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어머나 세상에. 저희 귀여운 글러트니한테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애가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입술에 손을 올린 엔비가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이 녀석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던 거냐?”
“세상에, 그거 누명이라고요. 먼저 인사를 건넨 건 분명 저지만, 질문을 하신 건 쭈욱 그쪽이셨다고요.”
“언노운이 아닌 사람에게 언노운의 기운이 느껴지더군. 이 녀석, 정체가 뭐냐?”
“이름은 글러트니. 우리 귀염둥이였죠. 당신께서 저렇게 만들어 버리기 전까지는요.”
검지를 뻗은 엔비가 글러트니의 몸통을 가리켰다.
“녀석을 가려 주고 있던 건 네 힘이고?”
원하는 답을 얻을 가능성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이안이 다시 물었다.
“후후훗, 역시 척하면 척이시네요. 네 맞아요.”
엔비가 가볍게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그녀의 손 위에 떠오른 건 작은 별자리였다.
별자리의 생김새는 글러터니와 똑 닮아 있었다.
“예전 TF의 눈은 마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운을 발산하지 않는 특이 체질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전 그걸 능력으로 가지고 있는 셈이죠. 사람뿐만 아니라, 특정 공간 역시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고요.”
모습을 바꾼 별자리가 이번엔 역의 3D 입체도처럼 변했다.
아까 이안이 봤던 안내도에서 지하 3층이 더해진 모습이었다.
“듣던 대로, 굉장한 힘이긴 하네요. 설마 글러트니가 저 정도로 심하게 당할 줄이야.”
엔비가 손을 접자 떠 있던 별자리가 사라졌다.
“근데 그거 아세요?”
꺼림칙한 그녀의 미소와 함께 글러트니의 몸통이 꿈틀거렸다.
순식간에 재생하는 글러트니.
피부가 온전히 붙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튀어 오른 글러트니는 입을 쫘악 벌렸다.
아직 온전하게 형성되지 않은 근육 사이로 침과 피가 뒤섞여 범람하고 있었다.
“보스는 이렇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는 거.”
엔비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 상태에서 재생을?’
글러트니를 마주한 이안은 다시 한번 녀석을 날려 버릴 준비를 했다.
언노운이란 느낌을 받았을 때부터 의심을 해야 했던 부분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재생해도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글러트니. 먹을 거야!”
완성되지 않은 성대에선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먼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그걸로 마지막.
차원과 함께 뒤틀린 글러트니의 머리는 또 한 번 찢겨 나갔다.
그런데.
“!”
머리가 날아간 글러트니의 몸이 이번엔 쓰러지지 않았다.
머리를 잃은 바퀴벌레처럼 하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먹을… 거야…!”
머리가 날아갔음에도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들었던 것과 같은 단어였지만, 소리는 전혀 달랐다.
이 소리는.
목이 아닌 몸에서 나오고 있었다.
세로로 길게 갈라지는 글러트니의 몸.
몸의 단면엔 수백 수천의 이빨이 빼곡하게 자리해 있었고, 물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몸 역시도 거대한 입이나 마찬가지였던 건가? 시도는 좋았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두른 이안이 녀석을 두 동강 냈다.
경계면을 따라 살점이 비틀리며 흘러내렸고, 온몸으로 균열이 퍼져 나갔다.
그런데.
“!”
녀석의 붕괴가 거기서 멈추었다.
“먹을 거야.”
뒤틀리는 차원.
네 등분 난 글러트니의 몸통을 중심으로 일대의 차원이 헝클어지며 일그러졌다.
차원의 뒤틀림이 끝났을 때.
거기 두 사람은 없었다.
“제아무리 차원 밀도를 가진 검이라도, 한 사람에게 한 번에 빼앗을 수 있는 목숨값은 하나뿐이죠.”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로 다가온 엔비가 턱 끝을 두드렸다.
“그럼 글러트니가 가진 목숨은 몇 개일까요? 후후. 실은 저도 잘 모른답니다. 그간 글러트니가 먹어온 게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되거든요.”
이형 리액터로부터 탄생한 수많은 실패작들.
글러트니가 채우던 건 허기와 갈증만이 아니었다.
“당신의 차원은 광활하지만, 텅 비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생명이 발현되지 않은 원시 지구라고 할 수 있죠. 그에 반해 글러트니는 생명이 응축된 운석. 거대한 충돌은 공간을 비틀고 세계의 질서를 뒤흔들 거라고 보스께선 그러셨죠.”
