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 * *
“어서 와. 오늘은 많이 늦었네.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온 러스트의 귀에 엔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엔비는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엔비…?”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온 건 미안해.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놀란 얼굴 하면 언니 상처받는다고.”
“아…. 응.”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여기 와서 앉지 그래? 네 방인데, 네가 더 불편해하면 쓰겠어?”
고개를 끄덕인 러스트가 자신의 그림자에 앉았다.
“언니는 지금 굉장히 슬퍼. 왜 그럴 거 같아?”
엔비의 물음에 러스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찔리는 게 없을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음. 내가 옆에 안 앉아서?”
러스트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것도 물론 슬프지. 그렇지만 그건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단다.”
손을 뻗은 엔비가 러스트의 뺨에 손을 올렸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기대라고. 언니가 그렇게 말했었는데, 너에게 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언니였니?”
엔비가 뺨을 쓸어내렸다.
러스트의 뺨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닦는다고 닦아 낸 것처럼 보였지만, 엔비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알고 있어. 네가 내 데이터베이스에 손을 댔단 거.”
“……!”
러스트의 눈동자에 큰 동요가 일었다.
“어떻게….”
“아니라고 발뺌은 안 할 생각인 모양이네.”
입꼬리를 올린 엔비가 다리를 꼬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정리해 놓은 거랑 미묘하게 달라져 있더라고. 그래서 검색 기록들을 좀 살펴봤지.”
“검색… 기록?”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몰랐단 표정이네.”
“그렇지만… 그걸로는 날 특정 지을 수 없어. 넘겨짚은 거?”
“아니. 바로 알 수 있었어. 그 이름을 검색해 볼 사람은 우리 중에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
“화낼 거냐고 하려고 했지?”
“어떻게 알았어?”
“그러니까 언니인 거지.”
엔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 안 낼 거야. 윤현도, 프라이드도, 그리드도 다 제멋대로 사고만 치고 다녔는데, 너한테만 중한 잣대를 대고 싶지는 않거든.”
“…….”
“그래서? 원하는 건 손에 넣었어? 네가 그동안 찾던 건 찾은 거야?”
러스트가 대답을 망설였다.
숨긴다고 숨겨질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과연 이걸 말해도 될까 하는 의문 또한 같이 들었다.
“숨길 필요 없어. 네가 뭐라고 하든 그 이야긴 내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거니까.”
“…보스한테도 말 안 할 거야?”
“응.”
시선을 피한 러스트가 깍지를 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엔비가 보스의 이름을 걸었다는 건 할 수 있는 최고의 맹세를 하겠단 것이었다.
“응. 조금은 찾은 것 같아. 내가 찾아 헤매던 거.”
“음….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 슬픈 얼굴 하고 있는 거야? 조금은 기뻐해도 되는 거 아니야?”
“기쁘지 않아. 그래서 기뻐할 수 없어.”
“그래? 그거 아쉽네. 네가 찾는 건 행복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엔비가 창가로 다가갔다.
“하긴. 그럴 리가 없겠지. 너도 나도.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보스의 작품 중 하나일 뿐이니까.”
“엔비…?”
러스트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방금 그 이야기.
분명 뭔가를 안다는 것처럼 들렸다.
“가족들. 겉모습도 성격도 우린 전부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어. 그건 바로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른단 거야.”
창문을 연 엔비가 창틀에 걸터앉았다.
“프라이드는 과거에 관심이 없어. 오늘만 사는 아이니까. 그리드는 그런 것보다 자기 호기심과 탐구심에 관심이 있고. 글러트니는 과거란 개념조차 모르는 것 같았고 말이야. 라스도 슬로스도 비슷한 느낌이지.”
“…….”
“그럼 나는 어땠을 것 같아?”
“엔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생각해 본 적 없지?”
“미안….”
“미안하긴. 난 궁금했었어. 난 어떤 사람이었을지. 아마 너희가 눈을 뜨기 훨씬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야.”
“엔비가…?”
“응.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어. 물론, 보스한테도.”
“그럼 그걸 왜 나한테….”
