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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37화 (237/357)

237화

“그녀의 목숨을 빼앗은 사람이 너라고?”

모래 왕성의 중심에 선 형만이 물었다.

자신이 들은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나 보지?”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는… 우린….”

“목숨을 빼앗은 게 아니야. 오염을 정화한 거지.”

성덕이 고개를 저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표정이었다.

“네가 말하는 정화와 살해는 뭐가 다른 거냐?”

“죽은 자는 되살아날 수 없지만, 정화된 영혼은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온전해진 채로.”

“미쳤군.”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 원래 하등한 인류는 고차원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2층으로 향하는 중앙 계단을 오른 성덕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성벽 위에 늘어선 모래 궁수들은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녀를 살해한 사람이 너라면, 현장을 그렇게 꾸며 놓은 것도 너냐?”

“물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일이니, 트집 잡힐 여지 같은 건 두지 않았지.”

“사랑했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

불쾌함을 표한 성덕이 오른쪽을 곁눈질했다.

형만의 왼편에서 날아온 한 발의 모래 화살은 그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사랑했지. 사랑하고, 사랑할 거고.”

“그런데 왜.”

“사랑하니까.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

모래 화살을 불사르는 형만의 시선이 러스트와 마주쳤다.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 다그쳐 왔다.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녀석은 말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저 녀석이….

그녀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차갑게 식은 시신과. 화장하는 모습을.”

“…….”

“그래. 그녀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갔다.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없어. 중요한 건 정수. 그녀의 영혼만이 중요하지.”

“정수라고?”

“그래! 정수야! 깨끗해진 영혼을 새로운 육신에 집어넣는 거지! 잘못된 걸 바로잡고 올바르게 되돌리는 거야!”

순간, 꿈틀거린 성덕의 그림자가 그의 목을 조르며 일어났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 더러운 입 좀 다물어 줄래? 난 러스트야. 다른 누구도 아닌 러스트라고.”

왼손을 뻗은 러스트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정수? 영혼? 웃기지 말라 그래.”

그림자는 한껏 격렬하게 성덕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우린 그렇게 되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그렇게 됐을 땐 넌 지금 이 모습도 기억하지 못할 테지.”

그림자를 떨쳐 낸 성덕이 오히려 러스트를 목에 족쇄를 채웠다.

“오성덕…!”

폭발적으로 속도를 높인 형만은 단번에 성덕이 있는 중앙 계단을 내달렸다.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네 분노 같은 건 너무 작고 보잘것없어. 넌 날 이길 수 없다고.”

일제히 발사된 화살들이 형만의 몸 곳곳을 꿰뚫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대체 무슨 짓을!”

끔찍한 상처에도 형만은 멈추지 않았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 화살들은 급소를 전부 피해 갔다.

“이건 다 네가 잘못한 거야. 네가 나쁜 거라고.”

두 명의 기마병을 만들어 낸 성덕이 두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철퇴를 휘두른 두 기마병은 형만과 교차했다.

기수를 돌리는 그들의 몸은 한 줌 모래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정말이지. 그 끈질김 하나는 여전하군. 아주 진절머리가 나.”

폭발적으로 솟구쳐 오른 모래 쓰나미가 형만을 덮쳤다.

온몸에 불길을 두른 형만은 쓰나미를 정면으로 관통했다.

“진절머리가 난다고.”

쓰나미를 뚫고 나오는 형만의 목을 붙잡은 성덕이 그대로 형만을 내던졌다.

난간에 장식된 가고일상에 부딪힌 형만은 조각상과 함께 내동댕이쳐졌다.

“너희 두 사람을 지금 당장 처리하진 않을 거야.”

승리를 확신한 성덕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너희 둘에겐 각자에게 어울리는 마지막이 있으니까. 일단은 그 녀석을 찾아가서….”

바로 그때.

“……!”

모래성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커헉…!”

