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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12화 (212/357)

212화

“고생했다고 들었다.”

러스트 앞에 선 보스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피 웅덩이에 비친 보스의 롱코트는 피에 물든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고 있었다.

“고생?”

“윤현이 자기 멋대로 날뛰었단 거 알고 있다. 네가 녀석을 회수해 왔다고.”

“아…. 응.”

러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현의 상태는 어때 보였었나?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네 의견을 듣고 싶은데.”

“폭주하고 있었어. 완전 불안정.”

“마나와 힘의 측면에선?”

“큰 상승 폭 있다고 느꼈어. 새로운 스킬도 발현시킨 것처럼 보였고.”

“그래?”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스~ 두 사람 다 데려왔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윤현.

그리드의 등을 떠민 엔비가 가장 마지막에 들어왔다.

“원래 계획했던 일이 틀어지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윤현과 그리드.

두 사람을 바라본 보스가 물었다.

“특히 그게 내부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거면 더더욱 말이야.”

“…….”

윤현은 조용히 눈을 깔고 있었다.

그에게 지금 이 자리가 편할 리가 없었다.

“흐흐. 암, 그렇고말고요. 그렇지만 그것 또한 훌륭한 전개이지 않습니까? 예상 범주를 넘어선 사건과 결과. 한마디로 카오스. 인생의 묘미는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데 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그놈의 카오스 타령이야? 왜 아예 카오스 신전이라도 만들고 예배라도 드리지?”

그리드의 음침한 미소에 프라이드가 귀를 후볐다.

“인생의 묘미라. 그래, 그럼 내가 왜 너희 두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

“짐작 가는 부분이라면 있긴 있지요.”

침묵을 지키는 윤현과 달리 그리드는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일에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는 그리드의 태도였다.

“두 사람이 일으켜 준 일에 대해선 들어 알고 있다. 두 사람 다 아주 화려하게 저질러 줬더구나.”

“흐흐흐. 그 정도야 양반이죠.”

“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듣고 싶은데. 두 사람 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테니.”

보스는 우선 윤현에게 시선을 두었다.

먼저 말해 봐라.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 타오르는 분노가, 제 몸에 흐르는 이 불길이 제게 속삭였습니다. 복수를 이루라고.”

처음으로 입을 연 윤현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게 네 목숨을 앗아 가는 결과로 이어질 거라곤 생각 못 한 거냐? 그 정도 판단력과 분별력은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질 리가 없습니다. 제 이 힘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습니다. 심연의 구렁텅이에서 기어 올라온 제가 그딴 녀석에게 질 리가 없단 말입니다!”

“내 말의 의도가 조금 와전되어 전달된 모양이군.”

윤현에게 다가온 보스가 그의 얼굴에 바짝 다가갔다.

“내 손에 죽을 거란 생각은 못 해 봤냐는 의미였는데. 내 말은.”

온화하던 그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타오르던 윤현의 안광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 살기.

이 마나.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두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았을 것이다.

“복수를 이루기 위해 전 이곳에 왔습니다. 제 복수를 이루지 못할 거라면 전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움찔했던 윤현이 다시 용기를 냈다.

그의 반론이 마음에 들었는지, 보스의 눈빛은 다시 온화함으로 물들어 갔다.

“네 복수를 이루지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윤현.”

“방금 그 말이 그 의미가 아니라면 뭡니까?”

“네가 충동적으로 혼자 이루려던 복수는 내 계획에 방해가 되는 복수다. 너는 팬텀의 일부. 네 복수가 팬텀에 악영향을 주는 건 절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팬텀의 계획에 제 복수가 방해가 된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그럼 그 팬텀의 계획이란 건 뭡니까? 어째서 제 복수가 거기 방해가 된단 건지 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윤현이 외쳤다.

팬텀의 일원이 되고도 시간이 꽤 지났지만, 자신은 이곳에 대해.

이 녀석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거다. 이 안에 있는다면 말이지.”

보스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조바심은 일을 그르치는 법이다. 내 말을 믿고, 내 뜻에 따라라. 그게 네 복수를 이룰 가장 좋은 방법일 거다. 윤현, 네 복수는 우리 팬텀과 무관하지 않다. 내 뜻에 따르면, 넌 네가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거다.”

손을 뻗은 보스가 윤현의 가슴 중앙을 짚었다.

“네가 그 힘을 손에 넣은 것처럼.”

“…….”

보스의 체온이 멀어지자 윤현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원하는 답을 얻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엔 무게가 있었다.

신뢰가 갔고, 이미 증명받은 게 있었다.

“알겠습니다. 팬텀의 일원으로서 복수를 이루어 내겠습니다.”

말없이 윤현의 어깨를 두드린 보스는 걸음을 옮겼다.

그의 다음 목적지는 그리드.

톱 해트를 벗은 그리드는 모자를 가슴 정중앙으로 가져갔다.

“흐흐흐. 지난번에 저희에게 주셨던 임무, 기억하고 계실는지요.”

“그래. 기억하고 있다.”

“실은 그곳에서 재밌는 걸 하나 발견했지 뭡니까? 이번 일은 그 연장선 중 하나였지요.”

“실종된 헌터. 혹시나 했는데 역시 네 작품이었던 거냐.”

“흐흐흐. 역시 보스. 정보가 아주 빠삭하십니다.”

그리드가 매고 있던 관을 내려놓았다.