뒤돌아선 엔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보스께선 당신의 참전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주인을 잃어버린 세계 속에 잠시 유배되어 계시죠. 우리 귀여운 글러트니와 함께이니 외롭진 않으실 겁니다.”
* * *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형 워프 장치에서 내던져진 용주가 머리를 짚었다.
닫히고 있는 포탈의 형태는 평소와 달랐다.
둥근 원을 만들지도 못한 포탈은 부자연스럽게 찢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건 형태만이 아니었다.
포탈에 진입하는 순간 뭔가가 자신을 강하게 밀쳐내는 느낌을 받았다.
용주가 튕겨 나간 곳은 입구도 출구도 아닌 제3의 공간.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여긴 어딘 거지?”
텅 빈 차도에 안내도가 하나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신설동역으로 가려거든 직진하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근처까지 오긴 한 모양인데….”
왜 그렇게 튕겨 나왔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이 정도면 거의 다 도착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만 튕겨 나온 건가? 아니면….”
핸드폰을 꺼낸 용주가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콰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안내도가 차도로 떨어졌다.
“크하하핫!”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검은 불꽃.
그다지 달갑지 않은 웃음소리에 용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윤현.
타오르는 화염 사이에 녀석이 있었다.
“또 너냐….”
“다시 만나서 미칠 듯이 반갑다는 얼굴이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윤현의 손길을 따라 도심의 창문이 산산이 깨져 나갔다.
비처럼 쏟아지는 유리 파편.
지상으로 내려온 윤현은 지금까지와 달리 분노에 삼켜져 있지 않았다.
“이형 워프 장치를 왜곡시킨 것도 너냐?”
“여기서 널 기다리라고 한 분은 엔비 님이다. 그리고 널 이곳으로 떨어뜨린 분은 러스트 님이시지. 너흰 우리 팬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거야.”
‘그 말은 다른 녀석들도 지금쯤 목적지가 아닌 근처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갔단 건가.’
“카오스 게이트는 역시 너희 짓인 거냐?”
“흐하핫! 그 정도로 머리가 안 돌아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너무 당연하잖아.”
“그래. 근데 정말로 네가 날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용주의 도발에 윤현의 안광이 순간 흔들렸다.
“끄흐흣.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네가 날 한 번이라도 이겼던 적이 있던가?”
“헌터 시험에서 한 번. 카오스 게이트에서 또 한 번. 러스트가 개입한 한 번을 빼도 이미 두 번이지.”
“…웃기지 마.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난 진 게 아닌 거야.”
지면에서 솟구친 불기둥에 손을 넣은 윤현이 검 한 자루를 만들어 냈다.
“여기에 있는 건 팬텀의 일원인 윤현. 내게 주어진 임무는 확실하게 완수하겠어. 나의 복수를 위해. 팬텀을 위해.”
칼날을 비튼 윤현이 지면을 길게 베어 냈다.
잘린 아스팔트에선 검은 화염의 기둥이 해일처럼 솟구쳐 올랐다.
“유린해라. 지자메!”
화염으로 만들어진 네 마리의 상어가 불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팔트 아래로 파고드는 네 마리의 상어.
등지느러미만 밖으로 내놓은 녀석들은 그 아래가 액체라도 되는 것처럼 부드럽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또 처음 보는 스킬을.’
룬검을 뽑아 든 용주는 지면에서 솟구친 상어 한 마리를 베어 냈다.
가로로 두 동강 난 상어.
용주를 통과한 상어는 그대로 지면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녀석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타난 두 개의 등지느러미가 새롭게 용주의 뒤를 노리고 있었다.
‘불길 자체를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분열한다는 건가?’
물리적인 공격으론 완전히 제거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용주는 룬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어디 해보자고.’
용주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짙은 한기.
아스팔트를 잠식해 나간 얼음 지대는 세 마리의 상어를 순식간에 얼려 깨뜨려 버렸다.
‘남은 건 두 마리.’
얼음 지대를 피해 도약한 두 마리의 상어가 용주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 순간.
얼음 지대에서 솟구쳐 오른 날카로운 돌기들이 두 마리의 상어를 동시에 꿰뚫었다.
‘시간 끌 거 없이 단숨에 끝장내겠어.’
광폭화를 사용한 용주의 모습이 빠르게 변화해 갔다.
