에선 썩 달가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껏 A급 이하의 헌터들을 최대한 배제했는데, 그 한복판에 녀석들이 떨어졌다는 소리 아닌가?
게다가 승우가 떨어져 나왔단 건 다른 녀석들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단 이야기였다.
자신이나, 나은이 다른 두 사람과 떨어졌던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모종의 이유란 건?”
“이형 워프 장치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한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의도된 거였을지도 모르죠.”
“이형 워프 장치? 의도?”
의문이 들었다.
승우는 B급 헌터.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형 워프 장치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일이 마무리되면 해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순간, 땅이 흔들렸다.
용주와 승우는 무언가 솟구치지 않을까 경계했지만,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아무래도 아래쪽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군요.”
“안으로 들어가려면, 녀석들을 정리하면서 갈 수밖에 없겠군.”
“쉽진 않을 겁니다. 몰려나오는 언노운의 빈도와 종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순간 덮쳐오는 언노운의 공격에 두 사람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끼리리릭!
한 번 더 도약한 용주는 언노운의 머리를 잘라 냈다.
독침과 이빨을 가진 거대한 나방의 형태.
폭발 분진을 일으키는 이 녀석은 분명 용주가 상대했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적이 이렇게 많다면….’
땅을 디딘 용주에게서 하얀 안개가 내리깔렸다.
펼쳐지는 안개의 날개.
수많은 언노운들에게서 뽑혀 나온 생명력은 용주에게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멋진 날개네요. 바람을 탈 수 있었다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요.”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용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승우는.
저 위에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특별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분명 하늘 위에 서 있었다.
“지상 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중은 제 쪽에서 한번 정리해 볼 테니.”
검을 빙글빙글 돌리던 승우가 검을 고쳐잡았다.
잠잠했던 바람은 상승 기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