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 * *
‘저쪽인가?’
속도를 높인 용주가 모퉁이를 돌았다.
어둠에 잠겼던 시야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멀리서 뭔가 폭발하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수호의 말대로면 녀석들이 팬텀 중 하나와 교전을 펼치고 있는 소리일 것이다.
‘상대하고 있는 팬텀은…. 역시 녀석인가?’
누구와 교전 중인가.
거기에 대한 대략적인 가늠은 할 수 있었다.
수호가 했던 말에 단서가 있었으니 말이다.
목적지도 같은 모양.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던 녀석의 말 중엔 그런 문장이 있었다.
녀석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리드라고 봐도 좋겠지.
‘녀석이 거기 있다는 건 한태영 그 녀석도 저기 있단 건가?’
녀석을 돌려받고 싶거든, 그리드가 가지고 있는 관부터 어떻게 해라.
수호는 그렇게 말했었다.
태영의 정신을 지배하는 데 그 관이 직접적인 관여를 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아까 그 사람들도 그렇고.
‘지난번 그 일에 대한 복수는 제대로 해주겠어.’
순간, 그날의 일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수지의 숨이 끊어졌던 그날.
수지의 목숨을 빼앗아 간 이는 녀석이었다.
그것도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녀석에겐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푸드드득!!
코너를 돈 용주의 귀에 낯선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용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리고 그 정체는.
수십 마리의 언노운이었다.
“작전을 바꾸기라고 한 건가?”
다른 곳에 언노운이 출현하는 와중에도 이 근방에는 언노운이 나타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저기 있는 건 분명 언노운이었다.
나방의 날개와 늑대의 이빨.
거기에 말벌의 독침까지.
하늘을 나는 저 녀석들은 용주가 지금껏 만나본 적 없는 종류의 언노운이었다.
‘분진?’
녀석들의 날갯짓에 붉은 가루들이 떨어졌다.
분진들은 지면에 내려앉지 않고 일정한 높이를 유지한 채 떠다니고 있었다.
딱!
그 순간 들려오는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
분진들은 일순간 강렬한 화염을 일으키며 폭발해 버렸다.
‘젠장. 뜨겁잖아.’
화염 속을 빠져나온 용주는 룬검을 뽑아 들었다.
팔에 남은 상처에 화상이 더해지니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몇 급의 언노운인진 몰라도. 다른 방법이 없겠어.’
내리깔리는 냉기 속에 한 마리의 본 드래곤이 날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생명체의 등장에 언노운들의 분진 폭발이 집중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짙은 화염은 본 드래곤을 감싸며 폭발하고, 또 폭발했다.
잠시 찾아온 소강상태.
화염을 뚫고 모습을 날아오른 본 드래곤은 두 날개를 활짝 펼쳤다.
“딱! 딱! 딱! 딱!”
위협적으로 이빨을 부딪친 언노운들이 본 드래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이빨로 본 드래곤을 깨무는 언노운들.
뼈를 긁는 수많은 소리 속에 보좌관의 몸 여기저기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짙은 냉기 속에서 멀쩡하게 움직이던 그들에게 이상이 생긴 건 그로부터 5초 뒤.
균일했던 날갯짓 소리가 살충제를 맞은 벌레 소리처럼 불규칙하게 일그러졌고, 갈빗대를 물었던 세 마리의 언노운이 지면으로 추락했다.
그들의 날개는 빳빳하게 얼어 지면에 부딪히는 순간 부서져 버렸다.
목뼈를 물고 있던 두 마리의 언노운은 자신들의 독침을 박아 넣었다.
목숨과 맞바꾼 녀석들의 공격 역시도 본 드래곤을 추락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일직선에 있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린 브레스 아래에서 녀석들은 한 줌 얼음덩이가 되어 버렸다.
‘남은 녀석들도 날갯짓이 많이 느려졌어. 지금이 기회야.’
보좌관의 맹습에 모든 언노운이 휩쓸린 건 아니었다.
공격을 보류한 녀석들은 여전히 저 위를 날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위로 뛰어오른 용주는 공중을 밟고 가로수를 올랐다.
가장 높은 곳에서 도약한 용주의 눈에 언노운의 뒷모습이 보였다.
점멸까지 동원해 녀석의 등에 들러붙은 용주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망설임 없이 언노운을 물어뜯는 용주.
찢긴 체벽에서 흘러나온 체액은 용주의 얼굴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겉은 차갑고 안은 따뜻하고. 최악이군.’
