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당장이라도 화장시킬 기세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형만이 대검을 뽑아냈다.
근처를 지나는 부유석에 러스트가 있었다.
그녀의 뒤론 활짝 열린 문이 하나 있었는데, 안쪽으론 그 뒤의 풍경이 그대로 보였다.
“다음은 너다. 러스트.”
“그건 그쪽을 먼저 끝낸 다음 이야기지 않을까?”
“!”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형만이 급하게 거리를 벌렸다.
망가진 관절을 억지로 움직인 용주는 기괴한 모습으로 땅을 짚고 있었다.
머리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너덜거렸고, 룬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카각…!”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목을 꺾는 용주.
지면에서 흘러 들어온 그림자가 다시 한번 용주를 잠식했다.
네 발로 땅을 짚은 용주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저건 대체….’
지면을 찬 용주가 폭발적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용주의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져 있었다.
‘언노운의 유해를 함께 갈아 넣었던 건 이걸 암시했던 건가?’
난해하단 생각이 들었다.
왜 녀석의 모습으로 저런 걸….
괴물을 모습을 형상화하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으면 됐었을 텐데.
뭔가 노림수가 더 있는 걸까?
“카…각!”
거칠게 몰아붙이는 용주와 그걸 전부 받아 내는 형만.
오른쪽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용주의 움직임은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챙!
사방으로 튀는 거친 불길.
반동에 튕겨 물러나던 용주가 허공을 찼다.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용주는 그대로 지면을 강타했다.
먹물처럼 솟구쳐 오른 그림자는 주변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었다.
“보여 줄 건 다 보여 준 거냐?”
검에 의지해 공격을 버텨 낸 형만이 몸을 일으켰다.
형만의 몸 여기저기는 엉망으로 찢겨 있었지만,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럼 이번엔 내 차례군.”
해일처럼 터져 나가는 푸른 불꽃.
“헬 플레어!”
같은 스킬이었지만, 이번 헬 플레어의 위력은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열파의 해일에 삼켜진 용주는 열기와 바람에 밀려 한 걸음도 더 다가서지 못했다.
스킬의 위력은 거기서 한 걸음 더 진화했다.
촉수를 변이시킨 용주가 지면에 몸을 고정시켰다.
부유석 아래로 파고든 용주의 꼬리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카각…!”
형만이 한 걸음 더 빨랐다.
강렬한 폭발과 함께 터져 나간 열파는 동그란 링을 만들며 퍼져 나갔다.
마치 행성의 마지막을 보는 것 같았다.
지면은 더 이상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했고, 두 사람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찢어 주마! 너의 망상을!!”
저 아래에 용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보다 더 아래쪽으론 지하철 역사를 비롯한 수많은 잔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용주의 머리 위로 떨어진 형만이 그의 가슴에 대검을 욱여넣었다.
푸른 화염을 두른 대검은 갑옷과도 같은 용주의 갑피를 부숴 버렸다
“카각…!”
고통의 몸부림치는 용주.
네 개의 촉수로 형만을 꿰뚫으며 반격에 나선 용주였지만, 형만은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추락에 수많은 잔해들이 부서졌고, 날개 없는 추락은 영원할 것처럼 계속되었다.
참방거리는 물소리.
마침내 지면에 닿은 형만이 몸을 일으켰다.
그만한 높이에서 추락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은 적었다.
용주의 모습은 한 줌 재가 되어 있었다.
고개를 든 형만은 시야를 조금 더 넓게 가졌다.
회색보다 더 어두워진 풍경은 어둠이 좀 더 가까워져 있었다.
지금까지 보였던 도시의 잔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거라고는 발목까지도 오지 않는 물이 전부였다.
동굴 속에 들어온 듯 물소리는 음산하게 메아리쳤고,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공기는 차갑고 축축했다.
“보여 줄 건 다 보여 줬냐고 그랬지?”
간담을 서늘케 하는 목소리.
속삭이듯 스쳐 가는 인기척에 형만이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스쳐 간 러스트의 그림자는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나의 망상을 찢을 거라고.”
