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왜 말 안 했어?”
레이피어를 뽑아 든 러스트가 물었다.
빗겨 치는 화염이 지면을 덮었고, 솟구쳐 오른 그림자가 숲을 이루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길드에 말이야. 그날 날 만났다고. 같이 있던 하얀 머리 헌터 입막음까지 했잖아.”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공방은 계속되었다.
한 끗으로 모든 게 판가름날 정도로 두 사람 다 진심이었다.
“난 아무 말도 막지 않았다. 그 애송이가 말하지 않은 건, 그냥 녀석이 애송이이기 때문이지.”
“스스로는 막았잖아. 할 수도 있었는데.”
물결치는 그림자가 형만을 휘감았다.
소용돌이를 만들며 승천하는 그림자.
짙은 검은빛을 띠던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너만은 내 손으로 매듭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누구든 간에.”
소용돌이를 찢은 형만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응. 그것도 괜찮네.”
옅은 미소를 머금은 러스트가 레이피어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녀의 뒤로 떠오르는 작은 구체.
한 점에서 시작된 회전은 구체를 점차 링의 형태로 바꾸어갔다.
중심부에서 멀어진 링은 36개의 레이피어가 되어 있었다.
“망상 – 개화.”
날카롭게 내지른 레이피어를 신호 삼아 날아가는 36개의 레이피어.
“플레임 인젝터.”
레이피어를 피해 달린 형만이 불꽃을 쏘아 올렸다.
성난 사자처럼 달려드는 불길을 피해 물러난 러스트는 레이피어로 동그란 원을 그렸다.
“망상 – 낙화.”
하늘에 열린 동그란 구멍.
빛 하나 없는 그곳에서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물로 된 비는 아니었다.
지면에 닿은 빗방울은 송곳처럼 땅에 박혀 버렸다.
“플레임 월!”
머리 위를 지나는 불의 장벽을 그은 형만은 대검을 지면에 박아 넣었다.
“플레임 세츄레이션!”
연이어 작렬하는 형만의 스킬.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하늘에서 혜성처럼 화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집중포화를 받은 차원은 일그러지며 깨져 버렸다.
“대단한 솜씨네. 멋진 연계야.”
쏟아지는 혜성의 잔해를 베어 낸 러스트의 눈동자에 형만의 모습이 보였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지금….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네가 사용하는 스킬은. 내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그렇겠지.”
망설임 없이 휘두른 형만의 대검이 러스트를 베어 냈다.
“!”
순간, 검게 물드는 러스트.
먹물처럼 흘러내린 그녀의 몸은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이 녀석. 대체 언제….’
한 방 먹었다는 걸 알았을 땐 한발 늦은 뒤였다.
“망상 – 심연.”
늪처럼 천천히 형만을 잠식해 가던 그림자는 일순간 형만을 완전히 집어삼켜 버렸다.
* * *
늪 속으로 빨려 들어온 형만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추락하며 보이는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회색의 공간이었다.
텅 빈 공간은 지평선부터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세계는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부서진 시계탑이 공중을 떠다녔고, 탈선한 열차가 부유석 사이에 걸쳐 있었다.
“…….”
형만은 곧장 열차 위로 떨어졌다.
엄청난 진동과 함께 찌그러지는 열차.
열차 머리를 받치고 있던 부유석이 부서지며 열차는 순식간에 앞으로 기울었다.
70도로 기운 열차를 따라 미끄러지는 형만.
조종석 유리창을 밟고 뛰어오른 형만은 최대한 멀리 도약했다.
소리와 먼지를 일으키며 착지에 성공한 형만은 고개를 들었다.
부서진 세계의 여기저기엔 사람들의 시신과 언노운들의 사체가 여기저기 뒤엉켜 떠 다니고 있었다.
여러 건물의 잔해가 무질서하게 방황하고 있었으며, 중력과 무중력, 위와 아래 같은 구분 또한 상당히 난해하게 뒤엉켜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거랑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망상 심연.
이 공간은 사용자의 의식이 투영되는 창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며 몇 번 정도 이곳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그때 봤던 풍경들 중에 이런 부서진 세계는 없었다.
“어서 와.”
소리에 고개를 돌린 형만이 눈썹을 기울였다.