용주의 변화에도 윤현의 동요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올 게 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여기서 끝을 보자.’
부서져 흩날리는 얼음 파편들.
끓어오르는 충동 속에서 속도를 높인 용주는 폭발적으로 뛰쳐나갔다.
“찢어 뭉개라. 쿠단!”
윤현의 불길 속에서 나타나는 인면소.
지면을 부수며 날뛰는 쿠단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용주는 쿠단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짙은 화염도, 거친 발버둥도 아랑곳하지 않고 쿠단을 찍어누른 용주는 너덜거리는 쿠단의 머리를 뜯어냈다.
몸과 머리가 분리된 쿠단은 작은 발버둥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칵…. 카각…!”
“과연, 괜히 그런 말씀들을 하셨던 게 아니었군. 그 더러운 몸뚱이 속에 그런 괴물을 품고 있던 거냐? 괴물 자식.”
요괴를 잡아먹는 요괴.
불길 속에 서 있는 건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 더 강한 요괴라면 어떨까?! 무로 되돌려라. 야마타노오로치!”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여덟 개의 머리.
맹진하는 뱀의 머리를 앞에 둔 윤현은 왼손으로 지면을 내리찍었다.
“심연에서 기어 올라와라. 오오무카데!”
쿠단이 남긴 불길의 잔해는 다시 타오르며 동그란 원을 만들었다.
그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거대한 지네 한 마리.
디디고 있던 지반을 잃어버린 용주는 지네와 함께 공중으로 퍼 올려졌다.
‘여덟 머리의 뱀과 거대 지네. 두 스킬의 협공인가.’
용주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붉은 아지랑이가 네 개의 촉수처럼 자라났다.
꿈틀거리는 지네의 이빨 사이로 파고드는 네 개의 촉수.
녀석의 입을 고정시킨 용주의 입가에 붉은 입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럼 먼저 너부터 날려 주마.’
작렬하는 페이탈 붐.
수직으로 지네를 관통하던 구체는 지면에 부딪히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위풍당당한 위엄을 뿜어내던 지네는 깃발처럼 나부끼며 쓰러졌다.
‘아직 안 끝났어.’
공중을 차며 건물 벽에 수직으로 붙은 용주는 네 개의 촉수로 몸을 고정시켰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머리는 여덟 개였지만, 녀석의 몸통이 되는 부분은 하나.
쫙 벌린 용주의 입이 노리고 있는 곳 역시 그 하나였다.
“오오무카테를 일격에….”
또 한 번 모여드는 붉은 입자들에 윤현이 불길을 흩뿌렸다.
“이어져라. 누리카베.”
솟아오른 불길의 벽이 넝쿨처럼 길게 뻗어 나갔다.
겹겹이 쌓인 불꽃은 도로를 둘로 갈라 놓았고, 용주의 모습을 윤현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콰아앙~!!
그로부터 불과 5초 뒤.
엄청난 소리와 함께 강한 충격이 윤현을 덮쳤다.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던 누리카베의 불길이 공중으로 흩뿌려졌고, 남아 있는 불길의 모양 역시도 태풍에 누운 갈대처럼 꼬꾸라졌다.
“크윽….”
충격에 버티지 못한 윤현은 몇십 미터나 뒤로 날아가 나자빠졌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누리카베가 포탄을 맞은 건물처럼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중심부는 아예 형체가 남아 있지 않았고, 외곽 역시도 충격에 동그랗게 휘어 있었다.
“아직이야.”
‘아니. 이제 끝이야.’
윤현의 눈동자에 비치는 광기에 물든 눈동자.
건물 벽을 수직으로 달린 용주는 맹수처럼 윤현을 찍어 눌렀다.
지면을 찢으며 솟구치는 무수한 피의 향연.
아웃레이지 스내치에 정통으로 가격당한 윤현에게서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바보 같은 놈.’
용주가 손에 힘을 풀었다.
인간이지만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지독한 악연이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녀석이 이런 모습이 된 건 녀석의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엔 자신의 지분이 가장 컸다.
만약 녀석이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녀석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 텐데.
지독한 굶주림과 갈증.
끓어오르는 살육의 충동 속에서 용주는 윤현을 등졌다.
이 속도라면 역까지도 금방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안 끝났다고. 내가 그랬지?!”
굉음과 함께 일어난 폭발에 건물 잔해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짙은 검은색의 불길에 둘러싸인 윤현은 용주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