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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30화 (230/357)

230화

그리드의 톱 해트에 손을 올린 수지가 체조를 하듯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흐흐흐. 좋은 시도였어.”

지면에 착지하는 수지를 휘젓는 데스 사이드.

자세를 바짝 낮춘 수지는 아슬아슬하게 칼날의 궤도를 벗어났다.

“재울 생각이었지? 상대가 나만 아니었어도 이것보단 결과가 나았을 텐데 말이야.”

수지를 쫓는 그리드의 일격.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수지의 돌발적인 움직임을 그리드는 정확히 쫓아오고 있었다.

“방금 거기선 검을 휘두르는 게 더 나았을 거야. 네 친구가 너한테 그랬던 것처럼.”

“…….”

수지의 눈동자에 순간 흔들림이 일었다.

분명 다 나았을 텐데.

그때의 상처에서 다시 통증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흔들리지 마. 일부러 날 도발하는 거야.’

그리드의 뒤로 파고든 수지가 날카롭게 단검을 휘둘렀다.

공격은 아쉽게도 불발.

그리드의 반격에 밀려난 수지는 전투마의 다리에 자잘한 상처를 내며 물러났다.

빠르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공방 속에 전투마엔 계속해서 자잘한 상처가 누적되고 있었다.

“블러디 레인.”

두 사람의 공방이 계속 이어지던 그때.

하늘에서 추적거리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비는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건 붉은색의 핏방울이었다.

“피?”

의문을 표한 그리드가 전투마의 앞발을 들어 올렸다.

지면을 내려친 수지의 일격에 부서진 도로는 전투마의 발굽에 또 한 번 엉망이 되었다.

“전부 보였어!”

주차된 차를 밟고 도약한 서윤이 검을 휘둘렀다.

붉게 물든 서윤의 눈동자엔 전투마의 상처 부위가 전부 들어와 있었다.

해일처럼 솟구친 피가 사방으로 찢기며 흩어졌다.

노리는 건 붉게 빛났던 상처 부위들.

날카롭게 치고 들어온 핏줄기는 전투마의 상처를 정확하게 후벼 파고 있었다.

“흐흐흐. 그래. 이걸 위한 사전 준비였던 건가?”

전투마에서 뛰어내린 그리드가 톱 해트를 눌러썼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협력할 파트너를 잘못 고른 것 같은데. 한마디로 미스 초이스.”

속도를 높인 전투마는 서윤을 향해 돌진했다.

날카로웠던 서윤의 공격에도 전투마는 다리조차 절지 않았다.

“이걸로도 어림도 없는 거냐? 거지 같네, 진짜.”

칼끝으로 피를 분출시킨 서윤은 추락하는 궤도를 살짝 뒤틀었다.

맹진해 온 전투마는 그대로 서윤을 지나쳐 버렸다.

“흐흐흐.”

그때.

발목을 당기는 힘에 서윤이 그대로 끌려갔다.

“큭… 젠장! 뭐야?!”

타오르는 고통에 서윤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발목에 타오르는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이런 게 대체 언제….’

생각해 봐야 답을 얻을 순 없었다.

발목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달리기 시작한 전투마는 점점 더 속도를 내고 있었다.

‘빨리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 해!’

허릿심만으로 상체를 일으킨 서윤이 사슬을 끊어 내려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제대로 힘이 실리지도 않을뿐더러, 사슬의 강도도 보통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끔찍한 건 지금 이 고통.

발목을 잘라 내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통증이 끔찍했다.

거기에 더해 쓸리다 못해 찢긴 피부는 서윤을 더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흐흐흐. 그렇게 쉽겐 못 보내 주지.”

수지의 앞을 가로막은 그리드가 데스 사이드를 휘둘렀다.

“폴링 소울.”

칼날에 나타나는 고통에 찬 얼굴들.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튀는 불꽃은 힘에 찢겨 흩날렸다.

치열하게 이어지는 공방 속 힘의 우위를 점한 이는 그리드였다.

가드와 회피에 주력한 수지는 집요하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수지의 무기는 그리드의 무기에 비해 리치가 한참 부족했다.

하지만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데스 사이드의 칼날은 이 안쪽까지 닿지 못했다.

다음 공격을 위한 딜레이가 짧은 것도.

공격과 동시에 생기는 빈틈이 적은 것도 이쪽.

거리가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유리한 건 이쪽이었다.

