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지체할 시간 없어!’
1분.
아니 1초도 더 낭비할 수 없었다.
용주는 스팀팩과 할퀴기로 남아 있는 HP를 빠르게 소모시켰다.
그리고.
‘망설이지 마! 지금 망설이면 다음은… 없어!’
망설임 없이 휘두른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꿰뚫었다.
“이용주 헌터?!”
놀란 승우에게 용주는 다가오지 말란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걸로 마지막.
용주의 눈앞에 나타난 ‘역행의 모래시계’를 끝으로 용주의 시야가 어둠 속에 잠겨 갔다.
“…….”
다시 돌아온 시야.
1분 전의 시간으로 돌아온 용주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저 아래 태양과 주원이 보였다.
목에 상처는 없었다.
HP도 정상 범주였다.
광폭화 상태의 강렬한 갈증과 충동이 느껴졌다.
‘돌아왔어.’
선명하게 죽음이 차오르던 그때.
역행의 모래시계에 담긴 모래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걸 봤었다.
모래시계가 돌려준 시간은 단 1분.
누구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고작 1분일 뿐이지만.
용주에게 있어 이 1분은 모든 걸 바꿔 놓을 수 있는 1분이었다.
“카각…!”
지면에 착지한 용주는 주원에게도 태영에게도.
수지의 핏자국에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수지가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더 빨리….’
용주의 손과 발이 한층 더 날카롭게 변이했다.
‘더… 더 빨리…!’
속도를 더 끌어 올린 용주는 아파트를 일직선으로 관통했다.
다른 각도.
다른 구도로 보이는 데자뷔.
지면을 날카롭게 후벼 파며 멈춰선 용주의 모습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간발의 차였습니다. 조금만 더…. 몇 초만이라도 시간이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승우가 고개를 저었다.
수지의 숨은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었지만, 그 촛불도 이젠 너무 희미했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에 기회가 오긴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그녀의 상처에 닿지 못했다.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땐.
이미 거기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
탁해진 수지의 눈동자가 용주를 향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용주를 바라본 수지의 입이 뻐끔거리며 움직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용주는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괜찮아.
딱 세 글자를 머금은 수지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 보았던 바로 그 미소였다.
“…….”
그 세 글자가 어떤 억양과 어떤 의미로 한 괜찮아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이 돼서도 안심하라고 하는 괜찮아 일수도 있었고.
자신을 위로해 준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괜찮아?’라고 자신의 안부를 묻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건 지금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래도….
용주는 수지에게 좀 더 다가갔다.
승우는 조용히 자리를 내어 주었다.
1분 뒤의 미래.
거기 일어날 일을 자신은 알고 있었다.
수지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미래였다.
다른 의료 헌터의 도움을 기대할 순 없었다.
제아무리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된다고 해봤자 살릴 수 없었다.
스킬을 봉인하던 힘은 사라졌지만, 수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기에도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방법이 없다.
그렇게 생각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괜찮아. 살릴 수 있어.’
딱 하나.
방법이 존재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내가 왜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바보같이.’
용주가 베히모스의 몸속에서 봤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의 생명력을 나누어 주던 드워프의 모습을.
“용서해라.”
수지의 앞머리를 쓸어내린 용주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부정한 개입’의 효과로 대상자의 죽음에 개입합니다.
- 대항력이 영구적으로 1 감소합니다.
- HP를 소모해 대상자의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 소모한 HP에 비례해 대항력이 추가로 감소합니다.
두근.
자신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두근.
수지의 희미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것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런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진 그런 감각이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시간에서조차 단절된 그런 느낌이었다.
입술을 타고 수지에게 무언가 흘러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영혼 안개를 타고 적들의 생명력이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느낌이었다.
‘1분….’
부정한 개입의 효과는 이미 죽은 사람을 대상으론 쓸 수 없었다.
그렇기에 1분 뒤의 미래에선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당시엔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나중에 가선 최선이 아니었던 경우가 있다.
