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벌레, 벌레. 아까부터 그냥 계속 그 소리지?”
서윤의 강렬한 돌진에 수호가 조금 뒤로 밀려났다.
붉게 물든 서윤의 눈동자는 수호가 흘린 피에 반응하고 있었다.
“너 이 자식…!”
“하! 어때 좀 따끔하지? 벌레한테 물리니까!”
“…….”
“그러는 너야말로 벌레 아니야? 징그럽게 끈질긴 게 딱 바퀴벌렌데.”
억눌려 왔던 능력과 감정을 폭발시킨 서윤이 수호를 몰아붙였다.
힘으로도.
그리도 입으로도.
“용주 형!”
거의 동시에 도착한 주원이 용주를 불렀다.
서윤과 달리 태영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 한태영 형 갑자기 하늘로 사라져 버렸어요.”
주원이 그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그래?”
태영은 그리드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가 사라졌다는 건 그리드가 다시 회수해 갔다고 보는 게 맞겠지.
프라이드나 러스트가 윤현을 회수해 갔던 것처럼.
그렇다는 건 그리드 역시도 자리를 떴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왜 녀석을….’
그리드가 뭘 노렸던 건지.
뭘 노리고 있는 건지.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거라면….
태영에게 아직 쓸모가 남았단 것 정도.
그 필요가 다하기 전까진 적어도 태영의 목숨이 끊어지는 일은 없을 거다.
그걸….
위안이라고 해야 할진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거….”
주원이 끌고 온 검 한 자루를 건넸다.
선명한 룬문자가 새겨진 무명왕의 룬검이었다.
“왠진 모르겠는데, 검이 절 밀쳐 내는 것 같더라고요. 어찌어찌 가지고 오긴 했는데….”
룬검은 주원의 손에 들려 있지 않았다.
주원의 손에 있는 건 찢긴 현수막의 일부.
룬검은 그 끝에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넌 여기 있어라. 괜히 더 움직여서 상처 벌리지 말고.”
룬검을 집어 든 용주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것들을 이룬 주원은 왼쪽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았다.
“정말 짜증 나게 구는군!”
“누가 할 소린데?”
서윤의 공격을 받아 낸 수호가 주먹을 휘둘렀다.
왼손으로 수호의 팔을 짚은 서윤은 오른발을 힘껏 내질렀다.
면상을 정확하게 가격당한 수호가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
‘칫…! 겨우 이 정도 공격에.’
몸이 삐걱거리는 게 느껴졌다.
설마 헌터들 따위한테 이 정도로 고전할 줄이야.
그것도 A급이나 S급도 아닌 저런 형편없는 놈들에게….
“자리부터.”
전장엔 난입한 용주가 서윤과 나란히 섰다.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
“벌레면 벌레답게 어둠 속이나 기란 말이야.”
2 : 1의 상황에 직면한 수호는 남은 힘을 끌어모았다.
“다크 카니발(Dark Carnival).”
안대에 손을 올리는 수호.
“그렇게 둘 줄 알고?!”
번개처럼 치고 들어온 서윤이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뭐야?!’
앞이 깜깜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것들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블러디 아이는 분명 발동 중인데….’
단순히 주변이 어두워진 거라면 자신이 녀석을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시야를 마비시키는 스킬인가?’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서윤의 얼굴에 거대한 충격이 전해졌다.
수호의 돌려차기에 정통으로 직격당한 서윤은 그대로 땅을 굴렀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 맞은 기습이라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서윤이었다.
“겨우 빛 하나 가지고 뭘 그래? 앙? 사용해 봐! 날뛰어 봐! 쓸 수 있잖아? 너희 그 잘난 스킬들 말이야!”
나뒹구는 서윤을 따라붙은 수호는 또 한 번 발을 휘둘렀다.
그런 수호의 발을 붙잡는 누군가의 손길.
수호의 발차기를 막아선 용주는 그대로 수호를 패대기쳤다.
“이용주…? 너야?”
위를 올려다본 서윤이 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 있단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
“넌 보이나 보구나? 다행이다.”
“…여기 있어라. 녀석은 내가 상대할 테니.”
서윤과의 거리를 벌린 용주가 수호를 따라붙었다.
“소드 템페스트!”
날카롭게 세운 두 손을 휘젓는 수호.
그의 손에 감긴 싹쓸바람에 지면이 찢겼고, 찢긴 지면이 파편처럼 튀었다.
