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방금 그건….’
나은의 모습에서 용주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수지의 모습이었다.
방금 그 초록빛은 의료 헌터들이 발산하는 빛.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의 서리가 물러가고, 동상이 치유된 게 확실한 증거였다.
게다가.
‘방금 그 움직임… 그전까지와는 달랐어.’
서윤을 모방하는 나은의 움직임은 서윤과 닮은 점이 많았다.
하지만 방금 몸을 수직으로 세우는 동작은 서윤의 움직임이라기엔 이질감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공중에서 강하하는 그 움직임은 서윤의 것이라기보단 수지의 것에 더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설마 그 한 동작만 보고 전체를 모방했단 건가?’
“제 움직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계시단 얼굴이시네요.”
나은이 가볍게 손을 털었다.
“하나를 보고 그 이상을 유추해 낼 수 있는 게 역량이란 거 아니겠어요? 여러 헌터분들과 조우하며 익혀 온 제 노하우 같은 거죠.”
이야기를 이어 가던 나은이 오른쪽 사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먼지를 뚫고 나온 서윤과 검을 맞부딪치는 나은.
칼날을 비튼 나은은 힘으로 서윤을 날려 버렸다.
“그럼 계속해 볼까요?”
날아가는 서윤을 쫓는 나은의 그림자.
그녀의 칼날을 막아선 용주의 뒤꿈치가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좋은 협공이네요.”
눈웃음을 지어 보인 나은이 왼손을 뻗었다.
나은의 손바닥을 강타하는 수지의 주먹.
두 사람의 충돌에 강렬하게 공간이 울렸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전력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신 건가요?”
평행선을 그리던 힘의 균형을 깬 나은이 용주와 수지를 모두 날려 버렸다.
공중을 디디며 멈춰 선 용주의 왼손에서 붉은 핏방울이 피어올랐다.
형태를 갖추어 가는 괴수의 손.
짐승처럼 도약한 용주는 지면을 내리찍었다.
“방금 그건 꽤 살벌한걸요.”
낚아채려는 용주의 손길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낸 나은이 용주의 후속타를 가드해 냈다.
솟구치는 피에 고스란히 직격당했음에도 나은의 움직임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럼 저도 하나 더 보여드리도록 할까요?”
나은에게서 피어오른 붉은 아지랑이가 그녀의 등 뒤로 몰려들었다.
몰려든 아지랑이는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대칭을 이루는 한 쌍의 가지.
가지 아래 모여든 아지랑이들은 검의 모양을 갖추어 갔다.
“블러디 피어스. 일단은 그렇게 말해 두도록 할까요?”
초롱꽃처럼 매달려 있던 10자루의 칼날이 일제히 사출되었다.
회전하며 날아드는 10자루의 칼날.
전방 180도에서 조여 오는 칼날들을 마주한 용주는 지면을 내리찍었다.
한 번 더 솟구쳐 오른 핏줄기는 칼날들의 궤도를 모두 흩트려 놓았다.
궤도를 잃어버린 칼날들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하더니 이내 모두 소멸해 버렸다.
폭발을 뚫고 나온 용주는 그대로 나은을 들이받았다.
나은은 검을 휘둘렀지만,
스팀팩과 사후 강직.
두 가지 스킬을 결합시킨 용주를 저지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점멸을 사용한 용주는 또 한 번 나은의 뒤를 잡았다.
변이된 팔꿈치로 나은의 등허리를 강타하는 용주.
정통으로 가격당한 나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 떨어지는 수지의 후속타.
엄청난 흙먼지를 흩날리며 부서진 대지엔 동그란 크레이터가 생겨 있었다.
“…….”
기습적인 연계를 펼쳤던 수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레이터 안에 나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격은 불발이었지만, 불발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기는 우리가 이긴 거겠지?”
물음을 던진 용주가 룬검을 집어넣었다.
흙먼지 반대편으로 보이는 나은은 오른 무릎을 지면에 대고 있었다.
“네. 변명할 여지가 없는 깔끔한 패배네요. 인정할게요.”
무릎을 펴고 일어난 나은의 검신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봐! 방금 그건… 뭐였어?”
마른침을 삼킨 서윤이 물었다.
방금 그 스킬.
베이스는 분명 자신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녀석이 사용한 저 스킬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서윤 씨의 힘을 제 나름대로 응용해 본 건데, 역시 미숙한 감이 있네요. 이래서 모방보다 창작이 힘들다니까요.”
