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이제 그만하기로 한 거냐?”
수호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수호의 주변은 광장처럼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그건 수호 주변에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생긴 원의 바깥쪽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 녀석. 물러난 모양인데, 다른 녀석이 데려간 건가?”
그리드와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엔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강대한 언노운의 기운을 뿜어낸 건 분명 그 녀석일 것이다.
“이제 그만 나오지 그러냐? 거기서 보고 있단 거 알고 있으니까.”
고개를 든 수호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꽤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수호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땅을 딛는 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점점 수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예리하시네요. 안 들킬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말이에요.”
모습을 드러낸 나은이 이야기했다.
수호는 나은을 경계하는 듯 보였지만, 나은은 수호를 전혀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아신 건지 혹시 여쭤 봐도 될까요?”
“그렇게 대놓고 언노운들을 찍어 죽이며 다니는데, 모르면 더 이상하지. 날 바보로 생각하는 거냐?”
“아…. 그거 때문이었군요.”
나은이 뺨을 긁적였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움직이고 안 들킬 거라고 확신한다니. 바보 아니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수호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머금었다.
“근데 넌 정체가 뭐냐? 헌터? 팬텀은 아닌 것 같고.”
“음…. 지나가던 보통 수녀라고나 할까요?”
“하! 그래? 요즘 수녀들은 언노운 정도는 쉽게 처리하나 보지? 왜 이참에 헌터 길드도 하나 차리지 그래?”
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정도껏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속는 척이라도 해주지, 이거야 원.
“내 영역 안에서 잘도 날뛰던데, 아주 불쾌하게 말이야.”
“아~ 보통은 못 움직이는 게 정상인 모양이죠?”
“못 움직일 거야 없지만, 그렇게 날뛰진 못하는 게 보통이지.”
“아하, 그렇군요. 하나 배웠네요.”
“…….”
수호가 불쾌함을 내비쳤다.
이 녀석도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힘에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다.
“헌터들 중에도 기운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녀석이 있었지. 너도 그런 녀석들 중 하나인 거냐?”
대표적으론 지난번에 만났던 수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이 녀석처럼 완벽하진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은 일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음…. 아니요. 아쉽게도 아니에요. 정말로 전 헌터가 아니니까요.”
“하! 아직도 그 말도 안 되는 수녀 타령을 할 생각인 거냐?”
“말이 안 된다고 하셔도 사실인걸요. 제가 헌터가 아닌 것도, 제가 수녀인 것도.”
“헌터가 아니다. 그런 녀석이 잘도 여기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구만. 하! 무슨 컨셉인진 몰라도 제정신은 아니군.”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나은이 싱긋 웃어 보였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그녀의 물음에 수호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제가 생각하는 게 맞죠? 당신의 소속, 그리고 정체 말이에요.”
“흥! 다 안다는 것처럼 말하기는. 그냥 보고 읽고 넘겨짚은 주제에.”
수호의 안대엔 TF의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소속이 어딘지 맞추는 건 3살짜리 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말 그럴까요?”
“…….”
“제가 여기 온 건 이질적인 현상을 목격했기 때문이에요. 영향은 있는데, 그 근원이 되는 건 좀처럼 관찰할 수가 없었거든요.”
“영향?”
“이 주변에 이것들이요. 잘린 흔적은 있는데 가위가 안 보이면 당연히 이상한 거 아니겠어요?”
‘가위라고…?’
수호가 팔짱을 끼었다.
이 녀석.
확실히 다른 녀석들이랑은 뭔가 달랐다.
“원래는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어요. 갑자기 언노운이 나타나면서 일이 틀어져 버렸지만요.”
고개를 돌린 나은이 보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던 언노운들은 한 줌 고깃덩이로 변해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신가요? 팬텀이 타깃인가요? 아니면 헌터 중 누군가가 타깃인가요?”
“평범한 수녀가 물을 질문은 아니라고 보는데?”
“보통 수녀는 물어볼 수도 있죠.”
“하!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군. 내 목적이 뭐든 너랑 상관없는 일이다. 신경 꺼.”
