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플렛폼으로 내려온 이안의 눈에 정차해 있는 지하철 한 대가 보였다.
정차선에 한참 미달해서 멈춰 있는 지하철은 스크린 도어와는 완전 엇나가 있었다.
운전석과 조수석 창은 안쪽에서 튄 피로 떡이 져 있었다.
“이곳이 잠식되면서 기능을 상실해 버린 건가?”
승강장의 모습 역시도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사람들 중 생존자는 제로.
어지간한 헌터도 구역질을 할 정도로 현장은 처참했다.
“그런데….”
이안의 눈에 사지가 온전한 시신들이 보였다.
머리와 몸통의 형태는 물론이고, 팔다리도 있어야 할 곳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터지고 찢긴 다른 시신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는 모습들이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헌터.
처음 든 생각은 그거였다.
이곳의 차원 압력은 최소 B급.
모든 헌터가 버틸 수 있는 차원 압력은 아니었다.
C급 게이트부턴 생각이 바뀌고, B급 게이트부턴 사람이 바뀐다.
헌터들 사이에 전해지는 그런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었다.
충분한 마나를 보유하지 못한 헌터라면 B급 이상의 차원 압력을 버틸 수 없었다.
사람이 바뀐다는 말의 의미는.
사람의 성격 같은 게 바뀐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것으로 바뀐다는 의미였다.
만약 그런 거라면….
‘이상한데.’
그렇게 가정해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첫째, 그렇다고 하기엔 수가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위층에서 언노운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던 걸로 봤을 때, 이곳에 진입한 헌터는 자신이 최초였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저 숫자의 헌터들이 우연히 여기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둘째, 그들이 정말 헌터였다면, 그 때문에 일반인들보다는 오랜 시간 차원 압력을 버텨 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발견되었어야 할 위치는 이곳이 아니라 입구 근처여야 자연스러운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입구에 가까운 곳엔 오히려 이런 형태의 유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개체가 있었었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옮긴 이안은 유해로 다가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그리고.
작동이 멈춘 스크린 도어에 기대여 있는 사람의 유해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베어 냈다.
“푸르르르~!”
검에 베인 시신이 기괴한 경련을 일으켰다.
눈, 코, 입, 귀.
얼굴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초록색의 점액이 쏟아져 나왔고, 비정상적으로 돌아간 머리가 땅으로 뚝 떨어졌다.
녹아내린 점액질은 자연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슬라임의 형태를 갖추었다.
하지만 뭘 하기엔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녀석의 몸엔 균열이 생겨 있었고, 이내 붕괴해 사라졌다.
물론.
이안이 베어 낸 사람의 유해까지도.
“B급의 특수 개체. 설마 도심의 풍경 속에서 이 개체를 보게 될 줄이야.”
이 언노운의 특징은 사람의 살점이 아닌, 사람의 피와 내장을 빨아먹는다는 것이었다.
쭈글쭈글한 미라가 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녀석은 오히려 겉모습은 최대한 온전하게 남겨두었다.
왜냐하면, 그 빈 껍데기를 이용하는 것 또한 녀석의 사냥 방법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료의 모습. 그걸 보면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지.”
B급 게이트에서 특히 조심해야 할 요주의 개체 중 하나라고 봐도 좋았다.
실제로 녀석을 접해 본 적 없는 많은 헌터들이 녀석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시체 훼손이 있다든가, 주변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면,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을지도 모르지만, 녀석들은 그 점을 교묘하게 이용해 왔다.
무방비 상태로 다가간 헌터들은, 무방비하게 녀석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 1층과 2층.
앞을 가로막는 언노운을 학살하며, 이안은 수색을 계속했다.
카오스 게이트의 모습은 아직도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언노운의 종류는 처음 마주쳤던 2종류 외에도 더 있었다.
생김새도 능력도 다른 녀석들이었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바로 녀석들이 B급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다는 것.
아마 이곳의 게이트가 그 정도 수준이라는 이야기겠지.
