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 * *
“왜 여기까지 따라오는 거냐?”
어둑해진 하늘.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에서 내린 용주가 물었다.
용주의 옆엔 수지가 있었다.
용주와 수지.
두 사람 모두 옷은 갈아입은 상태였기에, 좀비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
돌아온 대답에 용주는 작은 한숨을 삼켰다.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돌아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집으로 가려고?”
“그래.”
“괜찮겠어? 필요하면 우리 집으로 와도 되는데.”
“고맙지만, 마음만 받는 걸로 해둘게.”
“해둘게…. 뭔가 평소랑 조금 다른 말투네.”
“…….”
콕 집어서 들어오는 수지의 이야기에 용주가 시선을 피했다.
“의외였지?”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수지가 물었다.
“TF가 물러간 거? 아니면 TF가 우릴 물어뜯지 않은 거?”
용주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번에 휘말린 일은 지난번 윤현과 엮였던 일에 상위 호환이라 할 수 있었다.
민간인들에게 피해가 간 부분은 동일하지만, 상대가 전혀 달랐으니 말이다.
TF가 마음만 먹었다면, 지난번보다 더 끈적하게 자신들을 물어뜯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용주 일행이 겪은 건 간단한 현장 조사와 경위를 이야기하는 수준.
TF 쪽에선 어떠한 조치도 취해 오지 않았다.
“둘 다.”
“그래, 뭐. 확실히 의외긴 의외였지.”
용주의 머릿속에 마지막에 나눴던 수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TF의 움직임이 변한 것은 분명 그 녀석과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이 아닌 집으로 가는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지금의 TF가 어떻게 나올지 보고 싶었으니까.
“실례하겠습니다.”
용주를 따라 들어온 수지가 이야기했다.
불 켜진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용주는 예은의 방 상태부터 확인했다.
교과서와 문제집.
가끔 가지고 노는 휴대용 게임기.
그리고 즐겨 입는 옷들 정도가 방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저건 뭐야?”
방문 밖에서 용주를 기다리던 수지가 물었다.
수지가 가리킨 곳은 예은의 책상 위.
책장 그림자 아랜 알록달록한 만득이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이거 말이냐?”
빨간색 만득이를 집은 용주가 물었다.
“응.”
“만득이라고 불리는 건데, 본 적 없는 거냐?”
“만득이? 부적 같은 거야?”
“아니.”
용주가 만득이를 던졌다.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린 만득이는 수지의 손에 정확히 착지했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야. 그냥 장난감 같은 거지.”
“장난감?”
두 손으로 만득이를 감싼 수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르거나 힘주지 않고 아기 새를 다루듯 만득이를 들고 있는 수지였다.
“그래. 세 개 다 동생이 직접 만든 거다. 공부하다 한 번씩 조물락거리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기분 좋다면서.”
파란색 만득이를 잡은 용주가 얼굴을 꾸욱 뭉갰다.
위아래로 길쭉하던 만득이의 얼굴은 펑퍼짐하게 눌려 있었다.
“기분이 좋아?”
용주를 흉내 낸 수지가 만득이를 꾸욱 눌렀다.
부드러우면서 탄력 있는 촉감은 확실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럼 이걸 막 괴롭히면서 좋아하는 거야?”
양 볼을 쭈욱 잡아당긴 수지가 물었다.
“그렇게 말하면 조금 위험한 사람처럼 들리지 않겠냐?”
“음…. 그런가?”
머리 위로 만득이를 든 수지가 볼을 좀 더 잡아당겼다.
“야! 잠깐…!”
순간 위험을 감지한 용주가 수지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아….”
한발 늦은 뒤였다.
한도를 넘어버린 만득이는 하얀 밀가루를 뱉어 내며 축 늘어져 버렸다.
“…….”
갑작스럽게 밀가루를 뒤집어쓴 수지가 두 눈을 깜빡였다.
옷은 완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
많은 것이 함축된 듯한 수지의 한마디에 용주는 만득이를 내려놓았다.
정말이지.