길게 이어진 길 중간에 러스트가 서 있었다.
별다른 건 없었다.
그녀가 거꾸로 뒤집혀 있다는 것만 빼면.
“처음부터 만들어진 쪽이었던 거냐?”
형만이 러스트를 인지한 순간부터 형만은 쭉 그녀를 의식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눈을 피해 이런 수를 준비할 수 있었다면, 그건 자신이 그녀를 인지하지 못했을 때뿐이 없었다.
“응.”
“이 한 수를 위해서?”
“응. 그거면 충분한 것 같지 않아?”
“…….”
확실히 여기라면 이점을 가지고 있는 이는 그녀였다.
이곳의 질서는 그녀였다.
상대가 이안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받기엔, 그녀의 능력 역시 만만치 않은 능력이었다.
‘여기서 나갈 방법이라면 있어.’
가장 간단한 방법은 더 큰 차원으로 이곳을 삼켜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이는 지금 시점에선 이안뿐일 거다.
자신은 그런 방식으론 깰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시전자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거나.
이 심연의 중심이 되는 코어를 파괴하는 것.
“뭔가 수를 생각하고 있겠지만, 다 소용없어. 네 상식도, 네 경험도 이곳에선 널 붙잡는 족쇄로 작동할 테니까.”
“……!”
붕괴하기 시작하는 다리.
정사각형의 조그마한 큐브로 분리된 다리는 더 이상 형만을 받쳐 주지 못했다.
추락 직전 뛰어오른 형만은 근처에 뒤집혀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콰앙!
그 순간 일어나는 폭발.
차 아래에서 일어난 폭발에 정지해 있던 차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계속해서 위아래가 바뀌며 회전하는 차.
한 번 더 폭발을 일으킨 형만은 차체에 대검을 박아 넣었다.
순간, 느껴지는 중력.
회전하던 차체는 러스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인페르노!”
확산하는 열파.
중심부에서 시작된 세 번의 폭발은 세 개의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좋은 시도였어. 아쉽게 됐지만.”
“…….”
일대를 덮는 강렬한 열기 속에서 형만이 대검을 뽑아냈다.
그만한 폭발에 휘말렸음에도 차는 폭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분명 러스트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차체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철근에 관통당한 채로 말이다.
‘쯧….’
순간 미간을 구긴 형만이 감정을 삼켜 냈다.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이 고통스러운 감각은 무뎌지지 않았다.
‘확실히 여기서 상대하는 게 쉽지만은 않군.’
고개를 든 형만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차체를 관통한 붉은 철근이 동그란 원통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에 불과하던 철근은 이제 41개가 되어 있었다.
“처음 잡힌 모양이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순식간에 찌그러진 철근들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깡통처럼 구겨진 철 뭉치는 이윽고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부서진 종탑 꼭대기에 착지한 형만은 몸을 일으켰다.
댕~!!
순간 들려오는 종소리.
똑바로 서 있던 종탑이 빠른 속도로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완전히 90도로 기운 종탑.
경사면을 타고 미끄러지던 형만의 머리 위로 엄청난 양의 물보라가 쏟아졌다.
물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종.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물이 쏟아질 것 같은 물건이 아니었다.
저기 물이 담겨 있었더라면, 이미 쏟아졌어도 옛날에 쏟아졌을 테니까.
폭포수를 타고 떨어진 형만은 한 부유석 조각 위에 떨어졌다.
지금껏 밟았던 다른 것들보다 월등히 큰 크기의 조각이었다.
‘코어는 어디 있는 거지?’
여기서 탈출할 두 가지 수단을 모두 강구하고 있던 형만이었다.
이 안에서 러스트를 쓰러뜨리는 건 역시 쉽지 않았다.
다른 한쪽이라고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코어라 짐작할 만한 물건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그런 물건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떡하니 둘 리가 없겠지.
‘어딘가 숨겨 놨다면, 전부 부숴서라도 찾아 주겠어.’
왼발을 반 발 무른 형만이 불타오르는 대검을 휘둘렀다.
“버닝 리전 (Burning Region).”
지면에서 솟구치는 크고 작은 불기둥들.
