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 * *
“저게 뭐야?!”
한발 늦게 산에서 내려온 서윤이 놀란 눈을 깜빡였다.
건물이 댕강 잘려 나가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었고, 잘려 나간 건물 창에는 비행기나 배에서나 볼법한 탈출용 미끄럼틀이 펼쳐져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드는구려.”
금화가 무너져 내린 건물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잔해는 도로와 주차되어 있는 차 일부를 집어삼킨 뒤였다.
사람이 없다면 불행 중 다행이련만….
“집사!!”
접근금지 팻말을 뛰어넘은 예나는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는 승우에게 달려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거 혹시 눈이 그런 거야?!”
“설명은 나중에. 우선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걸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나중은 무슨! 대략적인 거라도 좀 알려줘야 우리가 뭘 하지!”
대화에 끼어든 서윤이 따지듯 물었다.
“상황이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팬텀이 나타난 걸로 보입니다.”
“자, 잠깐만요! 팬텀이라고요?! 지금 여기?!”
주원의 언성이 높아졌다.
전개를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다.
“네. 현재 삼파전이 한창 진행 중….”
이야기를 멈춘 승우가 허겁지겁 달려가는 한 아주머니를 붙잡았다.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집에 늦둥이가 혼자 있어! 저기! 저 집이야! 죽어도 데리고 나올 거라고! 난 이러고 못 있어!”
“…그럼 제가 책임지고 데리고 오겠습니다.”
두 손으로 아주머니의 어깨를 붙잡은 승우가 그녀를 진정시켰다.
날다시피 펼쳐 놓은 탈출용 미끄럼틀을 거슬러 올라간 승우는 창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헌터 양반!”
그때.
허겁지겁 달려온 한 노파가 금화를 붙잡았다.
며느리와 함께 달려온 노파의 손엔 양손 가득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저기…! 저 집이 우리 막내 아들내미네 집이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우리 아들은?! 우리 아들은 잘 대피한 거지?!”
노파가 가리킨 곳은 반쯤 잘려 나간 건물이었다.
“…안심하시고 두 분께서도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노파의 손을 꼭 잡아준 금화는 며느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두 사람은 금화의 말에 힘을 얻은 듯 보였다.
“고구마 아저씨 나도 같이 가.”
금화의 생각을 읽은 예나가 한발 먼저 이야기했다.
승우가 집중하고 있던 건 실종자의 수색보단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의 대피.
아마 선택과 집중의 어쩔 수 없는 결과였을 것이다.
아무리 승우라도 혼자 몸으로 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이 정도로 해낸 걸 대단하다고 봐야겠지.
“버티라면 분명 도움이….”
예나의 말이 중간에서 끊어졌다.
자신의 생각에서 모순을 발견해 버린 예나였다.
“그럼 서두르세!”
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린 금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무언의 메시지.
주원과 서윤.
두 사람을 뒤로한 둘은 서둘러 붕괴 현장으로 달려갔다.
“…칫!”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 서윤은 주원의 뒤통수에 꿀밤을 갈겼다.
“누, 누나?!”
갑작스러운 서윤의 폭력에 당황하는 주원.
“뭘 그렇게 여유 부리고 있어?!”
어안이 벙벙한 주원의 면전에서 서윤이 와락 소리를 질렀다.
“아! 그, 그렇죠! 반대편으로 가서 저도 빨리 현장 통제를…!”
“아니! 누가 너보고 그런 거 하래?!”
“네?!”
“그건 내가 도울 테니까 넌 가서 이용주나 도와! 꾸물대지 말고 빨리!”
“네?! 그렇지만….”
“아, 진짜 화나게 할래?! 가라면 좀 가!! 가라고!”
“아…! 네!”
서윤의 강한 명령조에 주원은 사건 중심부를 향해 달렸다.
“분하지만, 이게 최선이야. 정말 분하지만…! 이게 최선이라고.”
서윤이 아이를 안고 내려오는 승우를 올려다보았다.
프라이드에게 당했던 그때에 비하면 조금은 실력이 올랐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의 영향권 안에서 자신은 무력했다.
주원과는 그 점이 달랐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 * *
맞부딪치는 칼과 낫.
기마병과 보병의 싸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었지만, 둘의 검 높이는 한쪽이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진 않았다.
“소링 블레이드(Soaring blade)!”
작렬하는 수호의 스킬.
스케이트를 타듯 미끄러진 수호는 지면을 반듯하게 베어 내며 질주했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뛰어오른 그리드는 수호의 공격을 흘려버렸다.