폭발 범위에서 벗어난 나은이 싱긋 웃어 보였다.
“내 힘을 응용했다고?”
“네. 이건 서윤 씨의 마나가 지금보다 더 커졌을 때 발현될 수 있는 가지들 중 하나. 피지 않은 봉우리를 제가 강제로 개화시킨 결과물이죠.”
“강제로 개화시켜? 그럼 방금 그건… 내가 언젠간 쓸 수도 있는 스킬이란 이야기야?!”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죠.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수많은 가지들 중 하나. 수많은 봉우리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어떤 가지의 어떤 봉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개화하냐에 따라 결과물은 달라지겠죠.”
“그, 그럼 다른 건? 다른 스킬들은 또 뭐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 힘을 개화시킬 수 있는 거야?!”
서윤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건 미래의 서윤 씨께서 말을 해주실 겁니다.”
검을 집어넣은 나은이 가볍게 치마를 털었다.
“왜 제가 여러분께 오늘 있던 일들을 부탁드렸는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이번 건 몰라도, 다른 건 그냥 네가 할 일을 그냥 짬 처리 시킨 거잖아.”
서윤이 고민 없이 대답했다.
“짬 처리라니. 재밌는 표현이네요.”
“기분 나쁘다고 말 번복하기 없기야. 남아일언 중천금. 여아일언도 중천금이라고.”
“하하. 물론이죠.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아니라고?”
“그럼요.”
“그럼 그 대청소는 뭐였는데?”
“여러분의 체력과 지구력, 그리고 끈기와 협동심을 비춰 볼 수 있는 작은 거울이었죠.”
“거울?”
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그래. 뭐,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럼 가지치기는? 정원 손질은 뭐였는데?”
“여러분의 마음을 비춰 볼 수 있는 창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성격,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의 성품 그런 걸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리였죠.”
“하아~?”
서윤의 표정이 좀 더 안 좋아졌다.
처음 거야 억지로라도 이해라도 할 수 있다고 쳐도.
이번 건 완전 꿈보다 해몽이지 않은가.
“그럼 세 번째 건? 얘기들 과자 구워준 건?”
“사람의 손엔 진심이 깃드는 법이죠. 특히 남을 대접하는 요리엔 사랑이 깃드는 법이고요. 쿠키를 부탁드린 건 그 연장선이었어요.”
“사, 사랑? 그런 걸 왜 봐야 하는데?”
한 단어에 유독 반응한 서윤이 물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을 돕곤 싶진 않거든요. 만약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이라면, 나머지가 어떻든 도와드리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그래? 근데 그렇게 치면 저 녀석 마음은 영 불합격이었던 거 아니야?”
서윤이 엄지 끝으로 수지를 가리켰다.
“단순히 맛이나 생김새로만 판단하진 않았어요. 거기 담긴 정성과 사랑은 겉모습에 비례하지 않으니까요.”
“하아~ 그러셔?”
서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거야 완전 엿장수 마음대로, 점쟁이 마음대로이지 않은가.
“그럼 마지막은? 지금 이거 말이야. 선대로서 실력을 보고 싶다고 그랬었는데, 거기에도 다른 의도가 있던 거야?”
“아니요. 거기 숨겨진 의도는 없었어요. 다만 여러분에게 그 정도 힘도 없다면, 도움을 드려선 안 되겠단 생각은 하고 있었죠.”
“안 된다고?”
“네. 제가 듣기로 여러분이 찾는 그 팬텀이란 자들은 헌터들의 목숨까지도 빼앗은 자들이라고 하더군요. 아닌가요?”
“…….”
“좋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바에야 지금처럼 찾지 못하는 게 더 좋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제가 모르는 누군가가 더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요.”
나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러분은 힘을 증명했습니다. 덕분에 제가 지금껏 본 적 없는 종류의 힘도 구경했고요. TF의 눈이 여러분께 고전한 이유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나은이 용주의 앞에 멈춰 섰다.
“돌아가죠.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으니.”
* * *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한적한 병원 로비.
퇴근 준비를 마친 은정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와 시선을 맞춘 건.
형만이었다.
형만에겐 짙은 향냄새가 배어 있었다.
“너는….”
“최은정. 여기 의사 중 한 사람이에요. 저희 용주 씨 입원했을 때 뵌 적 있었죠?”
