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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17화 (217/357)

217화

* * *

“정말 여기가 목적지라고?”

서윤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나은과 함께 움직인 세 사람은 지금 수녀원과 조금 떨어진 외진 공터에 도착해 있었다.

공터의 외곽엔 빨간 벽돌담이 둘려 있었다.

색도 바라고, 금도 가고, 여기저기 무너져 있는 게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구조물이었다.

옛날엔 이 안쪽에도 뭔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긴 왜 데려온 거야? 설마 집이라도 뚝딱 지어내란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러려고요. 제가 여러분을 이곳으로 안내한 것은 이곳이 마지막 부탁을 드리기 가장 적절한 곳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서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잡초가 무성한 이런 공터가 제격인 부탁이라니.

잡초라도 뽑으라는 건가?

“네. 여기라면 다른 수녀분들이나 아이들 눈에 띌 염려는 없을 테니까요.”

“눈에 띄면 안 되는 위험한 일인가 보지?”

“띄어서 좋을 건 없긴 하죠. 이곳에서 전 테레사 수녀니까요.”

“그래서 그 마지막 부탁이란 건?”

“세 분과 짧게라도 겨뤄 보고 싶습니다.”

“겨뤄 봐?”

서윤이 놀란 눈망울을 깜빡였다.

겨뤄 보다니.

이거 이야기가 갑자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지 않았는가.

“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나은이 다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왜지?”

“그야 당연히 눈이 제압하지 못한 자들의 실력을 보고 싶으니까요. 선대로서. 만약 당신들이 제 무릎을 한 번이라도 땅에 닿게 한다면, 여러분의 일에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용주의 물음에 나은이 싱긋 웃어 보였다.

“검을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다치는 건 고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의 특기, 여러분의 스킬, 여러분의 테크닉, 전 그 모든 걸 보고 싶습니다.”

나은의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세 번째 부탁을 할 때까지만 해도 쓰고 있던 베일이 지금은 그녀의 머리에 씌워져 있지 않았다.

“어쩔래?”

“상대는 전직 TF의 눈이다. 전력을 다해도 쉬운 상대는 아닐 거다.”

“음…. 하긴.”

고개를 끄덕인 서윤이 검을 뽑아 들었다.

TF의 눈도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수호의 경우엔 헌터들의 스킬을 봉쇄하는 대 헌터용 스킬과 자신의 육체를 강화하는 스킬을 위주로 활용했었지.

이 녀석도 분명 그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

제자리에서 가볍게 통통 튄 서윤이 폭발적으로 속도를 높였다.

지금 이 녀석은 아니지만, TF의 눈을 상대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면.

적어도 스킬을 발동하기 전에 한 방이라도 제대로 먹여 주고 싶었다.

“선공은 내가!”

망설임 없이 거리를 좁히는 서윤.

서윤의 칼날이 멈춰 선 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

놀란 서윤의 눈동자에 한 자루의 검 자루가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칼자루 위에 검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칼날을 타고 무언가에 가로막혔다는 게 분명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저런 걸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나은의 검을 보고 서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승우가 가져왔던 모의용 검이었다.

하지만 두 검은 같지 않았다.

실체가 없던 모의용 칼날과 달리 나은이 휘두르는 칼날엔 실체가 있었다.

“상당히 독특한 모양의 검을 사용하시네요.”

“그건 내가 할 말인 거 같은데.”

뒤로 반걸음 튕겨 나온 서윤이 왼발로 지면을 깊게 후벼 팠다.

‘스킬이 봉쇄되기 전에 한 방 크게 먹여 주겠어.’

“블러디 러시!”

왼쪽으로 파고든 서윤이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좌우로 휘젓는 난폭한 연속 공격.

검을 뒤로 길게 뺀 서윤은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마무리 공격을 막아선 나은은 서윤과 약간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어떻게 생겨 먹은 검인 거지?’

서윤이 미간을 좁혔다.

칼날의 길이.

칼날의 두께.

칼날의 모양.

검을 직접 마주쳤음에도 그런 게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상당히 뜨겁고, 과격한 마나의 흐름이네요.”

“뭐?!”

“색으로 비유하자면 붉은색, 이미지로 비유하자면 불꽃, 꽃으로 비유하자면 장미라고나 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의문을 표한 서윤의 눈에 한 가지 변화가 감지되었다.