“그럼 그건 당신의 의지인가요? 아니면 TF의 의지인가요?”
“너랑 상관없는 이야기래도.”
“TF의 두 사람은 도시를 빠져나가려 하고 있던데, 그들의 목적은 당신과 다른 건가요?”
“…….”
마지막 물음에 수호가 잠시 말을 아꼈다.
이 녀석이 방금 했던 말은.
그 둘이 누군지 모르는 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이. 보통 수녀.”
“네. 듣고 있어요.”
“어떻게 그 두 녀석이 테스크 포스인 걸 아는 거냐?”
“아….”
당황한 듯한 나은의 목소리.
“너 그 두 녀석이 누군지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역을 기준으로 일대는 작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나름의 힘을 가진 헌터들이 언노운과 충돌하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팬텀과 교전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두 사람을 정확히 짚어 냈다.
우연이라 하고 넘어가기엔 너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아….”
나은이 고개를 돌렸다.
TF의 쌍성.
두 사람은 자신이 TF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도 있던 사람들이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기에 당연하게 물은 질문이었는데.
그게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곤란하게 됐는데, 이거.’
자신은 공식적으로 사라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겐 서진과 했던 약속이 있었다.
언노운을 제거하고, 사람들을 구하고, 게이트를 닫는 건 그 약속과 관련 없는 일이었지만.
이건 그것과는 또 별개의 일이었다.
과연 여기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게 맞는 일일까?
“말해.”
기회를 잡은 수호가 나은을 몰아세웠다.
그때.
“!”
무언가를 감지한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아야야, 아파라.”
포탈에서 튕겨 나온 주원이 뒷머리를 어루만졌다.
뭔지 모를 충격에 날아간 주원은 불행하게도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괜찮아, 오빠?”
“어떻게든 그런 것 같네.”
벽면을 타고 미끄러진 주원이 몸을 일으켰다.
“방금 그거 예나도 느꼈어?”
“응. 뭔가에 가로막힌 것 같은 거 말하는 거지?”
“전에도 이랬었던가?”
“아니. 그때는 이런 거 없었어.”
고개를 저은 예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있는 사람은 자신과 주원.
그리고 저기 오고 있는 금화가 전부였다.
“다른 두 사람은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갔나 보구려.”
두 사람에게 다가온 금화가 이야기했다.
“혹시 마나가 약한 우리만 튕겨 나온 건 아닐까?”
예나가 한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여기 없는 사람은 승우와 형만.
각각 B급과 A급이라는 마나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렇지만 전에 했을 땐 수지 누나도 우리랑 똑같았잖아? 승우 형도 그렇고.”
“음….”
“고민하는 것도 좋네만 일단 움직이는 게 어떻겠나? 두 사람이 목적지에 먼저 도착했다면, 금방 합류할 수 있을 걸세.”
금화의 제안에 두 사람 모두 동의를 표했다.
도심을 거닐던 주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노운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누가 여기로 먼저 지나갔나 봐.”
언노운들의 생김새는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근데 여기, 조금 이상하지 않아?”
“응? 뭐가?”
“저기 봐봐.”
주원이 예나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예나가 가리킨 곳은 한 건물.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건물은 식물에 잠식되어 있었다.
언노운의 유해에만 정신이 팔렸던 주원이 완전히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저기도. 그리고 저기도.”
진행 방향을 따라 그런 건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처음 건물에 비해 잠식된 범위나 수준도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게. 예나 말대로 뭔가 이상한데. 언노운이 한 짓일까?”
식물의 잠식은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년 동안 버려진 유적지면 모를까.
서울 한복판이 자연적으로 이렇게 됐을 리가 없지 않은가.
“으아악!!”
주원이 의문을 표한 그때.
날카로운 사람의 비명이 귀를 찢었다.
“비명?!”
“저쪽이야!”
몸이 먼저 반응한 주원이 식물에 잠식된 도시 중심부를 향해 달렸다.
소리에 다가갈수록 도심의 잠식은 점점 심해졌다.
