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 * *
“야….”
자리에 멈춰선 서윤이 두 사람을 불렀다.
서윤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못했다.
“왜?”
“왜는 무슨?! 이게 진짜 맞아? 이게 맞냐고!!”
서윤이 들고 있던 대걸레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세 사람이 있는 곳은 아이들이 놀던 별채였다.
세 사람은 지금 그 강당을 청소하고 있었다.
동제와 나은.
두 사람만 쏙 빼고 말이다.
“들어보지도 않고 제안을 수락한 건 다른 사람이었나 보지?”
“그…! 그건….”
용주의 물음에 서윤이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런 부탁을 할 줄 누가 알았나?! 우리가 무슨 청소부냐고! 그리고 왜 그 두 사람만 쏙 빠져나간 건데? 처음부터 이러려고 둘이 짠 거 아니야?”
서윤의 외침이 강당 내부에 울렸다.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서윤의 시선이 수지에게 향했다.
손걸레와 분무기를 든 수지는 장난감과 놀이기구들을 청소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이곳을 청소하고 있지만, 시작은 이곳이 아니었다.
청소의 시작은 이 큰 수녀원의 외곽 복도에서부터.
일당으로 받았으면, 적은 돈은 아닐 중노동이었다.
체력이라면 꽤 자신 있는 서윤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다고 했잖아. 해야지.”
“아니, 둘 다 왜 그렇게 순응이 빠른 건데, 쓸데없이.”
돌아온 대답에 서윤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반응이 정상적인 반응인 것 같은데 말이다.
“…….”
말없이 서윤에게 다가간 용주는 서윤이 가지고 있던 대걸레를 손에 쥐었다.
“뭐, 뭐 하는 거야?”
“가서 쉬고 있어라. 남은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돼, 됐어!”
힘으로 대걸레를 쟁취한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나도 내가 맡은 역할은 끝까지 할 거라고.”
얼굴을 붉힌 서윤이 다시 대걸레를 밀었다.
“근데 왜 이런 일을 부탁했을까?”
장난감 상자를 닦던 수지가 물었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을 시키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기회다 싶었던 거 아니겠어? 이참에 단물까지 쪽쪽 빨아먹을 심산인 게 분명해. 자기가 갑이란 걸 아는 거지. 그 수녀, 양아치처럼 노란 머리 하고 있을 때부터 느낌이 싸하다 했어.”
물통에 대걸레를 참방거린 서윤이 물기를 쭉 뺐다.
“분홍 머리나 노란 머리나 그게 그거 아니냐?”
“뭐…?! 너 지금 날 그 사람이랑 같은 취급 하는 거야?!”
감정이 실리지 않은 용주의 대답에 서윤이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런 말은 안 했다. 단지 머리 색으로 트집을 잡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
“그럼 네가 보기엔 왜 이런 잡일을 시킨 거 같은데?”
“글쎄. 그거야 끝내 보면 알겠지.”
“뭐야, 그게. 평소처럼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 할 줄 알았더니만.”
“머리를 비우는 게 가끔은 더 좋을 때도 있는 법 아니겠냐. 특히 지금 같은 경우는.”
“뭐….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서윤이 용주를 추월했다.
“이렇게 된 거 그럼 누가 더 빨리 끝내나 한번 해볼까? 내가 반절 네가 나머지 반절. 진 사람이 음료수 쏘기 어때? 안수지 쟤 거까지.”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시작하면 시작이다? 시~~.”
‘작’ 소리보다 먼저 뛰어나간 서윤이 강당을 질주했다.
‘작’ 소리가 들려왔을 즘에는 서윤은 이미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 * *
“누가 사준 음료라 그런지 더 시원하네.”
서윤이 다 마신 페트병을 흔들어 보였다.
내기의 승자는 서윤.
생각보다 차이가 꽤 많이 나는 승부였다.
“그건 그렇고, 이다음은 또 어쩐대? 진짜 날 잡고 안에서 할 수 있는 잡일이란 잡일은 다 시킬 요량인 모양인데. 청소에 가지치기, 그다음에는 뭐 꼬맹이들 줄 간식이라도 만들라고 할 생각인가?”
복도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서윤이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계단 아래엔 나은이 놓고 간 가지치기 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청소야 그냥 악으로 깡으로 하면 되는 거라지만, 이건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거 아니야? 가지치기 같은 거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너네는 해본 적 있어?”
