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아! 용주 형!”
대화가 한창이던 그때.
길드 안에서 주원이 뛰쳐나왔다.
원래 차고 있던 검집 외에 두 자루의 검집을 등에 이고 있는 주원이었다.
“응? 오빠, 그 검들은 뭐야?”
주원을 올려다본 예나가 물었다.
검을 보러 간다고 들었기에 새 검의 존재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검의 개수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삼도류라니.
그런 것도 할 줄 아는 건가?
“아~ 이거? 금화 형이 부러진 검을 고쳐 준다고 했거든. 거기 필요한 재료들. 금화형이랑 같이 골랐어.”
“검을 고쳐? 직접?”
“응! 대단하지?! 우리 형이야!”
주원이 가슴을 쫙 펴 보였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았던 주원의 얼굴엔 다시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용주 형에 수지 누나에 조사관 형까지. 올 만한 사람은 다 온 거 같은데.”
주원의 물음에 예나가 간단하게 이야기를 요약해 주었다
“음…. 그런 일이 있어구려.”
고개를 끄덕인 금화가 용주를 바라보았다.
“마침 나도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네만.”
“주원의 검에 대한 이야기겠지?”
대충 상황을 파악한 용주가 이야기했다.
“그렇네. 검을 제대로 완성시키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하네. 지금 당장 시작해도 하루아침에 끝낼 수는 없을 걸세.”
“부탁하고 말고 할 게 뭐 있냐고 생각하는데. 애초에 나 혼자 만나러 갔다 올 예정이었었는데.”
“그것도 그렇구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금화가 어깨를 들썩였다.
“혹여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겠네. 그쪽도 이야기 풀리는 거 봐서 연락 주세나.”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금화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쪽 일은 신경 쓰지 말고 거기에만 집중하고 와. 이 녀석이 혼자 이상한 짓 못 하게 옆에 딱 붙어 있을 테니까.”
용주와 나란히 선 서윤이 용주의 등짝을 힘껏 때렸다.
왠지 감정이 실린 듯한 그녀의 손찌검이었다.
“그것참 믿음직스럽구려. 그럼 가세나.”
“아! 네!”
달려가려던 주원이 예나를 바라보았다.
“후딱 가서 고치고 올게.”
“가서 괜히 고구마 아저씨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심부름이나 열심히 해드려. 사고 치지 말고.”
“응. 사고 안 칠게.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주원을 3초 정도 쳐다보던 예나가 어쩔 수 없단 듯 손가락을 걸었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따라가지 그러십니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승우가 목소리를 냈다.
“집사?”
“이용주 헌터 옆엔 안수지 헌터도, 서윤 헌터도 있지 않습니까? 이참에 기분 전환 겸 신선한 공기라도 마시고 오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음…. 그렇지만….”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지금보다 실력을 성장시킬 기회로 삼자는 겁니다.”
“지난번처럼 대련이라도 하자는 거야?”
“아니요. 제가 세 분께 해드릴 수 있는 건 그때 다 해드렸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겁니다. 이미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요.”
“음….”
고개를 든 예나가 승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불신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상황이 되리란 건 아무도 몰랐을 텐데, 생각해 둔 게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알았어. 그럼 같이 가는 걸로. 주원 오빠가 사고 안 치게 지켜보는 겸. 집사가 생각한 그 생각이란 게 뭔지 확인해볼 겸.”
집사가 아무 말이나 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승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강해지고 싶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서 도움이 되고 싶다.
울면서 혼자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싱긋 웃어 보인 승우가 금화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 *
“여기가 목적지인 거야?”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서윤이 물었다.
한참 동안 이동한 차는 한 수녀원 앞에 멈춰 섰다.
길드 앞에 모였던 대규모의 인원은 절반으로 딱 잘려 있었다.
차에 타고 있는 이는 서윤을 포함한 네 사람.
조수석엔 용주가 앉아 있었고, 서윤과 수지가 뒷좌석에 나란히 타고 있었다.
뒷좌석의 두 사람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네. 여기입니다.”
“수도원? 수녀원? 고아원? 뭐 그런 곳인가? 뭔가 이미지가 잘 상상이 안 가는데.”
담장 너머로 보이는 정원과 건물들은 대략 그런 느낌이 들었다.
