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 * *
“잠을 잘못 잤나. 어깨가 영 뻐근하네.”
헌터 지부의 입구.
계단 아래에서 서윤이 쭈욱 기지개를 켰다.
잠을 아예 못 잔 것도 아닌데, 피로감이 아직 남아 있었다.
지부 앞엔 서윤 이외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금화와 주원이었다.
“좀 주물러 드려요?”
“아니,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주원의 제안을 사양한 서윤이 팔을 빙빙 돌렸다.
어쩌면 잠 때문이 아니라, 어제 답답함에 마구잡이로 휘두른 동작들 때문에 이러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근데요, 어제 그 일은 어떻게 된 걸까요?”
“글쎄. 나야 모르지. 길드건 태스크 포스건 이리저리 붙잡고 귀찮게 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서윤이 반대쪽 팔을 풀었다.
“두 사람 다 뉴스 못 봤나 보구려.”
금화의 이야기에 두 사람의 시선이 움직였다.
“뉴스?”
“그 사건. 공개적으론 카오스 게이트에 의한 일로 처리된 모양일세.”
“카오스 게이트?! 그렇지만 거기 게이트 같은 건 없었는데요?”
주원이 놀라 물었다.
“사실이 아니란 건 나도 아네. 그렇지만 세상은 이미 그렇게 알고 있다네.”
“언노운이 나타나기야 했었지. 신호탄도 터졌었고. 예나네 집사가 한 거랬지 분명?”
서윤이 이야기했다.
승우가 만든 일련의 사건들은 카오스 게이트가 안정화되었다고 믿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설마 그런 것까지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것도 어느 정도 기여한 바가 있지만, 내 생각엔 그냥 이용해 먹기 좋게 놓인 퍼즐을 맞춘 게 아닐까 싶네.”
“그게 무슨 뜻이래?”
“정말로 카오스 게이트가 열렸는가? 조금만 조사해 보면 답을 얻는 건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라네.”
“음…. 하긴 그것도 그렇네. 현장엔 TF의 눈도 있었고, 길드 쪽엔 카오스 게이트 데이터랑 예나네 집사에 대한 정보도 있을 테니까. 그럼 왜 그렇게 된 거지?”
“헌터 길드도, TF도 사건이 진실되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네.”
“길드랑 TF가?”
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용주가 윤현에게 엮였을 땐 그 난리를 피웠던 TF였다.
적어도 TF 쪽에선 줄줄이 소시지마냥 단체로 다 엮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전개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하! 왜? 혹시 자기들이 개입하고도 해결하긴커녕 더 개판이 된 게 창피하기라도 했나?”
코웃음을 친 서윤이 이야기했다.
그나마 그게 제일 납득 가능한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 거라면 아주 쌤통이겠는데 말이다.
“정확한 사정까지 알 수 없네만. 마지막에 TF의 눈이 철수를 결정한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네. 사건의 책임과 최종 판단을 맡은 건 그자였던 거 같으니 말일세.”
“그 녀석이?”
눈에 대한 서윤의 인상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팬텀이나 녀석이나 도긴개긴이라 느낄 정도였다.
그런 녀석이 사건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서윤 입장에선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요. 용주 형 정말 여기서 보기로 한 거 맞죠?”
시계를 확인한 주원이 물었다.
“응. 내가 전화 엿들었을 때 분명 그렇게 말했어. 그리고 약속 시각까진 아직 20분이나 남았어. 조바심 내지 말라고.”
“응? 잠깐만, 엿들어요?”
당당한 서윤의 대답에 주원이 한발 늦게 반응했다.
“그래. 어제 그 녀석이 하던 통화 내가 몰래 엿들었거든. 또 혼자 뭐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말이야.”
“그럼… 용주형은 저희가 여기 온단 거 모르는 거네요?”
“그렇지.”
“아…. 그거 괜찮은 거 맞죠?”
주원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괜찮지. 우리한테 아무 말 안 한 그 녀석이 잘못한 거라고. 나라고 이러고 싶겠어? 이게 다 전과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자업자득. 알겠어?”
“음…. 듣고 보니 또 그렇네요. 이해했어요!”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주원의 얼굴을 보던 서윤이 주원에게 바짝 다가갔다.
“야, 너 나 좀 봐봐. 시선 피하지 말고.”
“왜… 왜요, 갑자기?”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불길함을 느낀 주원은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니까 봐보래도!”
주원의 양 뺨을 붙잡은 서윤이 그와 눈을 맞췄다.