“흐흐. 의료 헌터가 최전방에서 이렇게 깊숙하게 파고든다라. 현명하지만 동시에 아이러니한 상황이야. 한마디로 카오스.”

거리를 좁힌 수지는 그리드의 명치를 후려갈겼다.

강렬한 충격에 날아가는 그리드.

자연스럽게 궤도를 꺾은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데스 사이드는 수지의 머리를 수확하려 하고 있었다.

“충분히 모았어.”

두 다리에 마나를 집중한 수지는 근육 활성도를 더욱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그리드를 따라붙는 수지.

바깥을 향해 있던 단검의 날은 수지의 눈앞에 와 있었다.

“네 공격이 널 덮칠 거야.”

칼날에 올려놓는 왼손.

순백의 검을 물들이기 시작한 검은 물결은 순식간의 검을 잠식했다.

아름다운 순백의 뱀은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는 검은 뱀으로 변해 버렸고.

칼날을 타고 나타나는 붉은 무늬에선 섬뜩한 빛이 흘러나왔다.

‘칼이 검게 변했….’

순간, 찢겨 나가는 공기.

작은 칼날에서 시작된 힘은 부채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

굉음 뒤에 찾아온 완전한 침묵.

뿌연 연기 사이로 보이는 도로는 산산조각 부서져 있었다.

부러진 가로수가 건물에 기대어져 있었으며, 버스 한 대가 저 멀리 처박혀 있었다.

“흐흐흐. 이거 놀랐는데. 한마디로 쿨. 쏘 쿨한 반격이었어.”

날아간 톱 해트를 주운 그리드가 음침한 미소를 머금었다.

입가를 닦는 소매엔 붉은 피가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축적해 놓은 대미지를 단번에 폭발시킨다. 그런 원리라고 봐도 좋은 건가, 그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힘은 예사로운 게 아니었다.

저 검이 좋은 검이라는 건 눈대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뭔가 특별한 힘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설마 이런 식일 줄이야.

“하지만 그걸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리드의 손짓에 반응한 전투마가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수지를 그대로 뛰어넘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거 놔.”

전투마의 머리 위에서 나타난 수지는 전투마의 뒤통수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추락한 전투마는 그대로 꼬꾸라졌다.

‘됐어. 이제….’

“야! 뒤에!”

서윤에게 다가가던 수지에게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힘과 고통.

충격에 날아간 수지는 그대로 땅을 굴렀다.

분명 쓰러졌던 전투마는 멀쩡하게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흐흐흐. 살아 있지만 동시에 살아있지 않은 존재. 그게 바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아니, 그리드의 체런이지.”

전투마에 올라탄 그리드가 수지와의 거리를 좁혔다.

“흐흐 다시 한번 잘 모아보라고, 친구. 다음 한 방이면 쓰러질지도 몰라.”

거칠게 공격해 오는 그리드.

반격을 이어 가려던 수지가 순간 멈칫했다.

전투마의 움직임에 딸려 온 서윤이 바로 앞에 있었다.

“왜 그래? 방금 꽤 좋은 기회이지 않았어? 흐흐흐.”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은 그리드가 데스 사이드를 휘둘렀다.

피를 머금는 데스 사이드.

찢긴 수지의 셔츠는 붉게 젖어 갔다.

‘젠장…. 젠장젠장젠장!’

차단 말뚝에 부딪친 서윤이 이를 악물었다.

치욕스러웠다.

짐짝마냥 끌려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도움이 되긴커녕 방해만 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왜 못 끊는 거야! 왜 고작 이딴 사슬 하나도 못 끊는 거냐고! 이 등신 머저리 새끼야!’

그 이상으로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조금은 성장해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힘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었다.

‘분해…!’

새 무기를 들고, 새로운 스킬을 발현시킨 결과가 지금 이 모습이었다.

폭풍우에 휩쓸린 돛단배마냥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다니기만 하고 있었다.

‘그 힘이 내 거였으면….’

순간, 나은이 보여 줬던 모습이 뇌리를 스쳐 갔다.

블러디 피어스.

자신의 힘을 모방한 그녀가 선보였던 그 기술이 있었다면.

자신의 힘이 그녀만큼 강했다면 이런 사슬쯤 거뜬히 끊어 낼 수 있을 텐데.

‘난 왜 이렇게 약한 거야. 젠장!!’