건물만이 아니라 도로까지 무성한 식물들에 잠식되어 있었다.
♪
속도를 높이던 세 사람의 귀에 이번엔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바이올린?”
예나가 듣기에 이 소리는 바이올린의 소리와 가장 비슷하게 들렸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튜닝이 잘못된 느낌은 아니었지만, 바이올린이라기엔 소리가 조금 이질적이었다.
“저쪽인가?”
모퉁이를 돈 주원이 넓은 대로로 나갔다.
소리는 분명 이 앞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걸음을 멈춘 주원이 소리의 진원지를 올려다보았다.
동그란 원형의 광장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사내.
거대한 식충 식물에 삼켜져 발만 보이는 사람.
그리고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내.
이렇게 3명이었다.
세 사람 중 한 명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오성덕.
분명 A급 헌터였던 그 사람이었다.
“사람을… 먹고 있잖아?!”
주원의 초점이 순간 흔들렸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린 주원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금방 구해드릴게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주원.
“월영식 – 적(赤).”
호흡을 가다듬은 주원이 단번에 검을 뽑아냈다.
부러졌던 그의 검은 다시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붉은 검기는 식충 식물의 목을 잘라 냈다.
추락하는 머리.
입을 벌린 또 다른 식충 식물은 추락하는 머리를 곧장 받아먹었다.
더 큰 식물에 먹힌 사람의 다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암~ 저건 또 뭐람?”
연주를 멈춘 사내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사내가 들고 있는 바이올린은 나무로 되어 있지 않았다.
바이올린을 이루고 있는 건 넝쿨 식물.
팔에 휘감겨 있는 넝쿨은 마치 피부를 뚫고 자라난 것처럼 보였다.
활 역시도 보통의 활과는 달랐다.
그의 활은 가위.
아니, 정확히는 칼 두 자루를 교차시켜 만든 유사 가위였다.
세 사람이 들었던 바이올린 소리는 칼날이 넝쿨을 그어 내며 만든 것이었다.
“뭐 이렇게 많아? 귀찮은데. 이미 귀찮음 수치가 맥시멈을 한참 넘겼다고.”
졸린 눈의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깎지 않아 덥수룩한 초록 머리는 눈을 다 덮을 지경이었다.
“오빠!”
한발 늦게 주원을 따라붙은 예나가 주원을 붙잡았다.
“왜 그래? 빨리 저 사람 구해 줘야지!”
“그건 나도 아는데, 주변을 좀 봐봐!”
예나의 외침에 주원은 그제야 시야를 넓혔다.
광장 여기저기에 검들이 버려져 있었다.
그것들의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언노운이든, 사람이든.
“이 식물들은 아무래도 저 작자의 작품인 모양이구려.”
금화가 대검을 뽑아 들었다.
식물의 주인이 저 초록 머리의 사내라면, 방금 인간을 공격한 이 역시 저 사람이란 이야기였다.
“저 사람이? 그렇다는 건 혹시….”
“아마 틀림없겠지. 저기 있는 저 사람, 역시 팬텀의 일원일 걸세.”
금화의 얼굴에 도깨비 같은 문양이 생겼다.
이 풍경이 말해 주고 있는 건 너무도 명확했다.
“에휴. 하는 수 없지, 뭐.”
눈을 비빈 사내가 성덕을 내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드는 거대한 나무 넝쿨들.
반원을 그리며 솟구친 넝쿨들은 일제히 성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넝쿨 사이를 오가던 성덕은 모래 병사를 일으켰다.
체스 말처럼 이동하는 병사를 타고 거리를 벌리는 성덕.
빠르게 이동한 성덕은 벌써 세 사람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들인 것 같은데.”
모래 병사를 부순 성덕이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팬텀한테 습격당했을 때 봤었잖아요. 병원에서도요.”
예나가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던 것치고는 그는 이상할 만큼 멀쩡했다.
어디 까지거나 쓸린 상처조차 없었고, 호흡도 너무나 평온했다.
A급 헌터의 실력이나 침착함이란 말로 이걸 과연 이해해도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