이번 역시도 그랬다.
최선이라 생각했던 방법이 수지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최선이라 생각했던 길이 돌아가는 길이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중요한 걸 생각하지 못했고.
골든 타임을 허무하게 날려 버렸다.
왜 그걸 이제야 떠올린 건지에 대한 후회와 미련만이 맴돌았다.
‘적어도 이번만은 그 녀석에게 감사해야겠지.’
후회했을 땐 이미 늦었다.
퀘스트 게이트가 아니었다면.
아니, ‘역행의 모래시계’를 얻을 수 있던 그 퀘스트가 아니었다면, 그 말은 이번에도 똑같이 적용됐을 거다.
만약 거기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했다면, 1분 전의 과거로 미래를 바꿀 수는 없었겠지.
남들에게 없는 시간.
남들에겐 없는 기회.
이것 역시도 그중 하나였다.
“…….”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던 수지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색색거리며 새어 나오던 수지의 호흡 역시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 *
“…….”
수지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용주가 천천히 입을 뗐다.
수지의 목에 난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어 있었다.
HP를 50 넘게 사용했다.
순간 세상이 핑 돌 정도로 빈혈기가 올라왔고, 극심한 피로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역행의 모래시계와 부정한 개입의 페널티로 대항력 역시도 10이나 차감되었다.
평소라면 뭐라 한마디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부정한 개입의 페널티는 대항력 1이라고만 적혀 있었으니까.
설마 그게 그냥 발동 코스트였을 줄이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딴 건 어찌 되든 좋았다.
10이 아니라 20.
20이 아니라 50을 사용한다 해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용서해라. 이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말똥거리는 수지를 내려다보던 용주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까 했던 말의 재방송이었지만, 이것 말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응.”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한 수지는 왼손으로 목을 짚었다.
목소리가 나왔다.
상처도 아물어 있었다.
어두워졌던 시야도 또렷해졌고, 희미해졌던 의식도 다시 선명해졌다.
분명 죽음 속에 잠겨 가고 있었는데.
억지로 그 속에서 끄집어진 그런 느낌이었다.
‘이용주 헌터. 볼 때마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군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승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별의 키스.
용주의 마지막 행동에 승우는 그 정도 의미를 부여했었다.
그것 말곤 해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절망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해석이 완전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설마 그런 것까지 할 수 있을 줄이야.’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
용주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에 한해서였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그것도 죽음을 눈앞에 둔 자의 상처를 이렇게 단기간에 치료할 수 있다니….
C급.
아니, B급의 숙련된 의료 헌터들도 이 정도로 일을 처리하진 못할 것이다.
‘마술사를 이렇게 여러 번 놀라게 하다니. 진로를 잘못 잡은 건 아닙니까, 좀비 헌터?’
솔직히 말하면 뭘 어떻게 한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당사자인 수지가 먼저 묻지 않는데, 제삼자인 자신이 뭘 더 묻겠는가?
“설 수 있겠냐?”
용주가 수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용주의 손을 잡은 수지는 몸을 일으켰다.
용주의 얼굴에서 상당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피를 엄청 많이 흘린 사람같이 피부가 창백했다.
“자상하네.”
손을 뻗은 수지는 용주의 입술을 슥 닦아 냈다.
부르트고 갈라진 용주의 입가는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수지의 터치에 용주는 놀란 듯 두 눈을 깜빡였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뭐… 네가 맨날 해주던 거 아니냐. 돌려주는 게 당연하지.”
“돌려줘?”
수지가 자신의 입술에 손을 올렸다.
순간 얼어붙은 용주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런 상황에 이런 농담을….
아니, 그보다 자신은 왜 녀석의 시선을 피한 거냔 말이다.
거기 그런 의미는 전혀 없었는데.
시선을 피해야 할 이유 같은 거 전혀 없었을 텐데.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안수지 양!!”