비유하자면, 모래가 섞인 콧물을 먹는 맛과 식감이었다.
그것도 표면만 살짝 얼린 살얼음 콧물 말이다.
뜯어낸 체벽과 살점을 씹은 용주는 그걸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단기간에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다.
끼리리릭!
고통스럽게 이빨을 부딪치던 언노운이 꼬리를 바짝 당겼다.
순간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언노운.
말려 들어간 녀석의 독침은 놈의 몸을 관통해 등 쪽으로 삐져나왔다.
침의 끝엔.
용주가 있었다.
‘이 녀석. 이렇게 나온다고?’
복부를 관통하는 통증에 용주가 미간을 구겼다.
녀석들의 독침이 움직이는 각도는 발의 그것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보좌관을 공격하던 독침의 휘어짐은 딱 그 정도였었으니까.
그렇기에 이 등 뒤라면 분진 정도 외엔 자신에게 대응할 수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곤충이랑 똑같이 생각한 게 실수였던 건가.’
곤충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졌다 한들 이 녀석들은 곤충이 아니었다.
카오스 게이트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
녀석들이 바깥에 나온 이상 이곳에서도 그 말은 통용되는 말이었다.
‘침을 사용하면 어차피 죽는다. 그러니 자살을 해서라도 적을 쓰러뜨린다. 치명적일 만큼 냉철한 판단이야.’
룬검을 휘두른 용주는 독침을 잘라 냈다.
독침을 뽑아낸 자리는 보라색으로 질려 있었다.
추락하는 언노운에서 뛰어오른 용주는 다음 녀석에 올라탔다.
용주가 두 번째 녀석을 처리했을 즘엔 주변에 건너 탈 수 있는 언노운은 남아 있지 않았다.
‘꽤 지능적이잖아. 게다가 조직적이군.’
언노운과 함께 지면에 추락한 용주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만큼 움직여서 겨우 두 마리.
무슨 사인이 오갔는진 몰라도, 녀석들은 자신에게 절대 거리를 내주지 않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머리 위를 도는 녀석들에게선 계속해서 분진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또 한 번 광폭화에 기대는 수밖에 없….’
그렇게 생각하던 용주의 시선에 주변보다 한참 높은 한 상가 건물이 보였다.
공사가 한창인 건물은 철근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 저거라면 가능하겠어.’
용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거라면 광폭화에 기대지 않고도 녀석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광폭화는 분명 압도적인 힘을 가져다주는 스킬이었다.
마나 소모값도 그 정도면 합리적인 걸 넘어선 수준이었다.
문제는 수치로 반영되지 않는 정신적인 피폐함과 세포 하나하나에 누적되는 극한의 피로감.
포션을 먹어도.
언노운의 살점을 씹어도.
그 부분만은 회복되지 않았다.
혼자만이 느끼고, 혼자 극복하는 수밖에 없기에 누구에게도 괴로움을 터놓지 않고 있지만, 말로 하지 않는다고 괴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리드 그리고 그 외 팬텀과 붙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은 그 힘을 사용하게 될 게 분명했다.
가능하다면, 그때를 대비해 두고 싶었다.
쨍그랑!
공사 중인 건물과 마주 보고 있는 상가로 몸을 피한 용주는 창 하나를 완전히 박살 냈다.
‘인스네어.’
이윽고 펼쳐지는 가스 지대.
안쪽 모습을 가린 가스는 깨진 창을 타고 바깥까지도 퍼져 나갔다.
‘다음은….’
카운터 테이블을 엎은 용주는 역병 균체를 기대여 놓았다.
역병 균체의 모습은 용주를 똑 닮아 있었다.
‘사전 준비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직 닫지 않은 인벤토리를 바라본 용주는 또 다른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융합된 칠흑 투구.
한 손에 들어오긴 벅찬 크기를 가진 아이템이었다.
▶‘융합된 칠흑 투구’를 착용했습니다.
- 투구에 깃든 네 종류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이름 없는 왕자의 사슬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용주가 투구를 눌러쓰자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용주를 뒤덮는 칠흑의 갑옷.
입자가 결집해 만들어진 갑옷에는 두건을 두른 해골과 부서진 투구를 눌러쓴 해골이 조형되어 있었다.
‘겉모습은 일단 그때 녀석이랑 똑같군.’
사슬검을 꺼내 든 용주가 사슬을 빙빙 돌려보았다.