그 속에서 일어난 불사조들이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보라색의 혜성 꼬리가 잠시 머물러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불사조들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폭발에 날아간 잔해가 유성우처럼 쏟아졌고, 불에 타 까맣게 변해 버린 사람과 언노운의 시체가 떨어졌다.
“코어를 찾고 있는 모양이네. 그렇지?”
형만이 딛고 있던 대지가 순간 180도 뒤집혔다.
보고 있던 모든 것이 뒤집혔지만, 형만은 추락하지 않았다.
딱히 어떤 수를 쓴 건 아니었다.
마치 이게 정방향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마 쉽진 않을 거야.”
잔해와 잔해 사이를 타고 넘은 러스트가 가장 큰 불사조를 꿰뚫었다.
화염을 잠식해 가는 검은 그림자.
열기를 잃고 추락한 불사조들은 알의 형태가 되었다.
“이렇게 나올 거란 생각 정도는 나도 했으니까.”
그림자에 짓눌린 불사조의 알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다른 불사조들에게 위기가 다가온 건 그와 동시였다.
자신들이 파괴했던 수많은 잔해들이 순식간에 그들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화염을 덮은 잔해들은 동그란 구를 만들었다.
그림자에 잠식당한 구체는 급격하게 수축하며 추락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래로 추락한 불사조들은 다신 날아오르지 못했다.
속도를 높인 형만은 타일 끝에서 도약했다.
러스트와의 거리를 단번에 좁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
도약과 동시에 눈앞에 타일이 보였다.
수많은 시체들이 즐비해 있는 타일 끝에는 뛰어오르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눈에 익은 복장의 사내는 한쪽 팔이 없었다.
‘여기서 쉽게 내보내 줄 생각이 없나 보군.’
제자리로 돌아온 형만이 검을 고쳐 잡았다.
불타 버린 수많은 시신 중 일부가 일어나고 있었다.
액체가 되어 흘러내린 시신들은 하나로 모여들었다.
“이제부터 널 상대하는 건 내가 아니야.”
입을 쩍 벌린 시신이 러스트의 목소리를 냈다.
“너는 과연 상대할 수 있을까? 너는 과연 죽일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시신이 웅덩이 속으로 녹아내렸다.
이윽고 일어나는 거친 폭발.
“웃기지도 않는 장난이군.”
물보라 속에서 일어난 걸 목격한 형만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림자가 흉내 내고 있는 건.
누가 봐도 용주였다.
룬검을 뽑아 든 용주는 빠르게 거리를 좁혀 왔다.
어떤 잔재주도 부리지 않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돌진이었다.
“내가 고작 이딴 거에 흔들릴 거라고 생각한 거냐?”
용주의 룬검을 손쉽게 받아 낸 형만이 힘으로 그를 쳐올렸다.
“플레임 인젝터!”
승천하는 거대한 불길.
용주를 집어삼킨 불길은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불길 속에서 내던져진 용주는 쓰레기마냥 지면에 추락했다.
그런 용주를 보는 형만의 눈엔 어떠한 자비나 동정심도 묻어 있지 않았다.
“플레임 세츄레이션!”
대검을 지면에 박아넣은 형만은 왼손으로 용주를 겨눴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용주는 지면에 룬검을 박아 넣었다.
작렬하는 혜성과 그 사이를 질주하는 본 드래곤.
불과 얼음의 충돌이 만든 안개는 사방을 하얗게 물들였다.
“…….”
심하게 제약된 시야.
온 신경을 곤두세운 형만은 소리에 반응했다.
날카롭게 세운 손톱이 형만의 눈앞을 지나고 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는 모양이군.”
날카롭게 변이된 건 손톱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찢으려 달려드는 용주의 이빨 또한 인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거냐?”
지면을 타고 흐른 얼음의 물결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솟구쳤다.
“!”
기회를 잡았다 생각했던 용주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형만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 소원대로 해주지.”
인기척에 반응한 용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용주의 입을 관통하는 거대한 대검.
머리를 관통당한 용주는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헬 플레어!(Hell Flare)”
두 사람을 중심으로 확산하는 푸른 화염.
빠르게 상승한 온도에 안개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곳곳에 남아 있던 얼음들이 곧장 수증기로 바뀌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푸른 대지는 아름다웠지만, 끔찍할 만큼 치명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