“그렇게 둘 줄 알고?!”
번개처럼 치고 들어온 용주가 그의 공격을 저지했다.
완성되지 못한 싹쓸바람은 그대로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너 이 자식. 이번에도 내 스킬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거냐?”
용주의 공격을 맞받아친 수호가 물었다.
이 녀석의 움직임은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스킬을 봉쇄하는 이그노얼 나이트메어도 이 녀석에겐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블라인드 아이까지.
“글쎄…. 그런 데 일일이 대답해주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지.”
“이 자식…!”
교전을 이어 가는 두 사람.
계속되는 교전 속에 수호는 뭔가 이질적인 것을 느꼈다.
이 녀석.
회피와 반격에 주력하고 있을 뿐 먼저 공격해 오는 부분에 있어선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이전 전투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해 봤을 때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너… 앞이 안 보이는구나. 그렇지?”
“글쎄?”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네 움직임이 달라졌단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앙?”
용주의 손톱에 팔등을 부딪친 수호는 공격을 이어 갔다.
“어떻게 앞이 안 보이면서 그렇게 움직일 수 있지? 보통 녀석들이라면 허우적거리기 바쁠 텐데?”
“네가 생각하는 ‘보통’에 내가 들어가지 않는 거겠지. 빛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너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빛을 모른다고?”
힘과 힘이 부딪치며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졌다.
“빛을 모른다면 넌 어떻게 빛을 보고 있던 거냐?”
“물려받았거든. 빛을.”
“…….”
용주의 대답에 수호의 주먹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리고.
전투 자세를 취하던 그의 주먹이 서서히 내려갔다.
“하나만 묻지. 헌터가 된 건… 빛을 물려받은 다음이냐?”
조금은 달라진 수호의 억양.
폭발하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던 그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딴 곳에 발을 들인 거냐? 그딴 범죄자 소굴에. 네게 소중한 빛을 물려준 자에게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갑작스러운 수호의 물음에 잠깐의 침묵이 스쳤다.
“나 역시도 헌터들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네 말과 사상에 100% 공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헌터들 중에 너희 TF와 가장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바로 나일 거다.”
“…그런데도 거기 있는 거냐?”
“그래.”
“왜지?”
“지켜야 할 게 있으니까. 해결해야 할 게 있으니까. 이 빛으로 마주해야 할 진실이 있으니까.”
먼저 움직인 용주가 수호를 밀쳐 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똑똑히 해두지. 난 이 눈이 보기에 부끄러운 짓은 한 적 없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
깊은숨을 내쉬는 수호의 머리 위로 헬기 세 대가 날아들었다.
TF.
태스크 포스의 특수대원들을 태운 바로 그 헬기들이었다.
덜컥 열리는 세 개의 문.
총구는 용주와 서윤을 겨누고 있었다.
“철수한다.”
안대를 짚은 수호가 뒤로 돌아보았다.
용주와 서윤.
두 사람을 괴롭히던 어둠은 한순간 물러가고 없었다.
“네? 수호님, 방금 뭐라고….”
“철수한다고 했다. 명령이다.”
“그렇지만….”
“명령이라고 했다.”
“…….”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수호가 한 번 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리드랬던가? 이전 소란도 그 녀석이 일으켰던 거냐?”
등을 보인 수호가 물었다.
“아니. 대신 녀석의 동료가 일으켰던 일이었다.”
“그래? 그 녀석, 부하로 부리던 헌터를 챙겨가더군. 뭔진 몰라도 상당히 만족스럽단 얼굴이었다.”
“…….”
“그 녀석을 돌려받고 싶거든 그 이상한 관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다. 널 스쳐 간 힘들이 녀석에게 흘러가는 걸 느꼈었으니.”
높이 뛰어오른 수호가 헬기에서 내려온 로프를 붙잡았다.
태스크 포스의 모습은 용주의 시야에서 빠르게 멀어져 갔다.
“뭐야, 저 녀석? 갑자기 가버렸잖아?”
용주에게 다가온 서윤이 헬기를 올려다보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진 죽어도 그만두지 않을 것 같았는데, 김이 샐 정도로 마지막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단 생각이 들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용주가 말을 아꼈다.
수호의 지금 반응은 용주가 생각해도 예상외였다.
어쩌면 물려받은 이 빛이 녀석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 눈이.