반대편에서 사라지는 같은 목소리.
온 신경을 집중한 형만은 대검을 휘둘렀다.
“!”
순간, 크게 흔들리는 형만의 동공.
급하게 멈춰선 형만의 검끝이 바르르 떨렸다.
눈앞에 있는 이는 러스트가 아니었다.
용주도 아니었고.
눈앞에 있는 이는….
“그럼 한번 찢어 보지 그래? 조금 전에 하셨던 것처럼.”
박건우.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이었다.
“얕보지 마라.”
이를 간 형만이 힘껏 대검을 내리쳤다.
단단하다 여겨졌던 지반은 유리창처럼 깨져 나갔고, 형만은 또 한 번 추락했다.
아래로 보이는 풍경 속에 나무로 된 문이 일자로 정렬하는 게 보였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은 형만의 추락에 맞춰 열렸다.
반대편엔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문, 문, 또 문.
거울 속 거울을 바라보는 듯 같은 풍경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보였다.
* * *
“여보. 여보? 형만 씨!”
조금씩 되돌아오는 시각과 청각.
눈을 부릅뜬 형만이 왼손을 휘둘렀다.
순간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놀란 듯 넘어져 있는 러스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형만은 주변을 살폈다.
여긴 부서진 세계도 아니었고, 얕게 물이 깔린 동굴도 아니었다.
지금 있는 곳은 눈에 익은 공간.
여긴….
자신의 집이었다.
“왜 그래? 무슨 악몽이라도 꿨어?”
몸을 일으킨 러스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가벼운 평상복 차림의 그녀는 깨진 유리 조각을 줍고 있었다.
“무슨 장난이냐, 이건?”
형만의 입술을 타고 피가 흘렀다.
앙다문 그의 입술은 이빨에 짓눌려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역시 안 좋은 꿈 꿨나 보네. 하긴, 피곤했을 만도 하지.”
“이런다고 내가 흔들릴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
“아빠?!”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온 건우는 놀란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최악이군.”
“엄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러스트에게 바짝 붙은 건우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형만이 휘두른 왼손 한 번으로 거실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별일 없었어. 그냥 아빠가 안 좋은 꿈을 꾸신 모양이야.”
“오른팔을 두고 오신 꿈이라도 꾸신 거예요?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
고개를 숙이는 건우의 모습에 형만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표정, 말투, 목소리, 거기에 행동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끔찍할 정도로 똑같았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다 소망했던 그 풍경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바로 저곳에….
“이 팔은 그런 곳에 두고 오지 않았다.”
마음을 억누른 형만이 화염을 뿜어냈다.
가구에 옮겨붙은 불길은 집안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아… 아빠?!”
“형만 씨!”
놀란 두 사람의 반응에 형만은 더욱 맹렬하게 불길을 쏟아 냈다.
현실이 아니었다.
이건.
이건 끔찍한 악몽일 뿐이었다.
“당연한 듯이 현실을 왜곡하지 마라! 이 팔은…!”
대검을 휘젓는 형만.
온 집안을 삼키던 불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현실이 아니면 어때?”
책장을 넘기듯 손을 움직인 러스트가 물었다.
불길에 삼켜졌던 모든 것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제야 그 싸구려 연극을 그만둘 생각이 든 거냐?”
“끔찍한 현실보다, 망상 속이 훨씬 행복하다면, 굳이 현실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대답할 가치도 없는 궤변이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잠시 진득하게 눈을 감았던 러스트가 거실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여기라면 모두 함께 있을 수 있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도, 네가 그리워하는 사람도 함께 있을 수 있어.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봐. 정말 여기서 깨고 싶냐고.”
“여기 있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지만 네가 보고 싶어 하던 풍경이잖아. 네가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평범한 일상이잖아.”
“…누구 마음대로 그걸 결정짓는 거냐? 네가 뭔데?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알 수 있어. 왜냐면….”
무언가를 말하려던 러스트가 말끝을 흐렸다.