한 발 뒤로 물러난 용주의 귀에 금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라의 모습을 한 금화가 전속력으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네. 몸은 좀 괜찮은가?”
금화가 수지의 상태를 살폈다.
옷과 지면에 남아 있는 출혈량이 보통이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위기는 넘긴 것처럼 보였다.
“응. 괜찮아. 문제없어.”
“그렇다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구려. 무리한 부탁인 줄 알지만,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네. 지금 당장.”
다급함이 느껴지는 금화의 목소리에 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금화를 따라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그리드가 베어 냈던 아파트 붕괴 현장이었다.
현장엔 예나와 버티 외에도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두 사람의 만류에도 대피 대신 구조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시간도 시간이었고, 위기감도 고조됐던 터라 다행히 사람이 많진 않았나 보더군.”
매몰자를 찾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나마 잔해를 파헤치는 게 수월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보통의 붕괴 현장과 지금 이 붕괴 현장이 다르단 것이었다.
기적이라고 말해도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보통의 붕괴 현장이나 철거 현장은 외형을 알아볼 수 없도록 산산이 조각나는 게 보통인데 반해, 지금 이 현장은 건물 잔해의 모습이 상당히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었다.
일격에 반듯하게 잘려 미끄러진 게 어쩌면 행운이었을지도 몰랐다.
“이쪽일세!”
금화는 붕괴 현장의 가장 밑바닥으로 안내했다.
도착한 곳엔 조그마한 애완견을 꼭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의식은 진작 잃어버린 사내는 허리 아래가 완전히 짓뭉개져 있었다.
“발견했을 땐 이미 의식이 없었네. 오히려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네. 적어도 쇼크사하지는 않았으니 말일세.”
“…….”
사내에게 다가간 수지는 사내의 상태를 살폈다.
“왈!!”
수지가 사내의 몸에 손을 대자 그의 품에 안겨 있던 강아지가 수지를 확 물었다.
“괜찮아.”
놀라서 뒤로 뺄 만도 하건만.
수지는 전혀 놀라거나 피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오히려 안심하라는 듯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었다.
“끙…!”
수지를 물고 있던 강아지는 미안하단 듯 수지의 손등을 핥아 주었다.
“그거 들어 줄래?”
사내의 허리에 손을 올린 수지가 금화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금화는 사내의 하반신을 누르고 있던 잔해를 치워 냈다.
사내의 하반신의 상태는 처참했다.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마나를 두른 수지는 사내의 허리 아래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부서졌던 뼛조각은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고, 짓뭉개져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던 상처도 조금씩 원래 모습을 되찾아 갔다.
“…….”
수지의 뒷모습을 보던 용주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급히 해야 할 게 있었다.
아니, 그것보단.
아직 마무리 짓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테지.
위로 올라온 용주는 손톱을 세웠다.
“벌레 자식!!”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와 함께 떨어진 이는 다름 아닌 수호.
폭발에 휘말렸던 그는 완전 넝마가 되어 있었다.
“그 이상한 힘은 이제 다 쓴 거냐? 앙? 이 몸이 그 정도로 쓰러져 줄 줄 알고?”
“그리드는 어떻게 된 거냐? 그 녀석은 어디 있지?”
혀를 길게 내민 수호에게 용주가 물었다.
그리드가 그걸로 끝났을 리가 없었다.
“내가 알 바 아니지.”
“더 할 생각이냐? 이제 그 스킬 봉인도 이젠 사용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물론.”
그리드의 행방이 영 마음에 걸렸지만, 용주 역시도 수호에게 들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다만.
‘여기선 안 돼.’
민간인 부상자가 있는 여기선 안 됐다.
우선 자리를 옮겨야….
타다다닥!
그렇게 생각하던 용주의 곁을 무언가 빠르게 스쳐 갔다.
벚꽃처럼 흩날리는 분홍 단발.
“블러디 러쉬!”
수호를 덮친 서윤은 난폭하게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