“…….”
걸음을 멈춘 이안이 플랫폼 안내도를 살펴보았다.
지하 2층.
안내도에 그려진 역은 분명 거기까지였다.
“더 아래로 가는 길은 없는 건가?”
이안이 느끼기에 카오스 게이트는 더 아래 있었다.
하지만 여기 그런 공간에 대한 정보는 들어 있지 않았다.
“게이트가 흙 속에 파묻혀 있지는 않을 텐데…. 이 아래 기록되지 않은 빈 공간이 있다는 이야긴가?”
어쩌면 지하 벙커.
혹은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어떠한 루트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거라면 여기 적혀 있는 게 더 이상할 테니.
“이렇게 되면 부수고 내려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런 게 있다면, 분명 어딘가에 내려가는 길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찾고 있을 시간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과 동시에 몸을 움직인 이안이 가만히 오른발을 들었다.
신발 밑창과 닿는 공간이 크게 일그러지며 원형으로 수축되는 게 보였다.
내려찍는 힘에 커져 나가는 크레이터.
붕괴된 플랫폼의 모습은 일반적인 붕괴와는 결을 달리했다.
단순히 지반이 무너진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압축되어 사라진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지하 3층.
기록되어 있지 않은 장소로 내려온 이안은 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걸로 보이는 폐승강장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다섯 개의 카오스 게이트가 보였다.
이안이 봐왔던 카오스 게이트의 형태들과는 많이 달랐다.
게이트는 하나의 관을 바라보는 형태로 열려 있었다.
까마귀들이 떠받들고 있는 관의 아래에는 검은 늪이 있었는데,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언노운들을 삼켜 그 아래로 끌고 가고 있었다.
땅을 전혀 밟지 않는 비행 타입의 언노운까지도 말이다.
“사람?”
늪과 지면의 경계면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역병 의사 가면을 쓰고 있는 여인은 카오스 게이트의 차원 압력에 전혀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다.
“어머, 세상에. 설마 하늘에서 사람이 뚝 떨어질 줄은 몰랐는걸요.”
게이트를 바라보던 이안의 귀에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이안의 눈에 고혹적인 복장을 한 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아랫입술에 손을 올린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문이라면 숨기지도 잠그지도 않았는데. 과격한 남자 같으니라고. 뭐,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엄청 매력적이긴 하지만요.”
모습을 드러낸 엔비가 유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눈앞에 나타난 이자가 누군진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존재만으로도 이렇게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낼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S급 헌터.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가장 먼저 도착할 거라고 보스께서 그러셨죠.”
“팬텀. 그래. 그 게이트는 너희들 작품인 모양이지?”
“네. 어떤가요? 아름답지 않나요?”
“아름답다라…. 글쎄. 평소라면 그렇게 말해 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빈말로라도 그렇겐 못 하겠는데.”
이안을 감싼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에게선 짙은 분노가 느껴졌다.
“어머. 그래요? 듣기론 인자하고 다정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전혀 다른 것 같네요?”
“누구한테 들었는진 몰라도, 날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한 이야기 같은걸.”
“어머 그래요? 그거 유감이네요. 그런 남자라면 꼭 한 번 사귀어 보고 싶었는데. 가끔은 연상도 끌리는 법이거든요.”
양손으로 치맛단을 잡은 엔비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엔비. 보스께서 당신을 정중히 맞이하라고 하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은걸요.”
“정중하게 거절하지.”
“쌀쌀맞기도 하셔라. 조금 더 유한 남자를 기대했는데 말이에요.”
“…내가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면, 내가 뭘 할 건지도 너희 보스란 사람이 말해 주던가?”
“네. 물론이죠. 카오스 게이트도 닫고, 저희도 모두 끝장내실 생각이시겠죠. 무의 헌터. 그 이명에 걸맞게요.”
엔비의 시선이 이안의 검을 향했다.
보스가 말했던 것처럼.