무게도 모양도.
익숙하지 않은 무기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몸이 느끼는 감각은 그렇지 않았다.
검도 갑옷도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보조 장치가 돼 있는 모양이었다.
‘녀석과의 전투를 기억하는 거야.’
기억을 더듬은 용주는 검은 안개를 흩뿌렸다.
용주의 모습은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고,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속도를 높인 용주는 자신이 깨뜨린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용주의 등장에도 언노운들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녀석들의 눈에 용주는 들어오지 않았다.
용주가 지나가는 자리는 투명하게 일렁거릴 뿐이었다.
속도를 높인 용주는 분진 폭발에 날아간 안전벽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 위로 언노운들이 밀집해 있는 게 보였다.
아직까지 저기 있는 게 미끼란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 너희라면 섣불리 다가가진 않겠지.’
녀석들의 경계심이라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켜보기 용이한 이곳 주변으로 모여들 것도 예상했던바.
여기까진 생각대로 일이 풀려 주었다고 봐도 좋았다.
‘녀석들의 시선이 저기 쏠려 있는 지금이라면….’
사슬검을 풀어 헤친 용주가 모퉁이를 향해 달렸다.
‘녀석은 분명 이런 식으로 사용했었지.’
쇠기둥을 휘어 감는 사슬.
공중으로 뛰어오른 용주의 머리 위로 보라색의 빛기둥이 떨어졌다.
용주의 모습은 빛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용주의 모습이 나타난 건 그로부터 2초 뒤.
보랏빛 사이로 나타난 용주의 모습은 빛 속으로 또다시 사라졌다.
떨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빛은 건물 외곽을 크게 돌며 점점 더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건물 외곽을 크게 회전하며 정상까지 오른 용주는 속도를 유지했다.
조금만 삐끗해도 큰일 날 속도와 높이였다.
언노운들은 이제 사정권 안에 있었다.
‘한 명보단 두 명이서 썰어 젖히는 게 확실하겠지.’
용주의 왼쪽 어깨에 있던 해골의 눈동자에 빛이 들어왔다.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검은 아지랑이.
빛 속에서 나타난 건 용주와 똑같이 생긴 또 한 명의 기사였다.
‘간다.’
힘에 속도를 더한 용주가 언노운의 머리를 도려냈다.
깔끔하게 두 동강 난 머리는 지면을 향해 추락했고, 날갯짓은 점점 희미해졌다.
일격에 쓰러진 언노운은 하나가 아니었다.
용주가 만든 분신 역시도 용주와 같은 공격을 펼쳤고, 다른 하나의 언노운을 저승으로 안내했다.
빛의 군무는 시작에 불과했다.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두 개의 빛은 사정없이 언노운을 찢어 놓았고.
무방비 상태로 머리가 잘려 나간 언노운들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했다.
“함분폭압!”
두 개의 사슬검을 더 꺼내 드는 용주와 기사.
공중으로 흩뿌려진 여덟 개의 사슬검은 마치 그물처럼 펼쳐졌다.
교차하는 사슬검에 중심에 있던 언노운은 두부처럼 잘려 떨어져 버렸다.
“자강불식!”
도망치려는 마지막 언노운을 바라본 용주가 사슬검을 휘둘렀다.
철근에 튕기는 네 개의 사슬.
네 방향으로 흩어진 사슬은 불규칙하게 휘고 또 휘었다.
철근 사이를 가로질러 반대편 하늘까지 도착한 사슬검은 그대로 언노운을 꿰뚫었다.
하늘을 가득 수놓던 언노운들은 이제 여기 없었다.
“후….”
건물 꼭대기에 멈춰선 용주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생각한 것보다 시간을 더 오래 허비해 버렸다.
고개를 돌린 용주는 보다 넓게 시야를 가졌다.
저 멀리 방금 상대했던 언노운들의 모습이 더 보였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호의 이그노얼 나이트메어도 확인 가능.
그리고.
날카롭게 잘려 나간 건물이 미끄러지며 무너져 내리는 모습 역시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드. 역시 녀석이 저기에.’
용주를 기준으로 동시에 세 군데에서 전투가 펼쳐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곳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바로 그때.
“!”
뭔가 불길함을 감지한 용주가 발을 차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용주의 앞을 지나는 한 발의 붉은 혜성.
추락하는 용주는 볼 수 있었다.
긴 꼬리를 남기며 추락하기 시작한 수십, 수백의 별똥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