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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36화 (236/357)

236화

“방금 그건 뭐였던 거냐?”

거친 숨을 몰아쉰 형만이 물었다.

“글쎄… 뭐였을까? 야비한 팬텀의 마지막 발악 같은 거 아니었을까?”

러스트가 힘없이 웃어 보였다.

왜 그게 하필 그 타이밍에.

그걸 형만에게 보일 생각 같은 거 전혀 없었는데.

“마지막 발악이든 뭐든 상관없다. 말해라.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네가 말한 ‘그이’란 게 대체 누군지.”

“글쎄…. 다 끝난 마당에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시선을 피한 러스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서 끝내. 네 손으로 팬텀 중 하나를 쓰러뜨리는 거야.”

“…….”

러스트를 내려다보던 형만이 대검을 치켜들었다.

분명 각오했을 터인데, 마지막 순간에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까 그거 때문인가.’

마지막에 봤던 그것들 역시도 자신의 마음을 이용해 먹기 위한 트릭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의문이 남았다.

자신이 보았던 전혀 다른 두 장면.

전자의 장면에서 자신은….

아니, 자신이라 생각되던 자는 분명 이자를 이렇게 불렀다.

‘한송이’라고.

반면, 후자의 장면에선 이자는 이렇게 불렸다.

‘러스트’라고.

전자와 후자엔 분명 동일 인물이 등장했다.

하지만 둘이 같은 사람일 리가 없었다.

이 녀석이 가진 전혀 다른 두 가지 기억.

이 녀석이 가진 전혀 다른 두 가지 이름.

그게 의미하는 게 대체 뭘까.

자신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저 단순히 두 데이터를 교묘하게 엮은 트릭이라고 치부해도 좋은 걸까.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라도….’

실은 알고 있었다.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한 가지 답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절대로.

절대로 말이다.

“……!”

형만이 깊은 고뇌에 빠져 있던 그때.

한 무리의 모래 병사들이 형만을 밀쳤다.

‘이건….’

모래 병사에 밀쳐지던 형만은 단번에 모든 병사들을 베어 냈다.

이건 틀림없이 그 녀석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모래를 밟은 형만이 눈을 부라렸다.

형만의 맞은편에는 성덕이 있었다.

“…….”

형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성덕은 곧장 러스트에게로 다가갔다.

“어째서 당신이….”

무릎을 꿇은 성덕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틀림없었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할 리 없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손을 뻗은 성덕이 러스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온기가 느껴졌다.

아주.

아주 생생하게.

“아직 완성됐단 이야기는 없었는데.”

혼란스러웠다.

그냥 지켜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런가. 계획이 생각보다 빨리 완성이 된 건가?”

러스트의 뒷목을 끌어안은 성덕이 그녀를 일으켰다.

그것 말고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나야. 나 알아보겠어? 당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반쯤 감긴 러스트의 눈을 들여다본 성덕이 물었다.

이런 상황에 이런 게 정상인진 모르겠지만, 심장이 미칠 듯이 빨리 뛰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될 날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나만을 바라봐 주는 나만의 그녀를.

“사랑…?”

“그래! 기억나지 않아? 내 얼굴. 내 이름.”

“…….”

러스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은.

저기 있는 형만이었다.

“왜?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거야? 왜 그런 표정 짓는 거야?”

“…….”

“나야…. 나라니까?! 성덕이라고. 혹시 아직 뭔가 부족한 거야? 그래서 나한테 말 안 했던 거야?”

점점 더 집착을 보이는 성덕.

러스트의 어깨를 잡아 흔드는 성덕에게 거친 발길질이 작렬했다.

충격에 날아간 성덕은 엉망으로 땅을 뒹굴었다.

“너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냐?”

성덕을 걷어찬 형만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 녀석의 집착이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박형만…. 네가 이렇게 만든 거냐?”

“질문을 던진 건 나일 텐데?”

“인간이 돼 놓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그녀를 보고도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가 있는 거냐?”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안다. 하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야.”