가끔 한 번씩 이상한 곳에서 엉뚱한 짓을 해준단 말이지.
“만득이라면 걱정할 거 없다. 내가 잘 말해 둘 테니.”
책상 아래 있던 쓰레기통을 챙긴 용주가 만득이를 회수했다.
수지의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했다.
“그보다 그거….”
용주가 수지의 옷을 바라보았다.
밀가루가 묻은 건 옷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카락과 목선을 타고 흘러내린 밀가루가 셔츠 안쪽까지 튀어 있었다.
“갈아입을 만한 옷 찾아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 봐라.”
자기 방으로 간 용주는 대충 옷가지들을 챙겼다.
딱히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옷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골랐다.
“자, 여기.”
방으로 돌아온 용주가 가지고 온 티셔츠를 건넸다.
“씻고 싶으면, 씻어도 되고.”
“아…. 응.”
용주의 안내를 받은 수지는 먼저 씻으러 들어갔다.
거실로 돌아온 용주는 TV를 틀었다.
딱히 보고 싶은 채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이편이 수지가 좀 더 편안함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화면과 소리.
두 가지 모두에 관심을 주지 않은 용주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이참에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의 리스트를 정리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략적인 정보들이야 기억하고 있었지만, 혹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만약 지난번에 역행의 모래시계의 존재를 잊어버렸거나, 조금만 늦게 떠올렸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겠지.
‘섬마을 등대 지도를 빼면 기능 가능한 아이템은 우선 이 정도인가.’
아이템들을 쭉 살펴보던 용주의 시선이 한 가지 아이템에 멈춰 섰다.
‘메모리 다이얼’이란 아이템이었다.
메모리 다이얼의 효과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지금까지 사용했던 아이템들 또한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적재적소에 필요한 효과들을 불러올 테니까.
용주가 한창 기억을 더듬어 가고 있을 무렵.
화장실 문이 열렸다.
“갈아입었어.”
수증기를 몰고 나온 수지가 용주에게 다가왔다.
어디 불편한 곳이 없냐고 물으려던 용주였지만, 용주는 그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불편한 곳이 있단 건 척 봐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생각이 짧았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용주가 뒷목을 긁적였다.
용주의 키는 180.
보란 듯 펼친 수지의 옷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소매는 남아서 손을 덮었고, 허리 아래로 내려온 밑단은 핫팬츠 정도는 거뜬히 가릴 길이였다.
큰 거야 패션으로 입는다 쳐도, 저거는 좀….
“잠깐만 기다려 봐라. 동생 옷 중에 맞는 게 있을지 찾아볼 테니까.”
용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주라고 다 큰 동생 옷 서랍을 막 뒤지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응. 그런데 그건 뭐야?”
“뭐. 어떤 거 말이냐.”
수지의 물음에 용주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거’라고 지칭할 만한 건 여기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그거. 3D 입체 스크린 같은 거.”
“3D 입체 스크린이라고…?”
용주의 동공이 순간 크게 확대되었다.
3D 입체 스크린.
그렇게 말할 만한 건 눈앞에 있는 이 인벤토리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녀가 아무 말이나 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창을 볼 수 있는 이는 줄곧 자신뿐이었다.
남들이 봤을 때 자신은 그냥 TV를 보고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응. 그거.”
수지가 정확히 인벤토리를 가리켰다.
“너… 이게 보이는 거냐?”
“응. 왜? 보이면 안 되는 거야?”
“…….”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 잠시만 있어 봐라. 옷 찾아올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용주는 일단 자리를 피했다.
생각을 조금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해 보자.’
예은의 방으로 돌아온 용주는 기억을 더듬었다.
수지가 처음부터 이것들을 볼 수 있었는가?
그렇게 물으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는 건 둘 중 하나라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던가.
수지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던가.
‘최근 사건이라면 역시 그게 가장 크긴 한데.’
수지의 죽음과 되돌린 시간.
그리고 부정한 개입.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그거였다.
‘그 세 가지 중 하나. 혹은 세 가지 전부가 어떻게 영향을 끼쳐서 지금 상황이 일어났다는 건가?’