아무것도 없던 나은의 검에 칼날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의 모양은.

자신이 들고 있는 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너… 그거….”

당황한 서윤을 향해 이번엔 나은이 역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서윤 씨는 대략 이런 느낌이려나요?”

이윽고 들려오는 나은의 목소리.

“블러디 러시.”

“!”

난폭하게 휘두르는 칼날을 따라 검붉은 기운이 흩뿌려졌다.

‘뭐야, 이게.’

이 녀석.

방금 ‘블러디 러시’라고 그랬다.

그리고 지금 녀석이 사용하고 있는 스킬은 분명 자신의 블러디 러시였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란 건 알고 있었다.

당연하지.

이름만 외친다고 누구나 쓸 수 있는 거면 개나 소나 다 쓰고 다녔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분명 자신의 스킬과 같은 것이었다.

처음 만나는 녀석이.

자신과 똑같은 스킬을 사용한다?

분명 뭔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굼벵이 앞에서 주름을 잡으라고! 블러디 러시!”

서윤이 정면에서 검을 맞받아쳤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힘으로도 속도로도 자신이 밀린다는 걸.

“그럼 한 템포 올려볼까요?”

“큭…!”

내지르는 그녀의 칼날을 막아선 서윤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칼끝으로 지면을 긁으며 속도를 줄이는 서윤.

그런 서윤을 따라붙은 나은은 지면을 긁은 검을 올려 쳤다.

서로를 긁어 내는 두 톱날 사이에서 붉은 기운이 요동쳤고, 서윤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손잡이를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손바닥이 찢길 것 같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저 녀석이 내 스킬을.”

또 한 번 날아간 서윤이 대지를 긁어 냈다.

칼을 쥐고 있는 서윤의 손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게 선대 눈의 힘이란 거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서윤과 나란히 선 용주가 검을 뽑아 들었다.

“스킬이라고? 저게?”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 다른 사람의 스킬을 모방하는… 뭐, 그런 거겠지.”

“다른 사람의 스킬을? 그런 게 가능해?”

“네 눈으로 직접 봤잖아.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해도 그게 말이 된단 걸.”

“그건… 그렇지만.”

“대 헌터용 스킬. 지금 눈과 마찬가지로 녀석도 그런 종류의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걸 거다.”

용주의 눈동자에 나은의 모습이 비쳤다.

충분히 공격해 올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먼저 공격해 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저 녀석, 아무런 영창도 안 외쳤는데?”

“네 스킬을 모방할 때는 외쳤잖아. 기본적인 베이스를 모방하는 덴 필요하지 않지만, 상대의 스킬을 직접 구사하기 위해선 영창이 필요한 그런 거겠지.”

“그런 거면 엄청 수동적인 능력인 거 아니야? 스킬 자체를 봉쇄하는 지금 눈에 비하면 상대할 만한 능력인 거 같은데.”

“같은 스킬이지만, 위력은 같지 않은 것처럼 보이던데? 아닌가?”

“그건….”

서윤의 머릿속에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확실히.

같은 스킬이었음에도 위력은 같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저 녀석이 사용하는 스킬은.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같은 스킬.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래?”

“다름은 곧 기회, 같은 힘을 사용하는 더 강한 존재가 있다면, 그만큼 격차가 확실해지는 상대는 없을 거라고. 형만 아저씨가 그랬었어.”

“그 아저씨가?”

“응.”

“음…. 잘은 모르지만, 게임으로 치면 미러전이란 비슷한 느낌이란 건가? 확실히 그런 거면 영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

이 비유가 맞는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비슷한 느낌이지 아닐까 싶었다.

종족이 같거나.

무기가 같거나.

영웅이 같거나 그런 식이면, 실력만이 승패를 판가름 해줄 테니 말이다.

“그럼 저 검은? 저 녀석의 검이 갑자기 내 거랑 똑같은 모습이 됐는데.”

“궁금한가요?”

한 걸음 다가온 나은이 가볍게 검을 흔들어 보였다.

“무형검. 일선에 있을 땐 그렇게 불리는 물건이었죠. 칼날은 제 마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크기나 형태, 예리도와 중량 모두 제가 그린 그대로 재현되죠.”

나은의 검의 모습이 차례대로 변화했다.