“네가 나랑 같은 곳에 도달했을 테니까.”
“같은 곳…?”
러스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는 건.
엔비는 알고 있단 건가?
자신이 누군지.
“출처 없는 의문과 공허함. 널 괴롭히던 감정은 내게 없었어. 날 움직인 건 호기심에 더 가까웠으니까.”
“엔비는 혹시 내 공허함의 원인이 뭔지 알고 있었던 거야?”
“본인도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 그래서 널 그냥 둔 거고. 네 공허함의 끝에 있는 게 뭘지. 네 의문의 시작과 종착이 뭘지 나도 보고 싶었으니까.”
“…….”
“그래서? 넌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창틀에 올린 다리를 쭉 뻗은 엔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면,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엔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질문을 던진 건 나인 것 같은데.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
“난 너랑 달라, 러스트. 너랑 달리 내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거든.”
“없어…?”
“그렇더라고. 슬프진 않았어. 내 기억은 감정 없는 사고의 혼합물. 오히려 슬프지 않다는 게 더 슬펐지. 너처럼 울 수 있는 게 내 입장에선 부러워.”
“…….”
“그런 얼굴 하지 마. 난 지금 우리 가족들이랑 보스랑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좋으니까. 너흴 대하는 내 마음에 거짓은 없어. 과거를 알지만 지금을 살자. 그게 지금 내 진심이야.”
“…….”
“그럼 이제 네 차례네? 어때? 어떻게 하고 싶어?”
“난…. 나는….”
고심 끝에 무언가를 중얼거린 러스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창틀에서 내려온 엔비는 그런 그녀를 꼭 안아 주고 있었다.
* * *
빵! 빵빵빵!!
여느 때와 같은 양화대교.
여느 때와 달리 자동차 경적이 대교를 가득 채웠다.
“아이~ 진짜! 뭐야?! 왜 안 움직이는 건데?!”
“어디 앞에서 전세 냈어? 어?!”
“양화대교는 뭐 무너졌냐?”
창문을 내린 운전자들의 입에서 험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차들이 움직일 생각도 없이 꽉 막혀 있었다.
귀경길 고속도로도 이것보단 많이 움직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앞에 무슨 사고라도 났대요?”
“글쎄요. 교통 방송에선 딱히 그런 이야기 안 하던데요.”
기다림에 지친 몇몇 운전자들이 차에서 내렸다.
눈에 보이는 큰 이상은 없었다.
그때까지는.
“저기 사람들이 뛰어오는데요?”
다리 반대편에서 뛰어오는 사람들을 발견한 푸른 셔츠의 사내가 이야기했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대부분 공포에 질려 있었다.
“무슨 일 있나 본데?”
“저기 무슨 일이래요? 앞에 뭔 일 있어요?”
사내의 물음에 한 사내가 멈춰 섰다.
“도, 도망쳐요! 다들! 빨리요!!”
“그러니까 이유라도 좀 들어봅시다. 예?”
공포에 질린 사내의 외침에도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여유로웠다.
그때.
강렬한 바람과 함께 강물이 솟구쳐 올랐다.
“저, 저게 뭐야?!”
“괴, 괴물?!”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엔.
눈이 하나 달린 거대한 물고기.
아니, 물고기처럼 꼬리가 달린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으악!! 도망쳐!!”
다리 위를 지난 언노운이 다시금 물속으로 떨어지자,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게 혹시 언노운이야?! 대박. 나 실제로 보는 거 처음이야!”
“거… 거기! 어디 가는 거야! 위험해!”
핸드폰의 촬영 기능을 켠 한 사내가 다리 난간에 바짝 붙었다.
“이거면 조회수 10만 아니, 100만은 떼 놓은 당상이야! 일생일대의 떡상 기회라고!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고개를 내민 사내가 수면 위를 찍기 시작했다.
“여러분 저 아래! 여기 양화대교에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수면 아래로 거대한 실루엣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한강에 진짜 괴물이 살고 있다고요!! 영화 아니고요! 합성 아니고요! 낚시 아니고요! 실제 상황이에요! 실제 상황!”
