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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05화 (205/357)

205화

검기보다 한발 먼저 도착한 수지가 궤도 밖에 태영을 내려놓았다.

“수지… 누나?”

고통에 목이 막힌 주원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도망가라고.

피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칼날을 세운 수지가 충격에 대비했다.

그리드의 공격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

그 순간.

수지의 앞에 무언가 떨어졌다.

익숙한 옷.

익숙한 뒤태가 보였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날개…?’

그의 등 뒤로 한 쌍의 날개 같은 게 보였다.

안개로 빚은 듯 희미하게 일렁거리는 날개.

익숙한 뒤태에 돋아나 있는 익숙하지 않은 물건 아래론 자욱한 안개가 내리깔리고 있었다.

맨손으로 참격을 받아낸 용주는 고개를 돌렸다.

용주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주원의 상처는 그렇지 못했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선 꿀렁거리며 계속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지경이 돼서도 손에 꼭 쥐고 있는 검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어떤 상황이 있었을지 대충 알 것 같았다.

“…….”

수지가 검을 든 모습은 용주에게는 제법 낯선 모습이었다.

쿠나이처럼 쥔 단검의 파지법도 꽤 특이하단 생각이 들었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두 녀석 다 부탁해도 되겠냐?”

“응.”

주원에게 달려간 수지가 우선 응급 지혈을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치료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으니까.

“흐음…. 저건 또….”

용주의 재등장에 수호와 그리드의 교전이 잠시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뭐야? 이 구역질 나게 더러운 기분은….”

수호는 실체 없는 안개를 움켜쥐었다.

저 녀석.

날아가기 전이랑은 또 뭔가 달라져 있었다.

녀석이 나타나고부터 굉장히 역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기를 빨리고 있는 것 같다랄까?

이게 최선인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래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흐흐. 계획이랑은 다르지만, 오히려 재밌게 됐어.”

그리드가 지고 있던 관을 내려놓았다.

태스크 포스의 눈과 마주치는 것은 계획엔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나쁘지 않은 전개란 생각이 들었다.

녀석을 몰아붙이기에 충분한 환경이 만들어졌으니까.

“그렇게 나와 줘야지. 암, 그렇고말고.”

태영의 정신을 차지했을 때.

그의 기억 중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그 중엔 그리드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이터가 하나 있었다.

담지 못할 그릇이 분명한데.

담을 수 있는 한계를 한참 초월한 힘을 사용하는 헌터.

규격 외.

말만 들어도 이 얼마나 호기심과 탐구심을 자극하는 단어란 말이냐.

만약 태영을 이용해 저 녀석의 정신력을 한계까지 몰아붙인다면….

만약 녀석이 자신의 손으로 동료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만약 녀석이 자신을 잃어버리고 폭주한다면….

녀석을 규격 외로 만든 게 뭔지.

녀석의 안쪽에 웅크리고 있는 게 뭔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호기심이.

그 탐구심이.

성욕보다 몇 배는 흥분됐다.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지니. 흐흐. 흐흐흐.”

건물 지붕을 따라 도열해 있던 까마귀들이 일순간 날아올랐다.

눈처럼 흩날리는 검은 깃털들.

까마귀에 둘러싸인 그리드의 관은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손도 대지 않은 관뚜껑이 일순간 덜컥 열렸다.

‘저건 또….’

관속에서 뻗어 나오는 하얀 손들.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인지한 용주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문어발처럼 뻗어 나가던 하얀 손들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사방에서 용주를 덮쳐 오고 있었다.

신기전처럼 날아오는 다섯 개의 손을 피해 낸 용주가 룬검을 휘둘렀다.

얼어붙으며 부서지는 손들.

오른쪽 15도로 방향을 튼 용주의 눈동자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사방에서 조여 오는 손들은 줄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그물을 보는 것 같았다.

‘관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나오는 건가?’

자세를 낮춰 달리던 용주가 왼쪽으로 크게 미끄러졌다.