“날 너무 쉽게 보는군!”
왼손으로 땅을 짚은 수호는 강한 원심력으로 방향을 틀었다.
육망성을 그리며 이어지는 수호의 맹진.
지면에 새겨진 육망성을 본 그리드는 음침한 미소를 머금었다.
“일곱의 중심 자리. 흐흐흐. 그런 것도 나쁘진 않지.”
데스 사이드를 빙글 돌린 그리드가 양손으로 낫을 쥐었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데스 사이드는 칼날이 땅에 닿아있었다.
“데스 클로! (Death Claw)"
올려 치는 그리드의 일격.
낫이 그린 궤도를 따라 칠흑빛의 검기가 뻗어 나갔다.
뻗어 나간 검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같은 각도를 공유하는 여섯 개의 검기.
까마귀의 발톱 자국을 연상시키는 검은 물결은 건물 벽을 타고 돌아서는 수호에게 곧장 뻗어 나갔다.
‘벌레 같은 네 자만심. 정면에서 쳐부숴 주마!’
맹렬한 기세로 부딪치는 스킬과 스킬.
두 스킬의 충돌에 건물 외벽을 감싸던 현수막이 풍선처럼 찢겨 흩날렸다.
찢겨 사라진 여섯 개의 검기.
굉음을 내며 물러난 수호가 그리드를 노려보았다.
녀석의 공격은 찢었지만, 이쪽의 속도 역시도 완전히 상쇄당해 버렸다.
무승부.
방금 그 합은 잘해 봐야 그 정도였다.
“용주 형! 수지 누나!!”
타이밍 좋게 달려온 주원이 용주와 합류했다.
일부러 노린 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충돌 덕분에 보다 쉽게 합류할 수 있었던 주원이었다.
“저 사람이 팬텀이에요? 아니! 그보다 이 분은…?”
당황한 주원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팬텀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는데, 쓰러져 있는 이 사람.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설명하자면 길다. 다른 녀석들은?”
“승우 형이랑 서윤 누나는 사람들 통제랑 대피를 돕고 있어요. 예나랑 금화 형은 혹시 있을지 모를 매몰자를 수색하고 있고요!”
“그래?”
용주가 수지를 바라보았다.
“맡겨도 되겠지?”
용주가 아까 했던 물음을 다시 던졌다.
만약 매몰자가 있다면 부상은 피할 수 없었을 거다.
눈의 범위를 벗어나면 수지도 다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 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수지가 여길 벗어나는 게 맞으리라.
“응.”
태영의 어깨와 허벅지를 감싸 안은 수지가 태영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히이이힝!!”
거대한 말 그림자가 세 사람을 덮쳤다.
‘이 녀석…. 방금 그 움직임은…….’
놀란 용주의 눈동자에 중무장한 말의 모습이 비쳤다.
까마귀 깃털을 흩날리며 다가오는 녀석의 모습이 마치 영화 테이프를 장면 장면 끊어 놓은 것 같았었다.
“흐흐. 미안하지만, 그건 두고 가줘야겠는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점멸을 사용한 용주는 수지의 앞을 막아섰다.
두 다리를 치켜올린 전투마의 힘찬 뒷발차기.
사정없이 올려 친 말굽에 가격당한 용주는 아파트 3층 창을 깨고 안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용주 형!!”
역날검을 움켜쥔 주원이 이를 악물었다.
거대한 전투마와 데스 사이드.
역병 의사 가면을 쓴 이 사내에게선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팬텀을 만나는 게 처음도 아니련만….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전에 만났던 팬텀과는 뭔가 격이 다르단 느낌이 들었다.
챙!
칼날을 부딪친 순간 주원의 느낌은 확신이 되었다.
딱 한 번 칼을 부딪쳤을 뿐인데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낫질 한 번에 밀려난 거리는 도약한 거리에 배는 되었다.
‘멈춰. 멈추라고! 또 지난번처럼 후회하고 싶어?!’
마지막 한 방울의 호흡까지도 쥐어짜 낸 주원은 팬텀과 처음 격돌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부족함이 예나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이번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싫어! 싫다고!’
힘껏 뛰어오른 주원이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왼쪽 어깨 뒤로 끌어당긴 검.
그리드보다 고점을 점한 주원은 칼날을 뒷목까지 당겼다.
“월영식 - 청(靑)!”
사선으로 회전하며 떨어지는 주원의 일격.
