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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03화 (203/357)

203화

‘뭔가에 세뇌당해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왼손을 움켜쥔 용주는 태영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둔기에 얻어맞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태영은 아스팔트 위를 뒹굴고 있었다.

태영의 상태는 어떻게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 이상한 회색 세계에서 봤던 사람들처럼.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힘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여긴 녀석의 범위 안일 텐데….’

동시에 다른 의문도 들었다.

여긴 눈이 펼친 효과 범위 안쪽이었다.

원 오브 아이가 발동되며, 눈의 형태가 변화하긴 했지만, 하늘엔 여전히 눈들이 떠 있었다.

헌터들의 스킬을 무력화 시키는 그 효과가 계속 유효하다면, 태영에게 걸린 무언가에도 영향이 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술자가 효과 범위 밖에 있어서 그런 건가?’

일단은 그런 가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아니면….

녀석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스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예외의 케이스라든가.

눈의 힘보다 더 상위의 힘으로 녀석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든가.

‘우선 녀석부터 어떻게 해야 해.’

어느 쪽이 정답이건 우선 태영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전투에 방해가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대로 두면 얼마 못 가 쓰러질 게 분명했다.

다신 일어나지 못할지도….

룬문자에 빛을 발한 용주는 가로로 검을 뻗었다.

지면을 가로지르는 얼음의 파도.

태영의 발밑에 도착한 얼음길은 태영의 발목을 휘어 감았다.

검을 치켜든 태영은 거칠게 얼음을 할퀴었다.

자신이 다치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친 동작이었다.

용주는 곧장 태영을 덮쳤다.

엉망으로 난자당한 그의 발과 발목에서 흘러나온 피는 얼음 조각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눈의 스킬을 피해 갔다면, 이건 어떨까?’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한 가지 아이템을 확인했다

황도의 오르골.

은하수가 담긴 수정구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오르골은 해로운 마법을 해제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용주는 먼저 4색 큐브를 꺼내 들었다.

일루미나티의 상징처럼 생긴 피라미드형 큐브는 각 면이 다른 색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랑 잠깐 놀아 줄 녀석이 필요해.’

네 면엔 각기 다른 기호들이 들어가 있었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마름모.

각 기호가 뭔 상징하는지는 겪어 본 용주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 가장 잘 버텨 줄 녀석이라면 역시.’

▷ ‘네모’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위잉~! 윙윙~!!”

용주의 사인이 떨어지자 요란한 전기톱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뭐야?”

용주와 태영.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던 수호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한 걸음 물러났다.

키도 체구도 장대한 사내는 박스라도 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서 좀 놀아 줘라.”

전기톱에 시동을 건 네모는 수호에게 돌진했다.

신발에 모터라도 단 것처럼 달려오는 네모는 불도저나 다름없었다.

“13일의 금요일이야, 뭐야 이거?! 어디서 나타난 거냐, 넌?!”

네모의 돌진을 막아선 수호는 녀석의 힘을 교묘하게 흘려보냈다.

그런 수호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네모의 드리프트.

원 오브 아이로 전기톱을 막아선 수호는 네모의 옆구리를 역으로 베어 냈다.

어디서 튀어나온 녀석인진 몰라도 헌터는 아닌 것 같았다.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네모에게 시간 벌이를 맡긴 용주는 황도의 오르골을 꺼냈다.

그리고.

오르골을 태영의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오르골에선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한 수정구엔 황도 12궁의 모습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난폭하게 날뛰는 태영은 소리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3초.

5초.

10초가 지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5초가 지났을 무렵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탁하게 변해 있던 태영의 동공에 희미하게나마 또렷한 빛이 보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태영의 움직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귀신이라도 들린 듯 날뛰던 발악은 차차 누그러들었고, 피부에 생기가 돌아왔다.

“좀비… 헌터…?”

순간, 태영의 입에서 기어가는 듯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걸로 마지막.

의식을 잃은 태영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다행히 효과가 있나 보군.’

의식을 잃은 태영에게서 내려온 용주는 수호를 바라보았다.

사용을 마친 황도의 오르골은 은하수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전기톱 소리 때문에 닿지 않았는지.

그게 아니면 해로운 마법에 걸린 상태가 아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두 녀석에겐 크게 효과가 없는 듯했다.

네모와 수호의 전투는 수호가 다소 압도적으로 리드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문제는 네모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

잔 상처 정도는 금방 수복시켜 버리는 네모였다.

“헌터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인간도 아니고. 대체 뭐야? 뭐냐고?!”

수호는 당황한 듯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 녀석이 갑자기 뿅 튀어나온 것도 모자라, 전기톱을 휘둘러대고 있으니.

녀석의 입장에선 귀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태영 녀석을 안전한 곳에 좀 두고 싶은데…. 녀석들은 아직 먼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용주에게 승우와 수지의 기운이 느껴졌다.

