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아아아~ 그랬었지. 그 땍땍거리는 계집애랑 건방진 꼬꼬마 뒤에 있던 병풍 세트들. 기억났다.”
성덕이 귀찮은 듯 이야기했다.
용주와 서윤이 하도 길길이 날뛰어서 상대적으로 기억이 잘 안 났다.
“병풍이라니. 한 줄 평치곤 충격적이네요. 아무튼 그것보다 저 사람부터 구해야죠. 분명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요.”
“너희 같은 꼬꼬마 녀석들이 뭘 하겠다고 설치고 있는 건데? 너희 주제를 알아야지.”
성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급한 주원과 달리 그에게서는 다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요! 일단 사람부터 구하고 봐야죠!”
“아아~ 포기해 저 녀석 이미 글렀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분명 아직….”
“쯧쯧. A급 헌터의 감이란 거다. 너희 같은 하룻강아지들이 뭘 알겠어?”
손가락을 젓는 성덕에게 식물의 열매들이 날아왔다.
모래의 장벽을 일으킨 성덕은 순식간에 무대를 둘로 갈라놓았다.
벽의 반대편에선 연속적인 폭발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 주변에 있는 검들은 혹시 전부 헌터들이 소유하던 것이오이까?”
“딱 보면 몰라? 머리는 장식으로 달렸나 보지?”
“이렇게 많이 죽었다고요? 고작 한 사람한테?”
주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전에 그리드에게 베였던 복부가 다시 아파 오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저자가 강하다면, 과연 맞설 수 있을까?
“아아~ 주제도 모르고 달려든 불나방들이 태산이였어. 너희 꼬꼬마들처럼.”
“그 말은?”
“정의감인지 사명감인지 몰라도 자기가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아는 한심한 놈들 천지였지. 요즘 것들은 개나 소나 자기가 다 주인공인 줄 안단 말이야. 웹툰이니, 웹소설이니, 만화니 그런 정신 나간 것들이나 달고 사니까 그런 거 아니야?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다고.”
한심한 눈빛으로 세 사람을 바라본 성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너희들뿐인 거냐? 땍땍거리는 계집애랑 건방진 꼬꼬마는?”
“용주 오빠랑 서윤 언니라면, 저희보다 한발 앞서서 움직였어요. 지금쯤이면 아마 역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음…. 그래? 그럼 여긴 너희뿐이란 소리인가?”
“네? 아… 네.”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낀 예나가 말끝을 흐렸다.
“괜찮아요! 용주 형이랑 서윤 누나 없어도!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저희도 손가락만 빨고 있진 않았다고요!”
공포를 용기로 바꾼 주원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대단한 자신감이네. 좋아. 그럼 이 몸이 특별히 힘 한번 팍 실어 주지.”
성덕의 마나에 반응한 모래 병사들이 일렬로 일어섰다.
“오성덕 헌터?!”
“!”
순간, 세 사람을 밀고 나가는 모래 병사들.
갑작스럽게 밀쳐진 주원과 예나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이까?”
두 다리를 깊이 뿌리내린 금화가 전력으로 힘에 저항했다.
수라 강림을 발동한 상태였음에도 버티는 게 쉽진 않았다.
“역시 다른 두 녀석들보단 낫네. 나이를 헛먹진 않은 모양이야.”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소!”
“뭐 하긴? 너희한테 힘을 팍 실어 주고 있잖아. 이 몸이 그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되도 않는 말장난을…. 대체 무슨 속셈인 것이오이까?!”
뒤로 도는 데 성공한 금화가 힘으로 병사를 밀쳐 냈다.
밀리기만 하던 금화의 몸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 정도 마나치곤 제법이네. 칭찬할 만한 근성이야. 하지만.”
성덕의 손에서 흘러내린 모래에서 두 명의 모래 병사가 더 일어났다.
“특A급 헌터인 이 몸 앞에선 그저 햇병아리의 발악일 뿐이지.”
힘을 합치는 세 명의 병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던 금화 역시도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밀려났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제 겨우 한 장 남았어. 이걸로 녀석을 완전히 파멸시키고, 난 온전한 그녀와 다시 만나는 거야.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사랑해 주는…. 송이를.”