열린 관 안엔 태영이 들어있었다.

“보스라면 혹시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특별함을.”

“…….”

보스가 태영을 살폈다.

겉으로 보이는 특별함이랄 건 없었다.

다만….

“고농도의 차원 압력.”

“흐흐흐. 역시 보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그리드가 흐믓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정도의 차원 압력이라면, 엄청난 걸 겪고 살아남았다는 증거일 겁니다. 규격 외.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죠. 어떻습니까? 구미가 막 당기지 않으십니까?”

대답 대신 생각에 잠긴 보스는 태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변한 그의 눈빛은 생각의 깊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 그렇지만….”

중간에 혼잣말을 잠시 중얼거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보스는 그 뒤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 근데 이것과 그건 무슨 관계였던 거냐? 연장선이라고 스스로 말했으니,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단 거겠지?”

프라이드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그때.

보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생각을 정리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눈빛이었다.

“흐흐. 규격 외. 이자의 기억 속에서 이자와 같은 존재를 한 명 더 발견해 버렸지 뭡니까? 그 호기심이. 그 탐구심이 절 이끌었지요.”

“이용주 헌터….”

두 사람의 대화에 윤현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방금 이용주라고…!”

발작 스위치가 눌린 사람처럼 반응하는 윤현.

그런 그를 뒤에서 낚아챈 엔비는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 그녀가 보내는 신호는 짧고 명확했다.

“역시 보스. 척하면 척이십니다요. 흐흐. 전 규격 외를 규격 외로 만든 게 뭔지 보고 싶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호기심이기도 하지만, 그게 보스의 연구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근거는?”

“흐흐흐. 상식의 틀을 깨려면 상식의 틀을 깬 무언가가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보스가 찾으려던 그… ‘비밀의 방’처럼 말이죠.”

“…그래서 성과는?”

“흐흐. 직접 한번 보시죠.”

관에서 날아오른 한 마리의 까마귀가 보스의 어깨에 앉았다.

까마귀와 눈동자를 바라보는 보스.

까마귀의 눈동자를 통해 머리로 들어오는 풍경 속에는 세 사람이 보였다.

그리드.

안대를 쓴 구릿빛의 사내.

그리고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네발의 괴물.

모든 풍경을 공유한 까마귀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어떻습니까? 직접 보신 소감이.”

“확실히 흥미를 끌 만하군.”

이용주.

그자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단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목표로 삼았던 것이고.

엔비를 통해 들은 프라이드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에게서 언노운의 기운이 느껴졌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거기에 더해 시각적인 데이터까지 전해 받았다.

모습을 변화하거나,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종류의 스킬들은 쭉 있어 왔지만 이건 그것들과는 달랐다.

저건….

더 이상 헌터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흐흐. 마음에 들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스스로 닫힌 관에 그리드가 몸을 기댔다.

“이건 제 선물입니다, 보스. 어떻게 쓰실진 직접 정하시죠. 원하시면 원래 명령하셨던 일을 그대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만….”

데스 사이드를 꺼내든 그리드가 씨익 웃어 보였다.

“아니. 그 명령은 중지다. 그리드. 테스트해 보고 싶은 게 생겼다.”

“흐흐. 그러십니까?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걸음을 옮긴 보스가 관에 손을 올렸다.

이걸로 완성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걸로 길을 열 수 있다면, 완성엔 거의 도달했다고 봐도 좋았다.

부족한 한 조각.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 조각이 무엇인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 *

‘추궁…당하지 않았어.’

공간을 이동한 러스트가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숲속 연못은 고요했다.

새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서웠었는데.’

윤현과 그리드.

보스에게 두 사람이 추궁당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다음은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두 사람의 공통분모를 자신 역시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보스는 아무런 추궁도 해오지 않았다.

‘일부러? 아니면….’

사건이 보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

그럴 가능성이 과연 몇 퍼센트 정도 될까 싶었다.

형만 혼자였다면 모를까 현장엔 또 다른 헌터가 난입해 왔었다.

번개를 사용하던 백발의 헌터 말이다.

‘…그 사람이 막아 준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싶었다.

사정을 모르는 제삼의 헌터가.

중대 사건의 범인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을 보고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박형만….’

조그마한 돌 하나를 주운 러스트가 연못에 돌을 던졌다.

그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그 사람 집이라면 뭔가 더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날 밤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실제로 아직까지 형만의 집을 찾아가진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곳이 어딘지 알지 못하니까.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이 언제인지 알지 못하니까.

‘방법이….’

아무나 잡고 무작정 물어보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헌터 지부를 찾아가서 정보를 얻는 것 역시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지 않았고.

‘엔비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나마 가장 유력한 방법은 역시 그거였지만, 이건 가장 위험한 방법이었다.

자신에게 너그러운 엔비였지만, 선을 넘는 건 분명 용납지 않을 거다.

‘그럼 물어보지 않고, 직접 알아내면?’

엔비가 가진 정보망.

그것만 들키지 않고 이용할 수 있다면… 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두 가지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들키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던 러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난 알고 싶어. 왜 그 사람이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이 마음속에 들어있는 게 뭔지.’

바위 위에서 뛰어내린 러스트가 연못 위에 섰다.

“난 러스트야. 넌… 누구야?”

연못에 비친 자신에게 던진 러스트의 물음.

돌아올 리 없는 대답을 러스트는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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