딱 좋은 타이밍에 나타난 두 사람.

“…….”

승우는 수호와 대치 중인 정체불명의 사내에 시선을 두었다.

“한태영…?”

그와 달리 수지는 곧장 용주와 태영에게로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태영의 상태를 확인한 수지가 물었다.

부상이 심했지만, 태영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왜 녀석이 여기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이 녀석 뭔가에 조종당하는 상태였다. 추측건대 팬텀이 뒤에 있겠지.”

“팬텀….”

“눈이 갑자기 이동을 시작한 것도 이 녀석 때문인 것 같다. 저 녀석, 다짜고짜 이 녀석을 공격하고 있었다.”

수지는 습관적으로 태영을 치료하려 했지만, 마나가 생각대로 반응해 주지 않았다.

여기는 다시 눈의 스킬 범위 안이었다.

“저건 아군인가요?”

승우의 물음에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우선 사람들이 이곳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겠습니다.”

창 여기저기에 놀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소란에 도망가긴커녕 관심을 가지고 이쪽 골목으로 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눈이 지금처럼 계속 날뛴다면, 재산 피해뿐만 아니라, 인명 피해까지 날 수도 있었다.

“맡겨도 되겠지?”

고개를 끄덕인 승우는 왼손을 지팡이에 올렸다.

일순간 잡아당긴 오른손.

칼집에서 분리된 칼처럼 지팡이 손잡이가 쑤욱 뽑혀 나왔다.

지팡이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승우의 검.

승우의 검은 얼핏 보면 레이피어처럼 생겼었다.

하지만 레이피어가 아니었다.

찌르기에만 특화된 레이피어와 달리 승우의 검은 베는 데에도 특화되어 있었다.

하나처럼 보이는 칼날은 24개 칼날에 합쳐진 결과.

촘촘하게 배치된 24개의 칼날은 머리를 맞댄 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손 가득 10장의 트럼프 카드를 꺼내 든 승우는 카드를 흩뿌렸다.

데칼코마니를 그리며 양쪽 화단으로 날아간 10개의 카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른 작은 연기 속에선 10개의 풍선이 날아갔다.

상승하며 커지기 시작한 풍선들은 금세 애드벌룬만큼 커졌고, 두 아파트 꼭대기 층에서 서로 엉겨 붙었다.

그리고.

“위험하니 다들 떨어져 주시겠어요?”

승우의 손을 떠난 검이 풍선들을 하나씩 터뜨리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터진 10개의 풍선 속에선 십여 마리의 비행 타입 언노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노운의 등장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혼비백산 달아나고 있었다.

“언노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검에 삼켜진 빈껍데기일 뿐이니까요.”

승우가 손가락을 튕기자, 돌돌 말린 10개의 현수막이 풀어져 내려왔다.

꼭대기부터 내려온 현수막은 양쪽 건물의 벽과 창문을 전부 덮어 버렸다.

부메랑처럼 돌아온 검을 붙잡은 승우는 폭발적으로 뛰어올랐다.

불과 네 걸음 만에 블록 끝에 도착한 승우.

“장례식장에서 틀 영상이 필요한 게 아니시라면, 도망가시는 게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핸드폰을 들고 있던 사람들을 쫓아 낸 승우는 신호탄 한 발을 쏘아 올렸다.

위이이잉~!!

빛을 발산하며 폭발하는 신호탄에선 펑! 하는 일반적인 소리 대신 사이렌 소리가 났다.

이 특별한 재난 경보 장치는 본래 카오스 게이트의 안정화를 경고하기 위한 대피 유도 장치였다.

평소라면 쓸 일이 거의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이게 뭔지는 헌터가 아닌 일반인들도 알고 있었다.

지진이나 화재 대피 훈련처럼 교육을 받으니까.

게다가 지금 여긴 실제 언노운의 모습까지 있었다.

잘못된 경보라며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굳이 따지면 이건 카오스 게이트와는 연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뭐,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니지 않은가.

“그럼 이제….”

신호 총을 빙글 돌린 승우는 그다음을 위해 움직였다.

하늘을 가로지르던 언노운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그 언노운은….’

승우가 마술에 능통하단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그건 절대 단순한 눈속임만이 아니었다.

단순한 풍선 같은 걸로는 절대 저런 역동적인 움직임을 선보일 순 없었을 것이다.

지팡이라 생각되던 녀석의 검.

단서라 할 수 있는 건 역시 그것 정도겠지.

하지만.

“꾸억…!”

거기에 감탄을 할 시간은 없었다.

네모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인지한 수호는 전력으로 네모를 무력화시켜 버렸다.

“맡겨도 되겠지?”

4색 큐브를 집어넣은 용주가 같은 물음을 수지에게 남겼다.