이 빛이 가지는 무게가 녀석에겐 그 어떤 명예나 맹세보다 크게 보였을지도 모르지.
빛이 당연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빛을 모르는 자들만 알 수 있는 무게가 있었으니까.
“눈을 만난 것까진 좋았는데, 이래서야 성과가 없잖아. 완전 더 난장판이 되기만 했다고!”
서윤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눈의 스킬부터 팬텀의 난입까지.
하나같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투성이였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데.”
“뭐?”
“눈의 성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눈이 팬텀과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란 것도. 눈의 능력에 관한 것도. 그리드에 능력에 관한 것도. 그리고 팬텀이 눈의 감시망을 피해 갈 수를 쥐고 있단 것도. 이번 일이 아니면 알아내지 못했을 정보들이니까.”
용주가 룬검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말하면 그렇긴 한데, 결국 팬텀의 뒤를 밟긴 글렀잖아.”
“방법이라면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거다.”
“무슨 자신감이래, 그건?”
“글쎄. 그렇지만 오늘 여기서 눈을 만난 것도, 그리드를 만난 것도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줄 거다. 뭐, 근거 없는 자신감이지만.”
용주가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그리드를 만난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눈이 그리드를 목격한 게 더 큰 성과였을지도 모른다.
아예 모르는 걸 찾는 것보단, 한 번이라도 본 걸 찾는 게 몇 배는 더 쉬운 법이니까.
게다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눈과의 관계가 온전히 적대적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됐을지도 모른다.
녀석이 지금 물러난 건 순전히 녀석의 심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니 말이다.
협조까진 아니더라도.
조금은 관계의 물꼬가 트였을지도.
* * *
“예은아! 예은아!!”
한가로운 점심시간.
식판을 들고 온 여학생들이 예은의 곁에 자리 잡았다.
“음? 왜?”
“음? 왜? 는 무슨! 우리한테 할 말 없어?”
“해야 할 말이 있을걸? 그런 것 같지 않아?”
“예야~호! 그만큼 기대하고 있단 거지.”
태연하게 고개를 갸웃하는 예은에게 무수히 많은 악수의 요청이 들어왔다.
“해야 할 말?”
예은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똘망똘망 빛나는 저 눈망울들이 뭘 원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에이~ 진짜 끝까지 이러기야?”
“장난치지 말고~.”
“그 정도면 충분히 재미 봤잖아. 어그로 끌만큼 끌었잖아. 응?”
“아….”
친구들의 물음에 예은이 곤란한 듯 뺨을 긁적였다.
딱히 이런 것도, 장난친 것도, 재미 본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빨리! 응? 빨리!!”
“아니….”
“우리 사이 이거밖에 안 됐어?”
“아니, 그러니까….”
“배신이다, 너. 아니, 배신이라고 한 건 취소!”
“아니,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을 좀….”
예은이 진정하란 제스처를 보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
“그걸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물어보잖아. 그러니까 다들 조금만 진정하고.”
예은의 중재에 친구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사람 누구야?”
“그 오빠 누구야?”
기다렸다는 듯 같은 물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 사람?”
“아니, 눈치도 빠른 애가 왜 이래?”
“장난치지 말고.”
“그래그래.”
친구들의 눈이 평소보다 몇 배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수업시간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밝기였다.
“아~ 혹시 그 나 등하교할 때 말하는 거야?”
오빠라는 데에서 힌트를 잡은 예은이 물었다.
“그래! 그거라고!”
예은의 물음에 친구들이 격렬히 반응했다.
테이블을 내려친 친구 때문에 식판에 담은 국물이 넘칠 뻔했다.
“그 사람 누구야?”
“아빠는 아닐 테고, 역시 오빠?”
“친오빠야? 아님 사촌 오빠?”
“차도 있더라? 몇 살이셔?”
“잘생겼더라.”
“수트 핏 작살!”
“여자 친구는 있으셔?”
“뭐 하셔? 응? 느그 오부지 뭐 하시노?”
국물 대신 쏟아지는 물음.
“아니. 하나씩. 뭐라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으니까. 응?”
예은은 또 한 번 진정하란 사인을 보냈다.
“빨리! 그 사람 누구야? 친오빠? 사촌 오빠?”
“설마 남자친구?!!”
갑자기 급발진한 질문에 다른 아이들이 입을 딱 틀어막았다.
친구들의 격한 반응에 다른 식탁에 있던 시선들까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