칼날이 그리는 궤도를 따라 푸른빛이 채워졌다.
15도 기울어진 채 추락하는 푸른 고리.
회전하는 동안에도 정확히 베어야 할 것을 보고 있던 주원은 원심력을 실은 검을 휘둘렀다.
“폴링 소울(Falling Soul).”
주원의 도약을 지켜보던 그리드가 사이드를 휘둘렀다.
데스 사이드를 타고 피어오르던 아지랑이가 일순간 칼날로 빨려 들어갔다.
아지랑이를 머금은 칼날엔 독특한 무늬가 생겨 있었는데, 마치 비좁은 거울 속 세계에 구겨 넣어진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얼굴을 형상화해 놓은 것 같았다.
맞부딪치는 칼날과 데스 사이드.
“꽤 좋은 시도였다고는 생각하지만….”
“……!”
칼날을 휘두른 주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뺨과 콧등을 타고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무수히 많은 칼날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두 동강 난 자신의 칼날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흐…. 유감이네.”
주원의 검을 댕강 베어 낸 그리드가 낫을 휘둘렀다.
주원의 명치를 정확히 꿰뚫는 그리드의 낫.
실없이 웃어 보인 그리드는 잡어를 던지듯 주원을 내동댕이쳤다.
“…….”
마른침을 삼킨 수지는 태영을 어깨에 이었다.
허벅지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드는 수지.
쿠나이를 쥐듯 단검을 움켜쥔 수지는 그리드를 노려보았다.
“흐흐. 아서라. 지금 네 상태론 내 상대가 될 수 없단 걸 스스로도 잘 알 거라 생각하는데.”
수지의 전투태세에 그리드가 실없이 웃어 보였다.
손잡이부터 칼날까지.
검을 구성하는 모든 부위가 백옥같이 새하얀 수지의 단검.
그립을 타고 오른 새하얀 뱀 한 마리가 크로스 가드에 머리를 올려놓고 있는 저 단검은 한눈에 봐도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작다고 무시할 만한 물건도 당연히 아니었고.
분명 상당히 높은 등급의 언노운에게서 나온 매우 희귀한 물건일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상대하고 있는 적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 녀석부터 우선 내려놓지 그래? 다쳐서 서로 좋을 것 없잖아. 안 그래, 친구?”
“…….”
속도를 높인 수지는 그리드와의 거리를 좁혔다.
“좋은 움직임이군.”
데스 사이드를 휘두르는 그리드.
사이드의 끝날에 비스듬하게 단검을 부딪친 수지는 칼날을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히이잉!!”
그리드의 말 아래로 파고든 수지는 90도로 방향을 꺾었다.
“피어싱 블레이드!”
그 순간 작렬하는 수호의 스킬.
옆구리를 가격당한 그리드의 말이 붕 뜬 채 건물에 처박혔다.
“이제야 땅으로 끌어 내려졌군, 이 벌레 녀석!”
등장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두 다리로 땅을 딛는 그리드.
그런 그리드에게 달려든 수호는 거침없이 공격을 이어 갔다.
“감히 태스크 포스의 눈을 상대로 한 눈을 팔다니…! 정수호!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확실하게 부숴 주마!”
두 사람의 충돌에 지면에 선명한 상처가 생겼다.
“그래. 이것까지 생각해서 그런 동선을 짠 거였나 보군. 한마디로 와이즈(Wise).”
정색을 한 그리드의 눈동자가 수지를 쫓았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 꿈틀거린 게 아니었다.
도주가 아닌 공격을 택한 건 이쪽의 시선을 온전히 자신에게 향하게 하기 위함.
저 녀석의 방해꾼은 곧 자신의 훼방꾼이기도 했다.
지면에 바짝 붙어 미끄러지는 수호의 공격을 피해 도약한 그리드는 능숙하게 사이드를 돌렸다.
1,080도 회전시킨 사이드를 내려찍는 그리드.
그리드의 시야에 바삐 움직이는 수지의 모습이 보였다.
이 기회에 어떻게 해서든 거리를 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 전에 뭔가를 챙기고 싶어 하는 걸지도.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데스 클로.”
낫이 그린 궤도를 따라 여섯 개의 검기가 사출되었다.
“……!”
그리드의 공격에 수지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이 공격.
수호를 노린 것도.
그렇다고 자신을 노린 것도 아니었다.
뻗어 나가는 검기 끝에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주원.
치명상을 입은 주원은 일어나려 발악하고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