구멍이 난 건 모래성만이 아니었다.

배에 구멍이 난 성덕은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무너져 내린 모래성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뭐지? 대체 누가.’

성덕을 꿰뚫은 한 조각의 얼음 파편.

대검에 의지해 일어난 형만은 파편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성덕의 뒤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을 걸친 노년의 사내.

길게 늘어뜨린 쇠사슬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는 한쪽 눈에 안대까지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노친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상처를 짚은 성덕이 그를 노려보았다.

깔끔하게 관통된 상처 부위는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그건 이쪽에서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만, 두 사람 다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노인이 러스트와 성덕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라스….”

‘라스라고?’

러스트의 중얼거림에 형만이 마른침을 삼켰다.

분노.

저기 있는 녀석도 팬텀이었다.

“러스트.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게이트가 있는 심장부가 아니었습니까? 엔비가 함께 있었던 걸로 아는데, 두 사람답지 않군요.”

“…….”

“그리고 당신은 슬로스와 함께 일을 처리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슬로스를 두고 이렇게 혼자 움직이시다니. 이것 역시도 당신답지 않군요.”

“내가 물은 말에나 대답해라. 노친네. 왜 날 공격한 거냐?!”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당신이 임무대로만 움직였어도, 저도 이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뭐라고?”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맡은 바 임무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죠.”

“무슨 개소린지 전혀 모르겠는데? 이게 너희 보스가 맡긴 일이라고?”

“네. 보스께선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임무 외의 행동을 한다면, 당신을 정리하라고.”

“뭐?”

성덕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리라니.

그 녀석이 자신을?

믿을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노망이라도 난 거냐? 그 녀석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잖아!”

“전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빠른 속도로 피고 든 라스가 사슬을 휘둘렀다.

사슬 하나하나의 홈에서 사출된 얼음 쐐기는 성덕이 퍼 올린 모래에 바람구멍을 만들었다.

“이런 미친!”

모래를 밟고 미끄러진 성덕이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라스를 포위하는 수백의 모래 병사들.

날카로운 창을 뻗은 그들은 일제히 라스를 덮쳤다.

“날 물로 보지 마라, 노친네! 이 몸은 특A급 헌터 오성덕 님이란 말이다! 네가 없애려고 한다고 없앨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보스께서도 그래서 제게 명하신 거겠죠.”

피어나는 얼음의 꽃.

수백의 모래 병사를 한 번에 쓸어 버린 라스는 연꽃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넌 아무것도 아니야.”

성덕이 일으킨 거대한 스핑크스가 라스를 내리찍었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양팔을 교차시킨 라스가 스핑크스의 발바닥을 찢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모래 중심으로 치솟아 오르는 라스.

단번에 스핑크스의 머리로 오른 라스는 있는 힘껏 두 팔을 당겼다.

두 개의 사슬은 스핑크스의 목을 절단했고, 무너져 내린 스핑크스의 머리는 엄청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너 이 자식…!”

스핑크스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린 성덕이 양팔을 펼쳤다.

“비사주석(飛沙走石)!”

성덕의 팔을 따라 상승하는 모래.

하늘에 나타난 모래시계에 안엔 라스가 갇혀 있었다.

“스러져라. 네 무례에 대한 책임은 후에 다시 묻도록 하겠다.”

쏟아지기 시작하는 모래.

폭포처럼 쏟아지는 모래는 빠르게 빈 공간을 채워 갔다.

불과 몇 초 만에 허벅지까지 차오른 모래.

위를 올려다본 라스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허리춤까지 당긴 오른손의 사슬을 왼손으로 휘어 감았다.

“월영식 - 적!”

작렬하는 발도술.

사슬이 만들어 낸 붉은 검기는 모래시계를 깔끔하게 베어 냈다.

붉은 검기는 곧장 성덕에게로 뻗어 나갔고, 지면에 길고 날카로운 상처를 만들어 냈다.