죽음.
시간.
생명력.
핵심적인 단어들을 나열하고 보니, 묘하게 닮은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의 방에서 자신이 죽음을 마주했을 때와 말이다.
“갈아입었어.”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수지가 거실로 나왔다.
다행히 이번 옷은 크게 모나지 않게 잘 맞는 느낌이었다.
“생각을 좀 해봤는데, 네가 이걸 볼 수 있게 된 데에 관해.”
용주가 메뉴 패널을 가리켰다.
“너. 이거 오늘 처음 보는 거지?”
“응. 처음 봤어.”
“이게 뭐라고 생각해?”
“음…. 미래.”
“미래?”
“응. 미래.”
수지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한 미래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이건 남들한텐 보이지 않던 거다.”
“응. 그렇구나.”
“…….”
수지는 놀라긴커녕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
용주마저 당황시킬 정도로 말이다.
“그럼 그건 스킬이야?”
“뭐…. 대략 비슷할 거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니까. 아무튼 이게 너한테 보이게 된 이유. 그건 아마….”
이야기를 이어 가던 용주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뚝 끊어졌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은가.
두 가지 질문이 순간 용주의 뇌리를 스쳐 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네 상처를 치료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끊어진 공백을 이은 용주가 이야기했다.
수지의 죽음.
거기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할 필요도 없고, 알아서 좋을 것도 없을 테니까.
“음…. 그러니까 그 키스 때문이란 말이구나?”
“……꼭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냐?”
용주가 시선을 슬쩍 피했다.
기껏 돌려 말했더니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들어올 줄이야.
“그럼 아니야?”
“…인공호흡 같은 거였다고 생각해 주면 어떨까 싶은데. 그걸 키스라고 말하진 않지 않아?”
“음…. 그렇구나.”
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거 되게 기분 좋았어. 처음이었거든.”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만한 소리인 거 알고 있는 거냐?”
“응. 그래도 좋았어. 따뜻하고, 포근해서, 의지가 되는…. 또 안기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거든.”
“…그런 생각하지 마라. 넌 어땠는지 몰라도, 난 그런 경험 다시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
“…….”
자기 입술에 손을 올린 수지가 같은 손가락을 용주의 입술에 올렸다.
“그렇게 싫었어?”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인진 몰라도, 네가 그 꼴을 당하는 건 절대 사양이란 말이었다. 그런 개 같은 기분은 한 번이면 족해.”
용주가 고개를 피했다.
이거, 완전 페이스가 말려 버린 기분이었다.
“아무튼 네가 이걸 볼 수 있게 된 건 나 때문일 거다. 혹시 뭔가 더 다른 게 느껴진다든가 하는 건?”
“음….”
용주의 물음에 수지가 자신의 손발을 살펴보았다.
물론, 달라진 건 없었다.
“없는 것 같아.”
“눈앞에 점자라든가 뭔가 다른 게 보인다든가?”
“점자는 모르겠고, 거기 있는 거라면 보이는데.”
“‘인벤토리’.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나타난다든가 하는 건?”
“음…. 없는 것 같아.”
“…….”
그렇다는 건 그녀가 자신과 같아졌단 건 아니란 소리였다.
계승자가 된 건 아니지만,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게 된 상태.
그게 지금 그녀의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냐. 혹시 나중에라도 뭔가 변화가 있으면 말해라.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도울 테니.”
“응. 알았어.”
“그리고 이거 말인데, 굳이 누구한테 먼저 말하지는 않았으면 하는데. 동네방네 소문낼 만한 일은 아니니.”
“응. 그럴게.”
고개를 끄덕이던 수지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배고프네. 시간 좀 걸리니까 여기 아무 데나 대충 있어라. 배 안 고파도 차린 성의 봐서 한 수저라도 들고.”
“아…. 응.”
부엌으로 향하는 용주.
그런 용주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수지는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처음.
용주는 그걸 인공호흡 같은 것이라 말했지만, 수지가 느끼기엔 조금 달랐다.
왜냐하면.
인공호흡은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