한송이.

그녀를 기억하는 건 자신만이 아닐 것이다.

이 녀석 역시도 그녀와 같은 게이트에 섰고, 같은 적과 싸웠던 헌터.

녀석의 눈에도 러스트는 송이로 보일 테지.

“현실이 아니라고? 크흣! 하하하핫!!”

모래를 일으키며 일어난 성덕이 폭소를 터뜨렸다.

“넌 아무것도 몰라.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무슨 소리냐. 그게.”

“현실이 아니라고 했지? 아니. 이건 현실이다. 내가 꿈꾸던 미래. 내가 소망하던 미래란 말이다!”

“너…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냐?”

형만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넌 항상 그랬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소망했던 모든 걸 잘근잘근 짓밟고 빼앗아 갔지. 단 하나의 사랑까지도.”

“…사랑이라고?”

“한송이. 네가 그녀에게 눈길을 주기도 훨씬 전부터 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말투, 그녀의 표정, 그녀의 눈빛, 그녀만 가질 수 있다면 세상 모든 걸 빼앗겨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형만을 포위하며 일어난 모래 병사들이 일제히 형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넌 그 하나까지도 빼앗아 갔지. 그녀의 웨딩드레스는 내 것이어야 했어. 내 것이어야 했다고!!”

모래 병사 사이를 통과하는 형만.

병사들의 신체 곳곳에 작은 불씨를 심어 놓은 형만은 불씨를 일제히 폭발시켰다.

흩어진 모래는 형만을 에워싸며 흘렀고,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형만을 움켜 쥐려는 거대한 손.

거대한 모래 손의 중지를 두 동강 낸 형만은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지친 모양이지?”

이어지는 성덕의 스킬.

둔덕처럼 일어난 거대한 모래의 거인이 형만을 덮쳤다.

거대한 불기둥을 일으키며 거인의 가슴을 꿰뚫은 형만.

형만의 호흡은 심하게 거칠어져 있었다.

“난 모든 것을 잃었다. 내게 남은 건 깊은 절망과 널 향한 증오심뿐이었어. 그런 내게 악마가 속삭였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했던 그녀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냐고. 나만을 바라보는 나만의 그녀를 가지고 싶지 않냐고.”

모래를 일으킨 성덕이 러스트를 휘어 감았다.

“언노운? 하! 넌 정말 아무것도 몰라. 송이가 그딴 벌레들한테 당했을 리가 없잖아.”

“…….”

녀석의 말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의 실력을 잘 알기에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차차! 이런, 너무 많은 걸 이야기할 뻔했어. 입조심 해야지, 입조심. 기껏 돌려받은 그녀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건 곤란하니.”

잘난 듯 이야기를 이어 가던 성덕이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말해 줄 수 있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건 현실이야. 솔직히 말하면 내가 생각했던 이상은 아니야. 모든 게 조금씩 어긋나 있지. 하지만….”

러스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성덕이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모래로 만들어진 면사포와 드레스.

그는 자신이 만든 걸 감상하고 있었다.

“어긋난 건 다시 맞추면 그만이지.”

순식간에 형만을 덮친 모래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형만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놔 줘. 정말로 죽을 거야.”

가쁜 숨을 몰아쉰 러스트가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형만의 상태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에.

A급 헌터의 공격을 버텨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찮아, 자기야. 숨 쉴 구멍은 만들어 놨으니까. 나도 지금 여기서 녀석이 죽는 건 원치 않는다고. 그런데….”

고개를 저은 성덕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왜 저 녀석을 위해 그런 얼굴 하는 거야? 왜?”

“…….”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 그 녀석. 그래서 아무 말 안 하고 있던 거야. 고얀 놈. 우리 자기한테 대체 무슨 짓을….”

“…난 자기 같은 게 아니야.”

“뭐?”

“난 자기 같은 게 아니라고.”

모래를 찢은 러스트가 땅으로 뚝 떨어졌다.