서윤의 물음에 수지가 고개를 저었다.
“이용주 너는?”
“이번 기회에 해보면 되는 거 아니겠냐.”
가지치기용 가위를 집어 든 용주가 두 손으로 가위를 움직였다.
“안 해봤단 소리네. 그래도 뭐 이런 모양으로 해라. 저런 모양으로 해라. 그런 것 정돈 알려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불만스러운 목소리의 서윤이 물장구를 쳤다.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 돌아온 답변은 ‘여러분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랬으니, 적당히 깔끔하게만 하면 될 거다.”
“자신만만이네. 왜 이참에 붉은 손톱으로 가지라도 쳐보지 그래? 옛날 영화처럼.”
“옛날 영화?”
서윤의 이야기에 수지가 관심을 보였다.
“왜 있잖아. 손가락 대신 칼날 달린 사람 이야기.”
“…….”
“뭐야? 전혀 모른다는 얼굴이네. 부모님 세대 때는 꽤 유명한 영화였다고 들었는데.”
핸드폰을 꺼낸 서윤이 영화 포스터 한 장을 보여주었다.
포스터를 확인한 수지는 용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보고 싶다.
그녀의 눈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왜 그런 이상한 곳에서 통했는지는 몰라도, 포기하는 게 좋지 않겠냐.”
“왜? 못 보여줄 것도 없는 거 아니야? 의료 헌터도 옆에 떡하니 있겠다. 딱히 가위로 쳐 본 것도 아니잖아.”
“…….”
두 사람의 협공에 용주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용주의 손톱을 타곤 붉은 결정이 자라 잡고 있었다.
* * *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고!”
열심히 볼을 휘젓고 있던 서윤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하얀 앞치마와 제빵 모자를 쓴 세 사람은 이번엔 주방에 와 있었다.
“진짜 애들 줄 간식을 만들라니. 미친 거 아니야?! 적당히 하란 말이야! 적당히!”
분노를 실은 서윤이 계란을 깨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계란을 깨는 솜씨가 한두 번 해본 품새가 아니었다.
“말은 그래도 혼자 날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데.”
밀가루를 채 치고 있던 용주가 이야기했다.
가지치기를 할 때와 지금의 서윤은 자신감부터가 전혀 달랐다.
“그거야! 머리 비우기로 했으니까! 아까 그러자면서!”
“그런 것치곤 방금 또 폭발하지 않았냐.”
“그, 그건….”
계란을 깨던 서윤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요리엔 원래부터 관심이 좀 있던 거냐?”
“아…. 뭐, 그렇지. 취미니까.”
요리라면 어릴 때부터 좋아했었다.
제과나 제빵 역시도 관심 있었다.
자기 성격이나 이미지랑 잘 안 맞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뭐 좋은 건 좋은 거니까.
헌터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쪽으로 일을 찾아봤을지도.
“그러냐.”
“그, 그러는 너는? 남자치곤 도구 다루는 게 꽤 능숙한 것 같은데.”
말을 더듬은 서윤이 물었다.
형식적으로 그냥 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용주의 솜씨는 능숙했다.
저기서 헤매고 있는.
누구 씨랑은 다르게 말이다.
“그렇게 보이냐?”
“척하면 척이지. 내 눈은 정확하다고.”
“뭐… 취미는 아니다. 단지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지.”
“상황?”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선 주방은 내 공간이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생계형이라고나 할까.”
“아…. 그래.”
서윤이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왠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린 기분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아…. 응. 미안.”
작은 한숨을 내쉰 서윤의 눈에 수지가 보였다.
하얀 비닐을 든 수지는 뭔가를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어! 야!!!”
“음?”
다급한 서윤의 부름에 수지의 손에 멈췄다.
“너 손에 든 거 그거 뭐야? 그걸로 뭐 하려고?!”
“설탕. 넣으래. 많이.”
“그거 소금이라고!”
부리나케 달려간 서윤이 소금 봉지를 확 낚아챘다.
“그리고 봉지째 푹 붓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계량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소금을 내려놓은 서윤이 수지의 이마를 꾹 눌렀다.
참하게 생겨서, 누가 보면 요리도 엄청 잘할 것처럼 생긴 주제에.
가면 보면 순 허당이란 말이다.
“아무튼….”
무언가를 말하려던 서윤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상황이 상황이란 건 알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가 오냐 싶었다.