나은이 보여 줬던 스킬을 구현해 보려 했지만, 구현할 수 없었다.

분하고, 분하고, 또 분했다.

스스로의 무력함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분했다.

키이이익!

검으로 지면을 그은 서윤은 어떻게 해서든 녀석에게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그 정도 힘으론 아무런 저항도 줄 수 없었다.

캉!!

순간, 머리를 덮친 둔탁한 충격에 서윤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차단 말뚝에 부딪친 서윤의 머리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젠장…. 아파.’

의식이 몽롱했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고, 팔에도 배에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도와줘.’

서윤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아픔 때문인지.

아니면 분함 때문인진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용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녀석이 옆에 있었으면 분명….

‘아니. 아니야.’

용주의 얼굴을 떠올린 서윤의 의식이 순간 또렷해졌다.

‘이런 한심한 모습. 녀석에겐 보이고 싶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켜쥔 서윤에게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보이고 싶지 않다고…!’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마나.

예상치 못한 마나의 폭발에 그리드의 전투마가 휘청거렸다.

“이건….”

놀란 그리드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그런 그리드의 눈에 보이는 건 서윤을 중심으로 펼쳐진 16자루의 검.

피로 만들어진 붉은 검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뭘 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흘러나오고 있어.’

사슬에 묶인 채 미끄러지던 서윤이 검 하나에 자신의 검을 겹쳐 놓았다.

피의 검은 서윤의 검과 하나가 되었고, 검의 모양은 방금 흡수한 검의 모양과 같아졌다.

‘이 감각 알고 있어. 이건 새로운 스킬을 익혔을 때의 감각.’

바짝 날을 세운 서윤이 검을 휘둘렀다.

지금까지의 참격에 꼼짝도 하지 않았던 사슬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하지만 내가 알던 감각이랑은 조금 달라.’

남은 15개의 검 중 절반이 하늘 위로 떠 올랐다.

높게 도약한 서윤은 또 하나의 검에 칼날을 겹쳤다.

두 번째 검을 흡수한 서윤의 검엔 두 번째 톱날이 자라났다.

첫 번째 톱날 바로 아랫자리였다.

‘뭐랄까? 쥐어짜는 게 아니라, 충만함에 푹 잠겨 있는 느낌이랄까?’

몸이 평소보다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분명 여기저기 쓸리고, 깨지고 난리도 아닐 텐데, 이상함을 넘어 신비한 느낌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 하고 싶은 게 뭔지는 정확히 알 것 같아.’

붉게 물든 서윤의 눈동자에 그리드가 들어왔다.

여기저기 생긴 녀석의 상처는 서윤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려 주기에 충분했다.

‘난 저 새끼를 날려 버리고 싶어!’

“블러디 퓨리(Bloody Fury)!!”

순간 가속도를 올린 서윤의 모습이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히이이잉!!

고통에 발버둥 치는 전투마.

전투마의 철갑엔 길고 날카로운 상처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나는…!”

강하와 동시에 세 번째 칼날을 포갠 서윤.

귀를 스쳐 가는 날카로운 바람에 그리드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그리드를 덮치는 서윤의 연격.

하나의 획을 그을 때마다 하나의 검이 사라졌고,

하나의 획이 그려질 때마다 톱날이 날카롭게 자라났다.

“그 녀석에게도. 이 녀석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마지막 16번째 검을 흡수한 서윤이 완성된 검을 휘둘렀다.

데스 사이드를 부딪친 그리드는 흥미롭단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아… 하아….”

마지막 일격을 작렬시킨 서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피로 물들었던 칼날은 원래 모양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리드의 전투마가 사라져가는 게 보였다.

낙마한 그리드는 자신과는 정반대 편으로 날아가 있었다.

“방금 그 힘은….”

그리드와의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격차였다.

그런데 방금 녀석과 호각으로 붙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녀석을 몰아붙였다.

“윽…!”

순간 찾아온 극심한 두통과 함께 서윤의 시야가 핑 돌았다.

잠시 잊고 있던 통증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의식이 다시 몽롱해지고 있었다.

각성제로 잠시 깨워 놓은 의식이 다시 수면 아래로 잠기는 느낌이었다.

‘안… 되는데.’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서윤이 일어나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직 녀석은….’

검에 의지하고 있던 서윤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푸른빛으로 돌아가는 서윤의 눈동자.

떨어진 검이 만든 작고 초라한 소리만이 적막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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