녀석의 말을 더 이상 들어 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해야. 네 기억에 오류가 있는 거라고.”

“내 이름은 러스트. 팬텀의 일원. 다른 누굴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쇄도하는 그림자가 피라미드를 찢었다.

“러스트…라고?”

죽은 눈동자의 성덕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금 자신이 들은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러스트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기야! 넌 한송이잖아! 한송이!”

“애송인지 한송인지 하는 그런 이름 난 몰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머리를 짚은 성덕이 순간 비틀거렸다.

눈앞에 있는 건 분명 송이였다.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게 100% 확실하단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를 러스트라 지칭하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 같은 건 전부 잊었단 듯이.

“러스트는 그 녀석의 꼭두각시 중 하나일 뿐이야! 충실한 도구일 뿐이라고! 네가 러스트일 리가 없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성덕이 악에 받쳐 외쳤다.

만약 그녀가 정말 러스트라면.

그녀가 존재한 건 훨씬 과거의 일이란 이야기가 된다.

그럼 앞뒤가 전혀 안 맞지 않는가.

이형 결정체를 모은 것도.

헌터들의 힘을 빼앗은 것도.

지금까지 벌인 일련의 사건들도 전부 그녀를 위한 일이었는데.

그녀가 이미 예전에 돌아왔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은 대체 뭐였느냔 말이다.

왜 그 녀석은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부하처럼 부리고 있었느냔 말이다.

“그래! 그 녀석이라면, 그 녀석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 당장 녀석을 찾아가서…!”

“아니. 미안하지만, 그냥은 못 보내준다.”

폭발하는 화염.

일대를 포위한 불의 장벽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피라미드의 잔해를 빠져나온 형만은 대검을 일자로 뻗었다.

“네가 알고 있는 걸 말해라. 그녀의 죽음에 대해. 거기 있는 녀석에 대해. 그리고 네가 말한 그 녀석에 대해.”

“크흐흣. 꺼져 가는 마지막 불꽃인 주제에 폼 잡기는.”

모래 소용돌이를 일으킨 성덕이 화염의 장벽을 밀어냈다.

“못 보내준다고 했을 텐데?”

회전하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주객이 전도된 소용돌이는 불길에 삼켜져 장벽에 흡수되어 버렸다.

“한 번 해낸 일이라면, 두 번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도 하니까. 그 녀석도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거겠지. 이 일이 끝나면, 부족한 부분을 고칠 생각이었던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성덕이 거만하게 팔짱을 끼었다.

“좋아.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어디 끝까지 가보자고. 너랑 마주치는 일도, 여기 미완성된 송이를 만나는 일도 이제 영영 없을 테니까.”

“…….”

“러스트? 미안하지만 그런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그녀는 자신을 러스트라 알고 있지만, 그건 기억의 오류일 뿐이지.”

“오류라고?”

“넌 저기 있는 송이를 가짜라고 생각했겠지? 허상이라고. 하지만 틀렸다… 저기 있는 건 틀림없는 송이다. 진짜 한송이란 말이다!”

“미친 소리. 그녀는 죽었어. 너도 그 자리에 있었지 않았던가?”

형만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삼켜 냈다.

“하하핫! 그래! 물론 나도 거기 있었지! 있었을 수밖에 없지! 내가 거기 없었다면, 그녀도 거기서 죽지 않았을 테니까.”

“뭐…라고?!”

“크흐흣! 왜? 자기 귀를 못 믿나 보지? 이빨 빠진…. 아니, 외팔 샐러맨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냐?”

“잘 알다마다. 잘 들어라. 한송이. 그날 그녀를 죽인 사람은…. 아니! 그녀를 정화한 사람은 바로 나다. 이 오성덕 님이라시라고! 하핫! 하하하하!”

실성한 듯 폭소를 터뜨리는 성덕.

그런 성덕을 바라보는 형만과 러스트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불길을 삼켜 내며 일어선 거대한 모래의 왕국은 주변에 있던 모든 걸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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