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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31화 (231/357)

231화

“…….”

서윤의 얼굴이 땅에 처박히기 직전.

재빠르게 달려온 수지가 그녀를 붙잡았다.

“흐흐흐. 인생이란 B와 D 사이의 C라고 했지. 이런 변칙적인 경우의 상황이야말로 인생의 참 묘미 아니겠어?”

찢긴 소매를 걷어 올린 그리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눈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데스 클로!”

그리드가 그은 일격이 두 사람을 향해 곧장 뻗어 나갔다.

버스를 여섯 도막 내는 날카로운 일격.

서윤을 업고 움직인 수지는 재빠르게 반응했다.

“그 친구가 다시 일어서는 건 내 입장에서 그다지 유쾌하지 않아서 말이야. 친구, 미안하지만 내려놔 줘야겠어.”

데스 사이드를 높이 들어 올린 그리드가 허공을 베어 냈다.

“툼스톤 (Tombstone).”

갈라진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석들.

비처럼 쏟아지는 비석들은 도로와 건물에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출혈이 심해.’

위협이 되는 것들을 빠르게 추려 낸 수지가 그 사이를 가로질렀다.

서윤의 상태는 일 초가 급박했다.

깨진 머리에선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고, 몸은 이리저리 쓸리고 부딪친 상처에 성한 곳이 없었다.

새로운 스킬을 사용하며 생긴 상처도 상당히 깊었다.

특히 옆구리에서 복부까지 이어지는 상처가 가장 치명적이었다.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서윤처럼 보였었지만, 그리드 역시도 손가락만 빨면서 당하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일단 시야에서 벗어나야 해.’

떨어지는 비석을 피해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수지가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에 맞고 튕기는 비석.

누적된 대미지를 폭발시킨 수지는 먼지를 연막 삼아 움직였다.

“흐흐흐. 시도는 좋았어.”

수지의 앞으로 치고 들어오는 데스 사이드.

그리드를 중심으로 펼쳐진 원형의 마법진은 보라색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체크메이트.”

음산하게 내리깔리는 보라색 물결.

땅을 흔드는 진동 속에서 나타난 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아귀였다.

여섯 개의 눈을 가진 아귀는 수백의 이빨로 수지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카각…!”

일촉즉발의 순간.

날카롭게 내리꽂힌 소리가 아귀를 덮쳤다.

크게 휘청거리는 아귀의 모습.

동시에 위를 올려다본 그리드와 수지의 눈동자엔 같은 풍경이 들어왔다.

자신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공격의 궤도를 틀어놓는 한 명의 인간.

아니.

인간만 한 크기를 가진 괴물이었다.

‘이용주….’

머리를 물고 반대편으로 넘어간 용주가 그대로 놈을 패대기쳤다.

배를 드러낸 채 완전히 뒤집힌 아귀의 몸엔 이빨에 찢긴 자국과 날카로운 무언가에 꿰뚫린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흐흐. 과연 심연. 내 체크메이트를 한 번에 녹다운시키며 등장하다니. 한마디로 어비스 (Abyss).”

용주의 모습에 그리드가 실없이 웃어 보였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인생이 즐거운 것이지. 여기서 널 만났다는 건 윤현도, 꼭두각시들도, 프라이드도 널 놓쳤다는 소리겠지. 흐흐. 재미있군.”

또 한 번 내리깔리는 보라색의 물결.

흘러 들어온 물결 속으로 잠수한 아귀는 또 한 번의 진동을 만들어 냈다.

“카각!”

칼날 같은 꼬리를 만들어 낸 용주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용주와 눈이 마주친 수지는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용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럼 이건 어떨까?”

그리드는 두 사람에게 딱히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심연이 눈앞에 나타난 이상 다른 녀석들이야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분명 저 둘이 전력을 회복하는 건 유쾌한 소식은 아니겠지만.

이 탐구심을, 이 호기심을 두고 다른 게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이것 또한 카오스지.”

“……!”

순간 느껴지는 묵직한 중력.

물속으로 빨려 들어온 용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불과 발목 정도에서 참방거리던 물이었는데.

그 안쪽은 바다 한가운데나 다름이 없었다.

‘아래로 빨려 들어온 건가.’

시야가 상당히 어두웠고, 숨이 쉬어어지지 않았다.