베어 내고 베어 내도 숫자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접근하는 게 생각만큼 쉽진 않은데.’

점멸을 사용한 용주는 팽이 모양으로 감싸 오는 손들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순간 느슨해진 포위망.

타이밍임을 직감한 용주는 빈틈을 파고들었다.

지금이라면 저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날 잊은 건 아니겠지, 앙?! 벌레 녀석!”

갑작스럽게 치고 온 날카로운 일격이 용주에게 태클을 걸어왔다.

“바보 같은 짓을…!”

검을 맞댄 용주가 수호를 노려보았다.

왜 하필 지금이냐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타이밍이었다.

“바보 같은 짓을 한 건 너지. 이 기분 엿 같은 걸로 날 들쑤신 건 네놈이잖아!”

양팔을 하늘 높이 치켜든 원 오브 아이가 용주를 내려쳤다.

일직선으로 찢겨 나가는 대지.

용주의 자세가 무너진 틈을 놓치지 않은 수호는 오른팔로 땅을 짚으며 물구나무를 섰다.

축을 맞춰 떨어지는 두 다리.

단두대처럼 떨어지는 일격에 어깨를 찢긴 용주는 이어지는 원 오브 아이의 후속타에 검을 맞부딪쳤다.

깊게 후벼 파였던 두 줄의 상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가고 있었다.

할퀴기의 2중 중첩.

훨씬 길고 날카로워진 손톱을 세운 용주는 빗겨 치는 수호의 옆구리를 베며 지나갔다.

관에서 뻗어 나온 하얀 손들은 다시금 용주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좀 더 장기전으로 봐야 하나.’

용주의 시선이 그리드에게로 향했다.

영혼 안개의 효과는 녀석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론 녀석에게 치명타를 입힐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이라면 어떨까?

가령….

관을 받들고 있는 저 까마귀들이라든가?

‘녀석들 역시도 영혼 안개의 타깃. 녀석들의 생명력은 상대적으로 적을 거야.’

관 주변에 구름떼처럼 몰려 있는 저 까마귀들에게서 뽑혀 나온 생명력은 안개를 타고 자신에게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수호의 공격에 찢긴 상처가 그토록 빠르게 아물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저것들이 평범한 까마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저것들은 분명 그리드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체들일 것이다.

황금률로 자신이 만들었던 생명체들을 떠올려 보면, 공통적으로 생명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었다.

저만한 크기였다면, 작으면 더 작았지, 크진 않을 것이다.

녀석들은 그리드나 수호와 달랐다.

이 영혼 안개 속에서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그게 용주가 내린 결론이었다.

‘관이 열린 것과 까마귀들이 모여든 것. 둘이 전혀 관계가 없는 건 아닐 거야.’

둘 사이엔 분명 뭔가 있을 거다.

그렇다면 그 연결이 끊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뒤에도 과연 저 능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다시금 빗발치는 그리드의 손길.

교묘하게 각도를 꺾은 용주는 진행 경로에 수호를 두었다.

“너 이 자식!”

수호를 붙잡는 손길들.

벌레처럼 달라붙는 손들을 수호는 맨손으로 잘라 냈다.

‘끌고 가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뻗어 나가기만 하던 손이 당겨지는 움직임이 보였었다.

몇 가닥만으론 수호를 낚아챌 순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 이 공격의 목적은 자신을 저 관 속으로 끌고 가려는 것.

그 뒤의 일까진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거기까진 답을 확신한 용주였다.

그때.

힘없이 추락한 까마귀 한 마리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이건….’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에 그리드의 시선이 움직였다.

추락한 까마귀는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었다.

뭔가 공격받았다는 느낌도 전혀 없었고.

그런데도 까마귀는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하나에서부터 시작된 추락은 도미노처럼 번져 나갔다.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하는 까마귀들.

부유력을 잃어버린 관은 고도를 잃기 시작했고, 이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에 닿았다.