기대와 흥분에 가득 찬 사내의 내레이션에 호응하듯, 수면 위로 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쩌억 벌어지는 언노운의 입.
수십,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을 목격한 사내는 그제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내 쪽으로….”
공포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드리운 그림자는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칫!”
바로 그때.
사내의 머리 위로 강렬한 번개 한 줄기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까맣게 그을린 언노운은 양화대교 난간을 때렸고, 자동차 두 대를 완전히 고철로 만들며 수면 아래로 떨어졌다.
“히… 히이익!”
뒤로 나자빠진 사내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가지고 있던 핸드폰은 어디 갔는지 없었다.
“어이. 다 지렸으면 빨리 꺼져. 뒈지기 싫으면.”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사내의 눈에 백발을 한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두 자루의 검을 빼 들고 있는 사내는 난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시우.
길드의 A급 헌터 중 한 사람이었다.
“갑자기 뭔 난리래, 이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사내를 지켜보던 시우는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사이렌 소리를 내며 터지는 한 발의 신호탄.
끼고 있던 이어폰을 목에 걸친 시우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배를 보인 채 떠 있는 언노운의 유해 아래로 몇 개의 크고 작은 그림자들이 더 있었다.
* * *
“긴급 소식입니다. 지금 이곳 서울 도심 한복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언노운이 출현해…. 꺄아악!!”
스마트폰 너머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화면엔 상공을 날고 있는 곤충형 언노운들의 모습이 보였다.
급하게 투입된 헌터들이 언노운들과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지만, 모든 피해를 다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투를 이어 가던 헌터 중 몇 명이 언노운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모습이 생중계되었고, 버려진 카메라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서울 한복판에 안정화된 게이트가 생겼다니. 믿을 수가 없어.”
방송을 보고 있던 서윤이 턱을 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게 무슨 만우절 장난인가 싶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수도 서울에서 이런 일이 터지다니.
“게다가 한두 개체가 아닌 모양인데? 출현하는 종류도 한두 종류가 아니고, 위치도 완전 자기들 맘대로잖아?!”
화면에 잡힌 언노운의 종류만 봐도 십여 종이었다.
언노운의 등급까진 보도로 접할 수 없었지만, 최소 C급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C급 게이트에서 만났던 개체 중 하나가 화면 너머로 보였으니 말이다.
“길드에선 뭐 하고 있는 거야? 발견을 못 한 거든, 토벌에 실패한 거든, 양쪽 다 엄청 심각한 문제잖아!”
“게이트를 발견 못 한 모양이야.”
“뭐?!”
수지의 대답에 서윤이 미간을 구겼다.
“그게 말이 돼?!”
“그렇지만 사실.”
수지가 길드로부터 날아온 문자를 보였다.
긴급 동원과 긴급 수색.
두 가지 내용을 확인한 서윤은 읽지 않은 자신의 메시지 창을 확인했다.
자신에게도 온 똑같은 문자에는 길드가 언노운의 진원지조차 특정 짓지 못했다는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묘하게 겹치는군.”
“묘하게 겹치다니?”
용주의 이야기에 서윤이 물었다.
“언노운의 출현 타이밍. 눈이 그리드의 위치를 특정한 타이밍이랑 이상할 정도로 겹친다는 생각 안 들어?”
나은은 용주에게 남아 있다는 그리드의 기운을 단서로 삼아 수색을 개시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리드의 행방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리드와 결전을 펼쳤던 장소에 도착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당혹스러워하던 나은의 얼굴은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대신해 주고 있었었다.
그런데.
“정확히 한 점으로 잡아내긴 힘들지만, 그래도 반경 200m 내까진 범위를 좁혔어요. 분명 그 안에 있을 거예요.”
언노운이 나타난 시점을 기준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그녀가 그리드의 기운을 감지해 낸 것이다.
장막이 걷힌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녀석을 가려 주던 무언가가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벗겨졌다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 위치란 건?”
“신설동역. 거기가 제가 추정한 지역의 중심부에요.”
“녀석도 서울에?”
“네. 틀림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