고개를 끄덕인 수지는 잠든 태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

반듯하게 잘려 나간 4층짜리 아파트가 사선으로 미끄러졌다.

절단면을 따라 미끄러진 건물은 엄청난 먼지와 혼란을 일으켰고, 사람들의 비명이 한층 더 크게 증폭되었다.

“까악~ 까악~!!”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들이 하늘을 수놓았고, 그중 일부는 아파트 난간에 일자로 내려앉았다.

“흐흐흐.”

그 순간 들려오는 칙칙한 저음의 웃음소리.

용주, 수지, 수호.

세 사람의 시선은 동시에 같은 곳을 향했다

경계면을 딛고 뛰어내리는 한 마리 말의 모습이 보였다.

중세 시대 기마병처럼 회색빛 철갑으로 중무장을 한 말은 치렁치렁 내려오는 장식들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건 또 뭐야?”

그 위로 역병 의사 가면을 쓴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데스 사이드를 들고 회색 머리를 흩날리는 사내.

검은 롱코트와 같은 색의 톱 해트를 눌러쓴 그는 거대한 관을 지고 있었다.

“흥미롭고, 재미있고,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곤란한 상황. 한마디로 카오스. 흐흐흐.”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전장에 난입한 그리드가 톱 해트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까마귀 두개골이 조형된 데스 사이드에선 영혼 같아 보이는 희미한 아지랑이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

낯선 사내의 등장에 용주와 수지의 경계심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탐욕.

틀림없이 저 사내도 팬텀이었다.

“너는 또 뭐냐?”

경계 태세를 취한 수호가 물었다.

조금 전까지 있던 그 정체 모를 전기톱 녀석과는 달랐다.

저 녀석에게선 기운이 느껴졌다.

어딘가 뒤틀려 있는 기괴한 기운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기 전까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다니….

오늘 하루가 꿈처럼 느껴졌다.

다신 꾸고 싶지 않은 악몽처럼.

“그리드…. 그게 내 이름이지. 이 녀석은 체티. 그리고 이 녀석은 체런.”

그리드의 목소리에 맞춰 앞다리를 들어 올린 말이 울부짖었다.

“하? 그리드? 체티? 체런? 뭔 소릴 하는 거야? 뭐, 다음에 소개시켜 줄 녀석은 체리 정도 되나 보지, 앙?”

수호가 인상을 팍 구겼다.

뭐 하는 녀석인진 몰라도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다.

“흐흐흐. 아쉽게도 그런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친구는 가지고 있지 않아. 기대에 부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군그래.”

“너 이 자식!”

그리드의 음침한 미소가 수호의 신경을 더 자극했다.

완전 무시당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몸이.

태스크 포스의 신생 눈인 이 몸이.

“너… 어떻게 스킬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거냐?”

날을 바짝 세운 수호가 물었다.

녀석이 타고 있는 말은 보통 말이 아니었다.

저건 마나로 불러낸 소환수.

자신의 영역 안에선 형태를 유지하지 못해야 정상인 존재였다.

그런데….

“자신의 질서가 무너지는 데에서 오는 괴로움, 당혹감, 괴리감. 흐흐흐. 그것 또한 카오스지. 흐흐흐.”

말발굽 소리를 또각거린 그리드가 천천히 말을 몰았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묻는 말에나 대답해.”

“흐흐흐.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살았나 보군. 어느 나라 왕자님인가 보지?”

“뭐라고?”

“그럼 특별히 힌트를 주지. 체티가 담을 수 있는 건 체티 보다 작은 것들뿐.”

“뭔 개소리냐, 그게?!”

감정을 실은 수호가 두 주먹을 부딪쳤다.

칼날을 부딪친 원 오브 아이는 그리드를 향해 칼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 장난감을 망가뜨린 건 어느 쪽이지?”

수호의 말을 반쯤 무시한 그리드가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용주와 수지는 단번에 녀석이 말하는 장난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한태영.

녀석이 말한 장난감은 분명 이 녀석이었다.

‘그렇지만 한태영을 데리고 있는 이는 러스트라고 알고 있는데?’

용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팬텀 중 누군가 관여되어 있다면, 당연히 러스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나타난 이는 러스트가 아니었다.

“장난감?”

“일단 넌 아니군.”

의문을 표하는 수호를 힐끔 바라본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태영의 능력을 무력화시킨 건 분명 녀석이었지만,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 건 녀석이 아니었다.

“그럼 남은 건 둘. 둘 중 누구이려나? 내 예측을 벗어난 녀석이.”

“…감히 날 무시해?!”

순간, 욱하는 걸 참지 못한 수호가 그리드에게 달려들었다.

720도 낫을 돌린 그리드는 수호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둘의 충돌에 뜯겨 나간 아스팔트는 현수막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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