‘월영식이라고?’

근처를 지나간 붉은 검기에 형만이 의문을 표했다.

방금 그건 틀림없이 헌터 시험에서 주원이 사용했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큭! 고작 그거 베어 낸 거 가지고 우쭐거리지 마라. 함사사영(含沙射影)!”

모래에서 솟아난 네 명의 아누비스가 거대한 체스판을 만들었다.

체스판의 킹의 자리엔 두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고, 주변엔 모래로 만들어진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기사가 배치된 건 성덕의 진형뿐이라는 것.

라스가 속한 방향엔 체스 말이 하나도 없었다.

“자~ 그럼 게임을 시작해 볼까? 여긴 내 규칙이 지배하는….”

“프로즌 파일(Frozen Pile).”

쇠사슬을 타고 흐르는 푸른 물결.

사출된 냉기의 일격이 아누비스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라스의 왼손 쇠사슬은 가로로 도열해 있었는데, 얼음으로 만들어진 말뚝들이 쇠사슬을 따라 자라나 있었다.

“규칙은 강한 자가 정하는 법. 규칙을 깨는 것 또한 강자의 권한이죠.”

“너 이 자식. 도구인 주제에 감히….”

성덕이 분노를 표하는 사이 또 하나의 아누비스의 머리가 날아갔다.

라스의 쇠사슬은 흡사 기관총.

날아가는 말뚝들은 탄환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의 스킬이라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떤 스킬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정도는 이미 생각해 뒀습니다.”

순식간에 네 개의 아누비스를 모두 날려 버린 라스가 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된 활약 한 번 펼치지 못한 체스 기사들은 모래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뭐라고?!”

“게다가 도구인 건 모두가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당신도.”

“웃기는 소리! 네가 이름도 없는 네놈들이랑 어떻게 같아! 네놈들이랑!!”

악에 받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성덕이 피를 토해 냈다.

복부에서 흐른 피는 땅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특A급 헌터. 그간 보여 주신 노고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전력으로 상대하겠습니다.”

사슬을 휘어 감는 라스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월영식 - 사(死) : 참월.”

서로 다른 여덟 방향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라스.

여덟 개로 나뉘었던 라스의 모습은 하나만을 남긴 채 이내 사라졌다.

“하! 뭐야? 그냥 빨리 지나간 게 다냐? 나 참. 나이는 어디로 처먹은 거야? 허세는….”

입가를 닦아 낸 성덕이 피식 웃어 보였다.

몸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이런 녀석 하나 정도 처리하는 건 일도….

‘뭐… 뭐지?’

순간, 땅이 가까워지더니 그대로 이마가 땅에 부딪혔다.

깨진 머리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고, 흘러내린 피가 콧등에 닿았다.

‘안 움직여! 몸이 말을 안 들어!! 어째서?!’

팔, 다리, 몸통.

일어나기 위해 그 모든 곳을 움직여 봤지만, 어느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감각도 전해지지 않았다.

마치 사지마비라도 된 것처럼.

“몸을 움직일 모든 신경과 근육을 잘라 냈습니다. 머리 쪽은 손대지 않았으니, 하시던 말씀 계속하시면 됩니다.”

“뭐…… 뭐라고?!”

간신히 고개만 움직인 성덕이 그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할 일엔 변함이 없으니까.”

“하! 하하하핫! 그래! 알았다! 이건 환각이야! 단순한 눈속임이 분명해!”

다가오는 라스를 보던 성덕이 폭소를 터뜨렸다.

역시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어디 이 몸을 속이려고! 어림도 없지!”

모래로 자신의 팔다리를 휘감은 성덕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

똑바로 보이던 풍경에 순간 비틀림이 생기더니, 이내 삐딱하게 기울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바닥에 쓰러진 성덕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모래를 둘렀던 자신의 하반신이 저 아래 있었다.

그 위에 있어야 할 상반신은.

거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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