움직임도 자유롭지 않았다.

‘녀석은 어디에?’

호흡을 멈춘 용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야는 물론이고, 용주가 자랑하는 청각도 이곳에선 힘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물소리가 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손과 발을 변이시킨 용주는 우선 물갈퀴를 만들어 냈다.

리자드맨의 비늘을 사용해 수중을 헤집어 본 적이 있었기에 대략적인 베이스는 가지고 있었다.

물갈퀴를 만들어 낸 용주는 다음으로 꼬리를 변이시켰다.

악어의 꼬리처럼 변해 가는 용주의 꼬리.

칼날 같은 날카로움은 사라졌지만, 대신 꼬리의 곡선은 물살을 가르기에 더 용이해졌다.

그 순간.

“……!”

어둠을 가른 강렬한 일격이 용주를 덮쳤다.

용주가 녀석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 용주는 이미 녀석의 이빨 사이에 있었다.

네 개의 촉수로 놈의 악력을 막아선 용주였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순수한 힘에 있어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할뿐더러, 좌우로 고개를 젓던 녀석이 회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악어가 큰 사냥감을 먹을 때 먹이를 물고 몸을 지속적으로 빨리 회전시키는 ‘데스롤’과 유사한 행동이었다.

‘쉽게 당해 줄 수야 없지.’

네 개의 촉수에 각각 세 개의 촉수를 휘감은 용주는 촉수들을 더욱 두껍고 강하게 변이시켰다.

그리고.

녀석의 배 속에 페이탈 붐을 꽂아 넣었다.

푸와악!

강렬한 물보라와 함께 솟구쳐 오른 용주는 네발로 땅을 짚었다.

참방거리던 보랏빛 물결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쿵! 쿠구구궁!

그런 용주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비석들.

날카롭게 휘두른 데스 사이드와 손톱이 툼스톤 사이에서 부딪쳤다.

“둘을 상대하고도 이 정도 힘이 남아 있다라. 흐흐. 심연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그 밑바닥에 닿으면 뭘 볼 수 있을까?”

그리드는 분명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부딪친 용주는 알 수 있었다.

그도 상당히 지쳐 있다는 것을.

쿵!

떨어지는 비석을 공중에서 낚아챈 용주가 비석을 집어 던졌다.

포탄처럼 날아드는 비석을 피해 달리는 그리드.

“데스 클로!”

사선을 긋는 다섯 줄기의 검기는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공중을 차며 속도를 높인 용주는 정면에서 검기를 마주했다.

순간 사라지는 용주의 모습.

점멸로 검기를 흘려보낸 용주는 그 속도 그대로 지면을 내리찍었다.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 속 계속되는 공방.

지면에 낫을 끄시며 달린 그리드가 데스 사이드를 휘둘렀다.

‘마찰을 오히려 힘으로 이용하는 건가.’

공격을 맞받아친 용주가 지면 아래 박아놓았던 촉수를 단번에 뜯어 냈다.

함분폭압.

융합된 칠흑 투구를 사용했을 때 쓸 수 있었던 기술에서 영감을 얻은 전술이었다.

‘속도와 마찰을 이용한다라….’

그리드를 올려다보던 용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쩌면 녀석이 했던 것처럼 마찰을 힘으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생각한 대로 되어 준다면, 녀석에게 기습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는 것도 가능하겠지.

‘해보는 거야.’

꼬리를 머리 쪽으로 당긴 용주가 자신의 꼬리를 깨물었다.

꼬리의 모양을 다시 칼날처럼 바뀌어 있었고, 용주의 이빨은 더욱 날카롭게 변이되어 있었다.

‘최대한 붙잡는 거야.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용주의 꼬리는 벗어나려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용주의 악력은 온 힘을 다해 꼬리를 붙잡아두려 하고 있었다.

인간의 발은 손보다 몇 배의 힘을 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 지금 용주의 신체 부위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부위는 어디일까.

손? 발?

용주가 생각한 답은 바로 턱과 꼬리였다.

두 힘의 충돌에 강렬한 마찰이 일었다.

이빨에 갈린 꼬리 날은 더욱 붉게 빛나고 있었다.

“!”