“너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
“넌 아무것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지. 난 혼자 남겨져 본 적이 없으니까.”
잔잔한 호수 같던 러스트의 눈동자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뒷짐을 쥐고 걷던 러스트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실이었던 풍경은 벚꽃이 만개한 호수 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라면, 행복할 수 있어.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옆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녀에게로 벚꽃잎들이 날아들었다.
쏟아지는 벚꽃들은 마치 두 사람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여기라면, 함께 있을 수 있어. 네가 기억하는 일은 그냥 지독한 악몽이었을 뿐이었던 거야.”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 러스트가 형만의 곁을 걸었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그녀였건만.
그녀는 전혀 형만을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
“그만….”
형만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보고 싶었잖아. 듣고 싶었잖아. 만지고 싶었잖아.”
“그만…!”
“나랑 함께 있자. 여기 행복한 세상에서.”
“그만하란 말이다!!”
형만이 발산한 열파가 공원 전체를 흔들었다.
푸르렀던 나뭇잎과 잔디들이 순식간에 메말랐고, 범람한 호숫물이 벤치를 덮쳤다.
“왜 그렇게 현실에 집착하는 거야? 거긴 지옥이잖아.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 뿐이잖아.”
“지옥이라도. 거기가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있던 곳이니까.”
“……!”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그 지옥이다. 사랑하는 사람조차 지키지 못한 내게 어울리는 깊고 깊은 심연 말이다.”
순간 흔들리는 러스트의 눈동자.
“아니야. 당신은….”
무언가를 말하려던 러스트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말해선 안 됐다.
그러지 않겠다고, 러스트인 채로 마지막까지 있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 않았는가.
“…그래? 그거 유감이네. 응. 정말 유감이야.”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러스트가 깊은 한숨을 삼켜 냈다.
바르게 정렬한 러스트의 손엔 레이피어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럼 어디 부숴 봐. 천국을. 네 손으로 지옥을 쟁취하는 거야.”
“그럴 생각이다.”
두 사람의 마나가 부딪치며 기류를 만들었고, 일렁이는 불과 그림자가 서로를 삼키려 으르렁거렸다.
전력을 실은 두 사람의 충돌에 공간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 * *
“애송이, 또 그렇게 부르려고 했지?”
형만의 입술을 짚은 송이가 싱긋 웃어 보였다.
“한 번 정도는 제대로 불러줄 때도 되지 않았어? 저번에 그래 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랬었던가?”
“응. 그랬었다고.”
까치발을 든 송이가 형만에게 좀 더 다가갔다.
“불러 줘. 내 이름.”
“알았으니, 좀 떨어져.”
“불러 주기 전까진 안 떨어질 거야. 오늘만큼은 나도 못 물러나.”
“…….”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형만이 고개를 돌렸다.
“…송이.
“잘 안 들리는데.”
“한송이. 됐지?”
“아까 하던 문장 처음부터 다시 해줘야지.”
송이의 투정에 형만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생일… 축하한다. 한송이.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 보내길 바라마.”
“응. 그럴 거야. 그러고 있고.”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 송이가 형만의 어깨에 고갤 기댔다.
흠칫 놀란 형만은 그런 그녀가 싫지 않은지 가만히 어깨를 내어 주고 있었다.
“그럼 이제 네 차례네? 어때? 어떻게 하고 싶어?”
창틀에 걸터앉은 엔비가 물었다.
“난…. 나는….”
고심에 찬 러스트는 잠시 말을 아꼈다.
그리고.
“그이가 기억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 지금 이 추악한 모습이 아니라.”
눈물을 보인 러스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잘 생각했어. 진심이야.”
그런 러스트에게 다가온 엔비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 * *
차원의 틈에서 튕겨 나온 형만이 바닥을 뒹굴었다.
상처투성이의 몸은 움직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방금 그건….’
머릿속에 전혀 다른 두 가지 풍경이 흘러 들어왔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자신과 송이 외엔 누구도 알 수 없을 그런 것이었다.
“…….”
몸을 일으킨 형만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치명상을 입은 러스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