“너 잠은 잔 거야? 다크서클 좀 봐. 좀만 더 기르면 턱이랑 이어지겠어.”
피곤함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원의 상태는 꽤 심각해 보였다.
단순히 피곤한 게 아닌 것 같단 게 여자로서의 감이었다.
“눈은 감고 있었으니 잤을 거예요. 아마도요.”
“왜 그래? 너답지 않게. 고민이라도 있는 거면 속 시원하게 말해 봐. 알아야 우리도 뭘 하지.”
“아…. 음…. 그게요.”
“왜? 변비라도 왔어? 아니면 치질?”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잠시 망설이던 주원이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주원의 검은 부러진 상태 그대로였다.
“실은 저번 전투에서 깔끔하게 박살 나 버렸거든요. 팬텀한테요. 그 전에 팬텀이랑 붙었을 때는 괜찮았었는데.”
“뭐야? 그런 걸로 고민하고 있었어? 부러진 건 아쉽겠지만, 이참에 한번 바꿔 봐. 처음에만 어색하지 새것도 적응하면 괜찮다니까.”
서윤이 자기 검을 톡톡 두드렸다.
“아니요. 저 그게….”
“왜? 돈 때문에? 부족하면 말해. 빌려줄 테니까.”
서윤의 쿨한 제안에도 주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실은 이거 물려받은 검이거든요. 이 검 말고 다른 검을 쓰다니….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거든요. 대련 같은 거 할 때면 모를까.”
“뭐…. 이해는 하는데, 그렇다고 그걸로 계속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이미 부러진 검이 갑자기 딱 하고 붙는 것도 아니고.”
“…….”
부러진 검신을 바라본 주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윤의 말이 다 맞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마음이 쉽지가 않았다.
“부러진 검을 붙일 수 있는 방법. 아니,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가능성이 있다면… 해볼 텐가?”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금화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3초 정도 벙쪄 있던 주원은 놀란 듯 금화에게 달려갔다.
“그런 방법이 있어요, 금화 형?!”
“가능성이라고 했네. 성공 확률은 높아 봐야 50%. 그 이상으론 말하기 어렵네.”
“50%? 그 정도면 엄청 높은 거 아니에요?! 반이나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두들기고, 또 두들겨야지. 망치와 모루로 말일세.”
“망치와 모루요? 설마… 금화형이 직접 고쳐 주시려는 거예요?!”
주원의 머릿속에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금화의 옛 직업은 탐험가이자 갑옷을 엮는 장인.
갑옷과 검은 분명 같지 않았지만, 금화라면 어쩌면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뭐, 일단은 아버지의 대를 잇는 후계자니 말일세. 검도 어느 정돈 다룰 줄 알고 있다네.”
금화의 미소에 주원이 금화를 와락 껴안았다.
“꼭이요! 꼭이에요!!”
“그렇게 부담 주면 내가 곤란하지 않은가.”
주원이 그제야 금화를 놓아 주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네.”
금화가 검지를 펴 보였다.
“문제요?”
“그렇네. 주원 군의 그 검. 복원해도 강도나 위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걸세. 같은 무기와 부딪치면 또 부러질 가능성이 90% 이상일 걸세.”
“…….”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해볼까 하네. 그 검에 다른 검들을 섞는 걸세.”
“섞는다고요?”
“그렇네. 그 검을 베이스로 다른 검의 힘을 빌린다면, 지금보다 더 강한 강도를 가진 검이 될 수 있을 걸세.”
“…….”
“강요하는 건 아니네. 단지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걸 말해 주려는 거였네.”
망설이는 주원에게 금화가 이야기했다.
부러진 검신을 바라보던 주원은 결심한 듯 검을 집어넣었다.
“그 검이란 건… 어떤 걸 골라야 하는데요?”
“결단이 선 건가?”
“네. 지금 이대로면 또 같은 결과를 반복할 뿐일 테니까요. 형한테 부담 주는 건 한 번이면 족하지 않겠어요?”
“그럼 잠시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세나. 아직 시간도 좀 있으니.”
금화가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마음대로 해라.
서윤이 말하고자 하는 건 명확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먼저 열린 뒷좌석에서 내린 이는 예나였다.
“언니! 아직 아무도 안 온 거야?”
버티를 끌어안은 예나가 물었다.
서윤 말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두 사람 더 왔어. 저 안에.”
“안에? 안에는 왜? 화장실이라도 간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사정이 좀 있나 보더라고. 잠깐 검 좀 본다고 갔어.”
“검? 음~ 그렇구나.”
예나가 고개를 끄덕인 그때.