서윤이 알고 있는 TF의 눈은 수호였다.
그 녀석이 이런 곳에 있다고 상상해 보면….
상상한 머리를 갖다 버리고 싶어졌다.
“연락은 한 거지? 아무도 안 보이는데.”
철문 앞에 선 서윤이 물었다.
정원엔 아무도 없었다.
“연락은 드렸습니다. 일정이 겹칠 수도 있다고 하셨으니, 아마 안에 계실 겁니다.”
앞장선 동제가 철문을 열었다.
“야! 그거 그렇게 막 들어가도 되는 거야?!”
“괜찮을 겁니다.”
정원으로 들어선 동제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화면엔 그녀가 보낸 약도가 있었다.
손으로 그린 걸 휴대폰으로 찍은 약도였다.
본체와 이어진 별채에 다가가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복도에 난 창가로 다가간 동제는 안쪽을 바라보았다.
동제가 온 걸 알고 있단 듯 창가를 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임나은.
여기선 테레사 수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녀였다.
“들어오라고 하시네요.”
“뭐?! 잠깐! 맞아?”
서윤이 잡아보려 했지만 한발 늦은 뒤였다.
손잡이를 연 동제는 이미 문을 열어 버렸다.
“응?”
문이 열리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동제에게 향했다.
“어! 그 형아다!”
“정말이네?”
“다른 오빠 언니들도 있어!”
“와아아~!!”
네 사람을 발견한 아이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떠들고 뛰어드는 아이들은 무질서 그 자체.
카오스라는 그리드의 말버릇이 딱 어울리는 그런 혼돈이었다.
“와아~ 누나 머리가 핑크색이네요! 외국인이에요?”
“아니야! 외국인은 머리 노래! 외계인인 거라고!”
“우와~.”
“누, 누구보고 외계인이래!”
벌떼처럼 달려드는 아이들에게 서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어린애들이라도 그렇지.
살다 살다 외계인 소리까지 들을 줄이야.
“얘들아. 놀던 거 치워야지? 정리 시간이에요.”
인파 속으로 다가온 나은이 자세를 낮췄다.
“네에~.”
“테레사 수녀님, 언니 오빠들이랑 좀만 놀면 안 돼요?”
한 아이의 투정이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음~ 그럼 10분만 딱 부탁드려 볼까요? 여러분들이 직접 부탁드려 보세요.”
그녀의 한마디에 아기 새들처럼 달려드는 아이들.
가장 앞에 있던 동제가 다른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 괜찮지 않겠냐. 그 정도면.”
용주의 한마디에 환호성을 지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가는 동제와 수지.
정확한 이윤 몰라도 서윤과 용주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다.
“뭐야? 이거? 몰래카메라인가?”
썰물처럼 밀려가는 아이들을 보던 서윤이 황당함을 표했다.
“네가 소리 질러서 겁먹은 거 아니겠냐.”
“뭐? 그럼 너는? 왜 너한텐 아무도 안 붙은 건데?”
“글쎄…. 나야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없다만.”
“겁먹었다. 혹시 네 얼굴이 무서웠나?”
퉁명스러운 용주의 대답에 서윤이 씨익 웃어 보였다.
장난 반, 진담 반으로 한 이야기였다.
냉정하게 말하면 용주의 첫인상이 사나운 건 팩트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뭐, 다시 생각해 보니 나쁘지만은 않은 것도 같았다.
공감대를 형성할 공통분모 하나가 생긴 셈이니까.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당신이 동제 씨가 말씀하신 분이군요.”
두 사람에게 다가온 나은이 눈웃음을 보였다.
“네가 선대 눈이냐?”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눈을 감고 있는 그녀.
그녀에게선 수호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호가 후대로 발탁된 데엔 역시 그 부분도 크게 기여한 모양이었다.
“네. 지금은 테레사 수녀라는 이름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본명은 임나은. 편한 이름으로 부르시죠.”
“이용주. 이쪽은 서윤이다.”
“그러시군요. 용주 씨는 동제 씨랑은 말투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시네요. 전 그분과 좀 닮은 부분이 있는 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뭐, 그러냐.”
용주의 시선이 그녀의 두 눈에 머물렀다.
“그 눈은?”
“형태는 있지만, 빛은 담지 못하는 그릇입니다.”