검의 경계면을 따라 공간이 뒤틀리고 있었다.
칼날을 구성하는 건 녀석이 창조한 세계 하나.
고작 칼날 하나가 공간의 휘어짐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였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머, 그러신가요? 제가 당신이었다면, 칼부터 들이밀었을 것 같은데. 이야기야 다 끝내고 해도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건 다음이 있을 때 이야기지.”
“어우, 무서워라.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겠죠.”
이안을 눈앞에 두고도 엔비의 여유는 사라지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이 순간이 와서도 말이다.
“저건 자연적으로 발생한 카오스 게이트냐?”
“그렇게 보이시나요?”
“절대 아니지.”
“답을 알고 계시면서 물어보시다니. 보기보다 얄궂으시네요.”
“그럼 다음 질문이다. 어떻게 카오스 게이트를 연 거냐?”
“어라~ 질문은 분명 하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요? 하나가 제가 아는 하나랑 다른 모양이네요.”
“묻는 말에나 대답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텐데.”
“흐음~ 저같이 연약한 여인을 상대로 그렇게 무서운 기운을 마구마구 뿜어내시다니. 그러다 제가 정신이라도 잃으면 어쩌시려고요.”
“그 정도로 잃을 거였으면, 진작 거기 누워 있었겠지. 안 그래?”
“후후, 정말이지 매정하시다니까. 나쁜 남자 같으니라고. 반해 버리겠어요.”
왼발을 한 걸음 무른 엔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유감스럽게도 게이트를 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저희 보스뿐이랍니다. 제 입이 열 개라도 드릴 수 없는 말씀이에요.”
“그래? 그럼 너희는 왜 저 게이트를 연 거냐?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게 저희 보스의 뜻이었으니까요.”
“거기 너희 의지는 없단 거냐?”
“적어도 전 그래요. 하지만 이걸로 보스랑. 우리 가족들이랑 더 오래 지낼 수 있다면, 전 그것만으로 만족한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더라도 말이냐?”
“네. 뭘, 당연한 말씀을.”
엔비의 대답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래? 좋다. 엔비. 그럼 이번엔 이렇게 물어보지. 너희가 헌터들을 살해한 것과 이형 결정체를 모은 건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는 거냐?”
“거기에 대해서도 노코멘트.”
“아까랑 같은 이유에서?”
“네.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 네가 절대 모를 수 없는 질문을 해야겠군. 엔비. 헌터들에게서 어떻게 힘을 빼간 거냐?”
이준을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 그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할까.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걸로 뭘 얻을 수 있을까.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얻을 수 있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후후. 그래요. 그거라면 알고 있긴 하죠.”
“……!”
“하지만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걸요. 키스라도 해주시면 또 모를까.”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언노운의 기운.
쏜살같이 반응한 이안의 눈에 보이는 건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거구의 사내였다.
‘사람? 아니, 그보다 내가 아무것도 못 느꼈다고?’
입을 쩍 벌린 글러트니는 손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 있었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왔는데도 자신은 그 존재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날 너무 얕봤어. 이빨을 숨기려거든 적에 목에 박아넣을 때까지 숨겼어야지.’
이안과 글러트니 사이의 공간이 수축하며 일그러졌다.
손가락 마디만 한 블랙홀로 공기가 빨려 들어갔고, 글러트니의 얼굴 역시도 뒤틀림을 따라 길게 늘어났다.
순간 찾아온 완전한 진공.
‘우선 하나.’
사라졌던 바람이 순간을 기점으로 뿜어져 나왔다.
폭발적인 바람에 승강장 전체가 흔들렸고, 카오스 게이트가 만들어내던 일렁거림이 촛불처럼 휘었다.
비틀거리던 글러트니가 쿵 하고 쓰러졌다.
몸통에 머리는 없었다.
사라진 건 머리만이 아니었다.
목과 이어진 어깨와 가슴 일부까지.
동그랗게 파여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