“그래. 복장이 달라서 못 알아봤군.”
“요 며칠 새 계속 오셨죠? 이 시간쯤에요.”
“그래. 그런 것도 같군.”
은정이 보기에 형만의 낯빛은 상당히 좋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의 얼굴.
은정이 느낀 첫 느낌은 딱 그랬다.
“기일…이신 거죠?”
은정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형만이 걸어온 곳은 병원 한켠에 자리 잡은 납골당이었다.
다른 납골당에 비하면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아무나 묻힐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아니. 두 사람 다 오늘과는 관계없다.”
‘두 사람?’
두 사람이란 이야기에 은정이 흠칫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그냥 생각이 나서 들른 것뿐이다. 그러려고 이렇게 가까이 둔 것이니까.”
“그러셨군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전부냐?”
“…….”
은정이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차갑게 그늘진 형만의 얼굴은 결코 자신을 환영하고 있지 않았다.
“아! 혹시 용주 씨는 요새 좀 어때요? 통 오시는 일이 없어지셨거든요. 혹시 알고 계신 이야기가 있으실까 해서.”
은정이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쪽으론 더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애송이 말이냐?”
“애송이? 아~ 헌터님께선 용주 씨를 그렇게 부르시나 봐요? 다음번엔 저도 그렇게 한 번 놀려 먹어 봐야겠어요.”
“왜? 관심이라도 있는 거냐?”
“과, 관심은요! 그런 거 아니에요! 뭐랄까. 있던 게 없어져서 느끼는 허전함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걸 느낀다고나 할까 어떨까. 시원섭섭한 그런 느낌적인 느낌?”
“혀가 길어진 걸 보니, 아니라곤 말 못 하겠는 모양이지.”
“아, 아니에요! 정말 아니라니깐요!”
은정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
혀가 길어졌다니.
그렇게 들으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애송이 녀석이라면 바쁘게 살고 있다. 잘살고 있느냐는 그 녀석 본인만 알겠지.”
“아~ 그래요? 그래도 그런 이야기 나오는 거 보니 잘살고 계시긴 한가 보네요.”
안도하는 은정의 얼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지켜보던 형만은.
“취향 한번 고약하군.”
고개를 돌렸다.
“자, 잠깐만요! 취향이 고약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더 멋지고, 능력 있는 남자라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너 정도의 능력이면 잡고 싶은 사람 다 잡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더 나은 사람을 찾아봐라. 그런 애송이 말고.”
“잠깐! 방금 그 이야기, 그냥은 듣고 못 넘어가겠는데요?”
은정이 형만의 손을 붙잡았다.
은정의 눈빛은 순간 달라져 있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못된 말씀 하시는지 몰라도, 용주 씬 충분히 멋진 사람이에요. 대체 어떤 근거로 용주 씨를 그렇게 깎아내리시는 거죠?”
“그 녀석의 말투, 그 녀석의 눈빛, 그 녀석의 행동, 지금까지 아무것도 본 게 없는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보는 게 어떻겠나?”
“…….”
은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확실히 용주 씨는 말투도 안 예쁘고, 눈빛도 사납고, 제 말은 죽어라 안 듣고 자기 멋대로 구는 사람이에요. 그렇지만요!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요! 그 뒤에 숨어 있는 용주 씨 보신 적 있으세요? 친절하고, 배려심 깊고, 서툴지만 자상한. 그런 용주 씨를 한 번 이라도 보신 적 있으시냐고요?!”
“못 봤다고 한다면? 그게 다 네가 만들어낸 망상이라고 한다면?”
“언성 높여서 죄송하지만, 망상 같은 게 절대 아니에요! 헌터님이 용주 씨랑 얼마나 알고 지냈는진 몰라도, 저도 밀리지 않는다고요! 헌터님이 그걸 모른다면, 헌터님은 저보다 용주 씨에 대해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막 말씀하지 마시라고요!”
감정이 실린 은정의 목소리.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스쳤다.
“그래? 그럼 넌 그 애송이가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는 거냐? 충분히 나은 사람이라고?”
“네! 적어도 전 그렇게 생각해요. 세상 모두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전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
나은의 당당한 눈빛에 형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는 좋은 남자가 될 수 없다. 절대로.”
“그게 무슨….”
은정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때.
한 사내의 발소리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박형만 헌터님, 여기 계셨군요.”
은정과 형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소리 끝에 있는 이는 승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