마치 모의용 검의 다이얼을 돌렸던 것처럼.

“그럼 유지하는 데만 해도 마나가 들어간단 거야, 뭐야? 왜 그런 귀찮은 검을 쓰는 건데?”

“그야 당연히 여러분의 스킬을 가장 효과적으로 모방하기 위해서죠. 같은 스킬이라도, 같은 무기가 아니면 효과가 떨어지거든요.”

변화하던 칼날이 다시 서윤의 것으로 돌아왔다.

“생각난 김에 한 가지 재밌는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재밌는 이야기?”

“현장에서 상대를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하게 제압하는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거야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거겠지. 당연한 거 아니야?”

서윤이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후훗,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네요.”

“틀리다고?”

“상대를 가장 확실하게 제압하는 방법은 저항할 의사를 없애는 거예요.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단 걸 스스로 인정하게 되면, 신체를 구속할 필요도 없어지거든요.”

나은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거기 가장 적합한 능력이 바로 제 ‘혼의 궤적’. 자신의 힘에 짓밟히는 것만큼 쉽게 마음이 부서지는 방법도 없는 법이죠. 더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더 많은 것을 보이면 보일수록 더 깊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여러분은 아실까요?”

지면을 박찬 나은이 이번엔 역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블러디 러시!”

나은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자 지면이 난폭하게 찢겨 나갔다.

지면을 덮고 있던 흙과 모래가 먼지와 뒤섞여 흩날렸고, 불어온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두 사람을 덮쳤다.

발소리를 따라 움직인 용주는 먼지 지대를 가로질렀다.

이윽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마찰음.

앞을 가로막는 용주와 마주한 나은은 폭력적으로 검을 휘저었다.

두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하얀 서리가 튀었고, 힘의 충돌에 공간이 진동했다.

‘이게 녀석이 재현한 서윤의 스킬인가?’

우측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맞춰 점멸을 사용한 용주가 나은의 뒤를 잡았다.

‘그럼 내 스킬엔 어떻게 반응하는지 좀 볼까?’

현 TF의 눈인 수호의 경우엔 자신의 스킬을 봉인하지 못했다.

아마 자신이 가진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사용하는 건 헌터의 마나가 아니었으니까.

“…….”

벌어진 두 사람의 거리.

나은이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건….’

어깨를 가로지르는 한기가 느껴졌었다.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옷의 일부가 찢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다면 분명, 이 정도론 끝나진 않았겠지.

‘얇고 희미한 마나에 일렁임은 없었어.’

혼란스러웠다.

방금 그 움직임은 분명 스킬에 기인한 것일 텐데.

용주의 마나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내 눈에도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는 건가?’

생각에 잠긴 나은의 머리 위로 크고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 갔다.

1초 뒤 엄습해 오는 강렬한 한기.

빠르게 반응한 나은이었지만, 대미지를 전부 흘려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혹한의 범위는 나은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

지면에 박아넣었던 검을 뽑아 든 용주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1차적으로 부딪치는 칼날과 칼날.

왼손을 날카롭게 세운 용주는 기습적으로 손톱을 휘둘렀다.

그 순간.

“!”

용주의 손목을 짚은 나은이 몸을 수직으로 세웠다.

순식간에 용주의 목을 휘어 감는 두 다리.

원을 그리며 용주의 뒤로 넘어간 나은은 그대로 용주를 집어 던졌다.

“…….”

위아래가 뒤집힌 풍경.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용주는 침착하게 공중을 밟았다.

그런 용주의 등 뒤로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

수직으로 추락한 용주는 그대로 지면에 꼬꾸라졌다.

추락한 용주의 위엔 나은이 있었다.

“놀라운걸요. 설마 제가 보지 못하는 색이 있다니.”

용주에게 시원한 펀치를 선사해 준 나은이 뒤로 물러났다.

용주의 곁엔 재빠르게 치고 들어온 수지가 있었다.

“괜찮아?”

“아~ 물론.”

그만한 충격이었음에도 용주는 꿋꿋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얼굴로 말이다.

“색으로 비유하자면 검정. 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는 블랙홀. 꽃으로 비유하면… 글쎄요. 적절한 게 떠오르지 않네요.”

자세를 낮춘 나은이 자신의 왼 다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엔 은은한 초록빛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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