눈을 뜬 나은의 모습에 서윤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당연히 있어야 할 눈동자가 없었다.
있는 건 흰자위뿐.
“그래도 문제없습니다. 여러분들과 거의 비슷하게 보고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만난 TF의 눈도 그런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
“그런가요. 그분에 대해선 제가 아는 바가 없지만, 안타깝네요. 이런 아픔을 겪고 계신 분이 또 있다니.”
나은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이야기는 자리를 옮긴 다음에 이어서 하는 걸로 하죠. 아이들 앞에서 할 만한 그런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요.”
* * *
“이제야 좀 조용하네.”
게스트룸에 들어선 서윤이 한숨을 푹 쉬었다.
10분이란 시간이 그렇게 오랜 시간처럼 느껴진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잘도 어울려 주더라. 나였으면 꿀밤을 한 대 때려 버렸을 텐데.”
수지를 본 서윤이 이야기했다.
동제의 곁엔 주로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수지의 곁엔 남녀의 성비가 대략 7:3 정도로 있었다.
남자아이들의 장난은 상대적으로 더 짓궂은 감이 있었다.
그 또래 남자아이들의 관심 표현 방법은 그런 식이니 말이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의도치 않게 신세를 져 버렸네요.”
방문을 닫은 나은이 네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사정은 대략 들었습니다. 옳지 못한 TF의 행동에 전 관계자로서 대신 사과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은이 용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대로 되먹은 사람도 있긴 있나 보네. 난 태스크 포스는 다 그 눈깔쟁이 녀석 같을 줄 알았더니.”
서윤이 다리를 꼬았다.
“눈을 만났다고 하셨죠? 지금의 눈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재수 없는 꼴불견이었지. 사람을 바퀴벌레라고 부르고 말이야.”
“능력 면에선 어땠나요?”
“강했어. 헌터 스킬 봉인하는 능력.”
자신을 향한 시선에 수지가 대답했다.
“대 헌터용 스킬을 보유 중인 모양이군요. 그것 외에는요?”
“신체 강화, 몸 칼날처럼 만들었어. 자기 기운 숨길 수 있었어. 앞은 안 보이는데 주변을 인식할 수 있는 것 같았어. 헌터 기운 잘 탐지해.”
“그런가요. 확실히 눈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앉긴 했네요.”
나은의 시선이 이번엔 용주에게 향했다.
“초면에 실례지만 용주 씨는 E급 헌터로 보이는데 맞나요?”
“네가 그렇게 본다면, 그런 거겠지. 그게 왜?”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E급 헌터를 잡기 위해 TF의 눈이 직접 움직인다는 게.”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날 보자고 한 거였냐?”
서윤이 용주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저런 이야기 해봤자 마이너스일 뿐이지 않겠는가.
“후훗, 아니라곤 말 못 하겠네요.”
용주의 냉소적인 물음에 나은이 웃음을 터트렸다.
“용주 씨를 보겠다고 한 건 용주 씨가 어떤 사람인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말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니까요.”
나은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당신을 보니 호기심이 하나 생겼어요. 괜찮으시다면 제 부탁들을 좀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부탁?”
“네.”
“부탁‘들’이란 건 부탁이 복수란 소리?”
“그렇죠. 바로 보셨네요.”
“음…. 그 부탁들이란 거 들어주면, 우리 일 도와주는 거지?”
중간에 끼어든 서윤이 물었다.
도움을 구하러 온 입장에서 용주의 말투나 태도는 상당한 감점 요인처럼 보였다.
뭐…. 보기엔 저래도 속은 따뜻한 녀석이란 걸 아니까 이쪽이야 그러려니 하고 있지만, 용주가 누군지 모르는 저쪽이 보기에 용주의 첫인상은 건방지고, 도전적으로 보일 가능성이 컸다.
부탁하러 온 사람의 태도는 전혀 아니란 소리였다.
“상당히 긍정적으로 반영할 생각입니다.”
“그래? 그럼 하자. 할거지?”
“그래. 뭐….”
“좋네요.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첫 번째 부탁은….”
무언가를 중얼거린 나은이 싱긋 웃어 보였다.
나은의 첫 번째 부탁을 들은 서윤의 눈썹은 부자연스럽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