성덕의 손짓에 굳게 닫혀 있던 모래 벽이 활짝 열렸다.
입을 벌린 식충 식물들은 소화액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월영식 – 적(赤).”
모래 벽 바깥으로 밀쳐진 주원이 발도술을 펼쳤다.
반듯하게 잘려 나가는 식충 식물들.
주원의 검기는 곧장 팬텀을 향해 날아갔지만, 목표한 것을 이루지는 못했다.
입을 벌린 세 개의 식물이 방출한 브레스는 주원의 공격을 완전히 상쇄시켜 버렸다.
“굉장한 속도였지? 그치? 제대로 힘 받았어.”
참았던 숨을 내쉰 주원이 물었다.
“태평하게 그런 소리 할 때야? 농담할 때가 아니잖아, 오빠.”
버티를 곁에 둔 예나가 핀잔을 주었다.
사람이 사람이니 설마 싶지만서도.
아무리 그래도 이게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응? 농담?”
“오빠, 설마 진심이야?”
“응? 뭐가?”
“저 아저씨 아무리 봐도 수상하잖아! 방금 그것도 그래! 그건 우릴 도와 준 게 아니라….”
예나가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때.
두 사람이 딛고 있던 바닥이 심하게 꿀렁거렸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예나를 붙잡은 주원은 버티의 어깨에 올라탔다.
지면을 덮고 있던 거대한 넝쿨들은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버티!”
예나에 외침에 버티가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싹 태워 버려!”
인형의 골조 안에서 응어리지기 시작하는 화염.
지면을 향해 화염을 뿜어낸 버티는 일직선상에 있는 모든 식물에 불을 질렀다.
이전까진 사용할 수 없었던.
예나의 새로운 힘이었다.
“이야~ 대단한데? 처음 사용했을 때보다 더 화끈하잖아?”
“그렇게 태평한 소리 할 때야? 또 온다고!”
지면에서 솟구치는 식충 식물을 마주한 주원은 아래로 뛰어내렸다.
“월영식 – 청!(靑).”
등 뒤로 바짝 당긴 검과 함께 회전하는 주원.
푸른 궤적을 그리며 낙하한 주원은 그대로 식물의 입속으로 떨어졌다.
머리부터 이어진 긴 상처는 땅에 닿아서야 끝이 났고, 한 면이 기다랗게 찢긴 식충 식물은 상처 반대편으로 쓰러졌다.
그때.
치링! 치리링!
철 미늘 소리와 함께 금화가 모래 벽 밖으로 내던져졌다.
세 명의 병사가 미는 힘은 다른 두 사람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기에, 금화는 두 사람보다 훨씬 더 멀리 날아가 버렸다.
“고구마 아저씨!!”
금화의 머리 위로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
양쪽에서 떨어진 거대한 나무 기둥이 금화를 덮쳤다.
교차하며 떨어졌던 나무 기둥은….
힘에 나부끼며 반대편으로 넘어가 버렸다.
“아저씨!”
“문제없네. 깔리기 전에 쳐 냈다네.”
금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닫힌 모래의 벽을 타곤 식물의 장벽이 쌓이고 있었다.
“저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돼요. 왜 갑자기 이런 일을.”
예나가 말끝을 흐렸다.
혼란스러웠다.
A급 헌터가 왜….
뭔가 수상하단 건 느끼고 있었는데….
“도망갈 길을 만들려는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네. 상상하고 싶지 않네만,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
“최악의 경우?”
“우리가 도착했을 때 우리가 목격했던 장면을 떠올려 보게.”
같은 풍경에 있던 세 사람.
팬텀에게 누군가 당하는 와중에도 성덕은 그저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구할 의지가 있었다면, 충분히 행동할 수 있었을 위치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협력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팬텀은.
여기 있는 식물들은.
그를 전혀 위협하고 있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확실히 저도 뭔가 이질감이 들긴 했었어요.”
“어쩌면, 아군이라 생각했던 자가 가장 치명적인 적이었을지도 모르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도 그거면 더 쉽게 설명이 될걸세.”
“그럴 수가….”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길드 내부에.