검은색 벤츠 한 대가 길드 앞에 멈춰 섰다.
시동이 꺼지고 두 차의 운전석 문이 거의 동시에 열렸다.
앞차에서 내린 이는 당연히 승우.
뒤차에서 내린 이는 특별 조사관인 동제였다.
“이용주 헌터님께서 다른 분들에게도 연락하신 모양이군요?”
눈에 익은 얼굴들을 확인한 동제가 이야기했다.
“뭐야? 그 녀석이랑 약속 잡은 게 당신이었어?”
서윤이 물었다.
“저여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따로 이야기 안 하신 모양이군요?”
“아니, 뭐 죄송할 거까지야. 그냥 그랬냐는 거였다고.”
서윤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이용주 녀석이랑은 무슨 약속 잡은 거야? 둘만의 비밀 뭐, 그런 거 아니겠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용주 헌터님께서 직접 부르신 건 아닌 모양이네요.”
“…….”
순간 뜨끔한 서윤의 표정이 바뀌었다.
“괜찮습니다. 딱히 여러분께 숨길 이야기도 아니니.”
“그럼….”
“그건 이용주 헌터님께서 오시면 말씀드리는 걸로 하죠. 오는 길에 봤으니 아마 곧 오실 겁니다.”
“봤다고?”
고개를 돌린 서윤이 동제가 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걸어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용주 한 사람이 아니었다.
용주와 나란히 걷고 있는 또 한 사람.
수지가 그곳에 있었다.
“뭐야?”
퀭한 눈으로 용주를 째려본 서윤이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용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네가 잘못한 거야. 네가 꼭꼭 숨기고 아무 말도 안 해서 내가 따라온 거라고.”
“…그러냐.”
갑작스러운 전개였지만, 용주의 반응은 그게 끝이었다.
딱히 숨기려던 의도가 있던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까 내 질문은? 왜 둘이 그렇게 딱 붙어서 오는 건데?”
서윤이 수지의 얼굴을 삿대질했다.
“그거야 뭐…. 이 녀석이 멋대로 찾아왔으니까지.”
“뭐?! 그럼 너네 집 문이라도 두들겼다는 소리야?”
“두들긴 적 없어.”
용주 대신 수지가 이야기했다.
“문 안 두드리고 초인종 눌렀다. 그런 재미없는 말장난이나 하려는 거야?”
“으응. 아니, 초인종도 안 눌렀어.”
“뭐야. 설마 도어락 비밀번호라도 알고 있는 거야? 아니면 혹시 저번에 줬던 그 이형 뭐시기로 집에 맘대로 쳐들어갔단 거야?”
“으응. 둘 다 오답.”
“하아…?”
서윤이 황당함을 표했다.
“이 녀석. 어제 헤어지고 나서 줄곧 따라왔었다. 무슨 말을 해도 갈 생각이 없어 보이더군.”
“어제? 어제라고?”
서윤이 사슴만 한 눈망울을 깜빡였다.
“자, 잠깐만! 그럼 어제부터 쭉 같이 있었단 거야?! 잠은?! 목욕은?!”
“동생 방이 비어서 거기서 자라고 했다. 입고 있는 옷도 동생 거고.”
“뭐…? 뭐어어?!!”
서윤을 지나친 용주는 동제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어제 했던 이야기는 사실이겠지?”
“네. 태스크 포스의 선대 눈. 그가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당신을 보고 도움을 줄지 말지 결정하겠다고.”
“응? 잠깐만요! 태스크 포스의 눈이란 사람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었어요? 그래서 공석이었다고.”
놀라 물었던 예나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 왠지 남들 앞에선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자세히 말씀드리긴 좀 복잡합니다만, 선대 눈은 살아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한 극소수뿐일 겁니다.”
“그렇…군요. 근데 그 사람이 용주 오빠를 왜 찾는 건데요? 뭘 도와 주려는 건데요?”
“제가 그분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팬텀을 찾게 도와달라고. 진범을 잡으면 TF도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런데….”
작은 한숨을 내쉰 동제가 뒷목에 손을 올렸다.
“이미 TF와 크게 한판 벌이신 모양이시더군요. 제가 충돌은 피해 달라고 그렇게 말씀드렸건만.”
“뭐… 노력은 했다.”
용주의 뻔뻔한 거짓말에 예나가 입술을 씰룩였다.
저렇게 당당한 얼굴, 당당한 목소리로 노력은 했다라….
거짓말도 저 정도면 인정해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예나가 기억하는 용주의 노력은.
한판 붙으려는 노력이었던 거 같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