‘원인이라면…. 흐흐, 이건가?’

가면 뒤에 표정을 숨긴 그리드가 위쪽을 곁눈질했다.

잔잔하게 내리깔리는 안개들 사이에 이질적인 물결이 있었다.

은하수처럼.

피워 놓은 향처럼 일렁이는 흐름.

이 물결들의 시작은 각기 달랐지만, 종착지는 같았다.

그리고 그 끝은 바로.

용주였다.

‘형태도 모양도 다르지만, 내 체티와 원리가 비슷한 건가?’

체티의 정신 고갈.

상대의 정신을 차츰차츰 갉아먹어 결국, 고갈되게 만드는 그 능력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더 우위에 있는 힘이라고 정의하긴 애매했지만,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상처 하나 없이 적을 위협할 수 있다라. 그렇다면 나도 마냥 안전하지만은 않다는 건가.’

자신 역시도 저 신비로운 스킬의 영향권 안임을 부정할 순 없었다.

장시간 노출되면, 분명 타격이 없진 않겠지.

‘흐흐. 어떻게 될까? 여기서 계속 노출되면…. 산 채로 생명의 등불이 꺼져 가는 그 기분은 대체 어떤 걸까?’

위험하다?

그런 위기감보단 탐구심이 샘솟았다.

하지만.

‘아무리 호기심을 자극해도, 애초 계획했던 실험 설계보다 우선시해선 안 되겠지. 흐흐. 암, 그렇고말고.’

닫히기 직전 체티에서 뻗어 나간 마지막 손길들.

공허 속으로 사라져 가는 손길들을 그리드는 교묘하게 뒤틀었다.

용주의 시야에서 빠져나온 손길 중 일부는 사라지기 직전 태영에게 닿았다.

“괜찮아요. 혼자 움직일 수 있어…요.”

고통을 억누른 주원이 이야기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마지막 끝맺음이 생각처럼 되어 주지 않았다.

“어깨.”

긴급 지혈을 끝낸 수지가 주원의 어깨를 이었다.

키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었지만, 똑바로 설 수 없던 주원의 어깨는 어찌어찌 수지의 목에 걸렸다.

주원의 시야 끝에 전투 중인 용주의 모습이 걸렸다.

처음 보는 용주의 모습이 놀라웠지만, 감탄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수호와 1 : 1로 공방을 주고받던 전장 속으로 그리드가 데스 사이드를 휘두르며 난입하고 있었다.

“전 됐으니까 용주 형한테….”

“쉿.”

한마디로 주원을 침묵시킨 수지가 태영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

“……!”

죽은 듯 축 늘어져 있던 태영이 갑작스럽게 팔을 휘둘렀다.

본능적으로 반응한 수지의 눈동자에 비치는 낯선 단도.

배경이 되는 풍경들 속엔 흩뿌려진 핏방울이 뒤섞여 있었다.

태영을 내던진 수지는 자신의 목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액체가 뿜어지듯 흐르는 게 느껴졌다.

‘깊어….’

목 옆쪽이라면 주원의 팔이 있었기에 사정이 좀 달랐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베인 곳은 목의 앞쪽.

반응을 한다고 하긴 했지만, 치명상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누, 누나!!”

다급한 주원의 외침에 용주의 시선이 반응했다.

그리고 그 끝에 보이는 광경은 용주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수지의 상처는.

얼핏 봐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태영…. 그렇지만 분명….’

일어나고 있는 태영의 모습은 아까 봤던 기괴한 모습의 재방송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도의 오르골은 분명 효과를 보였었다.

오르골에 대해 아는 게 아닌 이상 그런 반응을 연기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직후에 또다시 정신 지배를 당했다는 가정밖에 할 수 없었다.

‘대체 언제… 어떻게…?’

태영 쪽에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도 빠듯했거니와 곁에 수지가 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건의 원인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것 따위 지금 상황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해야 할 건 수지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

한시가 급했다.

한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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