그것도 A급 헌터 중에 팬텀이 있었다니.
“그렇지만 저 아저씬 우릴 구하려고 게이트에 왔었는데….”
“게이트 안쪽으로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이라고도 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네만, 어쩌면 우리 때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 거기서 뭔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을 수도.”
“거기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걸세. 어쨌든 지금 당장부터 해결해야 하네. 마음 단단히 먹게나. 저자는 우릴 죽이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으니.”
금화의 아이라인을 따라 짙은 검은색의 문양이 칠해졌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열세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여기서부턴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쓰러뜨리지 못할지언정, 결코 쓰러질 수는 없었다.
* * *
“게으른 녀석. 그러게 빨리빨리 좀 하지. 하여튼 요즘 것들은 느려 터져가지곤.”
불만을 표한 성덕이 고개를 저었다.
“왜 하필 슬로스 녀석을 붙여준 거야? 엔비나 좀 더 싹싹하고 빠릿빠릿한 녀석을 붙여 주지.”
아무리 생각해도 파트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 녀석이 ‘마지막’이라고 직접 말해 줬다는 것.
형만을 무너뜨릴 계획도.
여기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그랬다.
“일이 끝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라고 그랬지.”
그 계획이란 게 뭔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녀석이 그렇다고 말한 이상 그건 실현된 현실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계획을 완수하지 못한 건 끝내 아쉽지만.
와인을 들기엔 충분하겠지.
“그나저나 정말 잘도 손 써뒀네.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야.”
긴급 상황인 걸 감안해도 지금 현장에 도착한 A급 헌터들의 숫자는 몇 되지 않았다.
미리 손을 써두겠다는 그의 말은 이미 실현되어 있었다.
“병원이나 학교 같은 주요 대피 시설의 보호, 그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지정해 줬던가? 흥! 정말이지. 치밀하단 말이야. 터무니없을 정도로 완벽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전지적 시점에서만 보이는 완벽함이란 게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야말로 바로 그 완벽함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 짓을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이다음 일부턴 들은 게 없는 것 같은데.”
그 녀석이 직접 움직인 일이니 다 계획이란 게 있겠지만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때.
“…뭐지?”
고개를 돌린 성덕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 갔다.
순간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었다.
“이건… 박형만?”
착각이 아니었다.
녀석이 지금 여기 와 있었다.
“그래. 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지.”
모래를 일으킨 성덕이 하늘길을 열었다.
길게 이어진 모래는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 녀석한텐 손대지 말라고 내가 말해 두긴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모래의 파도를 일으킨 성덕이 발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정돈 상관없잖아. 그렇지?”
엔비한테 받은 것도 있으니 눈에 띌 염려도 별로 없었다.
마침 지루하던 차에 잘되지 않았는가?
완벽한 녀석의 계획이니 분명 이 일도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남은 건 네가 적당히 처리하라고. 젊은 게 그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저기 상황을 보면 대략 가늠할 수 있겠지.
형만을 파멸시킬 수란 게 대체 무엇인지.
* * *
“가면은 이제 필요 없는 거 아니냐, 애송이?”
형만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맞은편엔 검은색 원피스 차림의 러스트가 있었다.
“응. 그것도 그렇네.”
가면을 벗은 러스트가 가면을 내려놓았다.
여기 있는 이는 이 둘이 전부였다.
“이형 워프 장치에 영향을 준 건 너인 모양이지?”
“응.”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했나?”
“다른 곳으로 보냈어.”
“그렇다는 건 의도적으로 날 여기로 불렀단 거군.”
“응.”
“왜지?”
“매듭을 지을 때가 왔다고 생각해서.”
“가장 잔인한 모습으로 말이냐?”
형만의 목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응. 이 모습으로. 왜냐면 이게 나니까.”
순간 점화된 불길이 사방을 물들였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지난번과 달리 형만의 눈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지난번처럼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 마라. 두 번은 없으니.”
“도망갈 생각 없어. 너랑 나. 여기서 하나는 사라지는 거야.”
“그럼 사라지는 건 너겠군. 애송이.”
피어오르는 짙은 화염.
깊은숨을 내쉰 형만은 폭발적으로 거리를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