지금이라면 용주에게 확실하게 점수를 딸 기회이지 않은가?
그것도 비교 우위를 확실히 점하면서.
“아니다. 우리 이렇게 하자.”
“이렇게?”
“너랑 나랑 각자 만들고 싶은 방법대로 만드는 거야. 그리고 평가를 받아 보는 거지. 이용주 저 녀석이랑 그리고 나머지 다른 꼬맹이들한테.”
“내기하자는 거야? 아까처럼?”
“그래. 내기의 승자는….”
서윤의 시선이 용주에게로 향했다.
“저 너셕이 만든 특별 수제 쿠키 받기. 어때? 축하 메시지까지 담아서!”
“……?”
자신을 가리키는 손짓에 용주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찍혔다.
불똥이 왜 갑자기 이쪽으로 튀냔 말이다.
“응. 그거 괜찮네.”
“흐음~ 뭐야?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이길 가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길고 짧은 건 재봐야 아는 거랬어.”
“아~ 그러셔? 나야 나쁠 거 없지.”
걸음을 옮긴 서윤이 용주의 어깨에 툭 부딪혔다.
“들었지? 그럼 잘 부탁해.”
무슨 자신감으로 내기를 받아들인 건진 몰라도 이 승부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나눠 준 스티커는 다 붙였나요?”
“네~!”
“그럼 고생한 언니 오빠들한테 박수. 그리고 맛있게 먹었단 인사.”
“잘 먹었습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이트보드에는 A4용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해님 쿠키와 달님 쿠키.
두 가지로 나뉜 종이엔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스티커의 편차는 압도적이었다.
“길고 짧은 걸 대본 소감이 어때?”
서윤이 콧대를 높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승부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격차였다.
당연하지.
개량도 제대로 안 하고.
설탕이랑 소금도 구분 못 하는 초짜한테 밀릴 만큼 실력에 자신 없진 않으니까.
“응. 차이가 생각보다 많이 났네.”
“뭐야, 그 시시한 반응은. 근데 왜 이 내기 받아들인 거야? 정말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받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쿠키.”
“……!”
서윤이 순간 흠칫 놀랐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티가 났단 건가? 진짜로?
당황한 서윤의 눈동자는 급히 용주를 찾았다.
다행히도 용주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도 받고 싶어졌었거든. 쿠키. 축하 메시지. 맛있단 말도.”
“…….”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용주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내가 붙일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이건?”
용주가 가지고 있던 스티커를 가운데에 붙였다.
이 한 표가 어디 가냐와 상관없이 승자는 해님 쿠키였다.
“아쉽게 됐네. 난 둘 다 맛있게 먹었는데.”
용주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그래도 승부는 승부잖아. 약속했던 건 받아 가야지.”
재빨리 끼어든 서윤이 이야기했다.
승자는 어디까지나 자신.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는 이 역시 자신인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래, 뭐.”
용주가 남겨 뒀던 쿠키를 건넸다.
“뭐야? 축하 메시지는?”
서윤이 물었다.
축하 메시지를 적을 거면 승자가 정해진 지금 적어야 맞는 거 아닌가?
“거기 안에 있잖냐.”
“흐흠~ 뭐야. 내가 이길 거란 걸 알고 미리 넣어둔 거야?”
기대감에 부푼 서윤이 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에 이름은 없었다.
무미건조한 축하 메시지는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는 그런 내용이었다.
“이게 뭐야?”
“축하 메시지다만.”
“아니! 이게 맞냐고?! 좀 더 성의 있게! 좀 더 감정 있게! 그렇게 할 수 있잖아!”
서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메시지를 기대했던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적어도 이름 정도는 들어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세 분 모두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기대 이상인걸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던 세 사람에게 나은이 다가왔다.
“뭐야. 다음번엔 뭐 세탁이랑 목욕. 화장실 청소라도 시키려고?”
서윤이 쌀쌀맞게 물었다.
용주에게 받은 축하 메시지만 해도 이미 저기압이었는데, 거기에 결정타까지 나타나 버린 셈이었다.
“혹시 원하시나요?”
“퍽이나 원하겠다.”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네요.”
“안 나게 생겼냐고. 잡일이란 잡일은 지금 다 하고 있는데.”
서윤의 짜증에 나은이 싱긋 웃어 보였다.
“제가 보고 싶은 건 거의 다 봤어요. 다음이 마지막. 조금만 더 어울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