팽팽하게 당겨진 꼬리 날이 날아간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폭발적으로 회전한 꼬리는 큰 원을 그렸고, 그에 따라 용주의 몸도 크게 한 바퀴 회전했다.

꼬리에 잘려 나간 아스팔트에선 열기와 함께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흐…. 흐흐흐.”

지면에 착지한 그리드가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일자로 반듯하게 잘려 나간 상처를 따라 흐르는 피는 그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심연…. 과연 그에 걸맞은 힘과 폭발력이야. 조금만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었더라면, 몸이 반으로 잘렸겠어.”

베일 거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베인 뒤였다.

구속되었던 힘에 축적된 힘은 그리드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흐…. 아쉽게 됐어.”

치명상을 입은 그리드의 발밑에 그림자의 웅덩이가 나타났다.

“너한테도 그리고 나한테도 둘도 없는 기회였는데.”

“카…각!”

지면을 부수며 달려 나간 용주는 다시 한번 꼬리를 휘둘렀다.

하지만 한발 늦은 뒤였다.

그림자에 삼켜진 그리드는 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젠장. 러스트, 또 너냐?’

용주가 감정을 실어 그리드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쳤다.

방금 그건 분명 녀석이었다.

윤현 때에 이어 이번에도….

이거야 마치 녀석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지 않은가.

‘진정하자. 일단은 그 녀석들부터.’

깊은 숨을 내쉰 수지가 사라졌던 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수지의 상태도 좋다고 말할 건 아니었지만,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서윤이었다.

두 사람의 흔적을 쫓은 용주는 광폭화를 해제했다.

서윤의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기에 추격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용주가 도착한 곳은 한 스튜디오였다.

본래라면 평범했을 스튜디오는 내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아마 그리드의 참격에 건물 일부가 잘려 나간 모양이었다.

수지의 모습을 확인한 용주는 안으로 들어갔다.

서윤은 소품으로 추정되는 쇼파에 누워 있었다.

“끝난 거야?”

수지가 물었다.

“아니. 그래도 잠깐은 숨을 돌릴 수 있을 거다.”

“응. 그렇구나.”

“그 녀석은?”

용주가 서윤의 상태를 확인했다.

여기저기 피범벅이긴 했지만, 호흡은 일단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처는 괜찮아.”

“상처는 괜찮다는 건, 다른 건 안 괜찮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용주의 머릿속에 순간 불길함이 스쳤다.

그리드는 정신적으로 상대를 지배하는 게 가능한 녀석이었으니까.

“엄청 걱정할 건 아니야. 이겨 낼 거란 걸 아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겨 내다니?”

용주의 목소리가 좀 더 거칠어졌다.

머릿속에 피었던 불안감이 더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진각성.”

“…뭐?”

거두절미한 수지의 한마디에 용주가 의문을 표했다.

그 단어가 말하는 게 뭔지는 정확히 알고 있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나가 폭발적으로 상승했었어. 새로운 스킬도 발현했고, 의식을 잃은 건 부상 때문이지만, 지금 일어나지 못하는 건 몸이 받은 부담 때문이야.”

“…진각성을 했다고? 이 녀석이?”

놀란 용주의 시선이 다시금 서윤을 향했다.

확실히.

서윤에게서 느껴지는 헌터의 기운이 전과는 달라져 있는 것 같았다.

“응. 틀림없어.”

“…그래?”

진각성이란 말에 태영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관이 안 보이던데, 너희가 처리한 거냐?”

“으응.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어. 이번에는.”

“그럼 한태영 녀석도 없었던 거냐?”

“응.”

“…….”

‘어째서’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TF의 눈이 없는 지금이라면 태영의 능력까지도 십분 활용하면서 전투를 리드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의문을 뒤로한 용주에게 한 가지 의문점이 더 생겼다.

여기 있는 건 이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TF의 선대 눈은 같이 안 있던 거냐?”

“응. 워프 장치에서 튕겨 나왔을 때 둘뿐이었어.”

‘그렇다는 건 녀석도 나처럼 다른 곳으로 떨어졌단 건가?’

일련의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가 잠잠하단 사실이 오히려 불안했다.

뭔가 일에 휘말린 게 아니라면, 그쪽에서 분명 자신들을 찾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 녀석도 뭔가 일에 휘말린 건가?’

고개를 돌린 용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팬텀을 마주친 건 자신들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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