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팬텀….’
누가 지었는진 몰라도 이름 하난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팬텀의 사전적 정의는 ‘실체가 없는 것’.
환영이나 유령이 보편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소리 없이 나타났다 소리 없이 사라져서.
그래서 팬텀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역병 의사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도 단순히 신분을 숨기고 싶은 겁쟁이의 발상이라든가.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의 발상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선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망령.
지켜내고 싶었지만, 지키지 못한 무언가.
어쩌면 녀석들은 그런 걸 말하고 싶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방식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웠다.
“다시 한번 묻지. 넌… 누구냐?”
고통스러운 얼굴의 형만이 물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걸로 충격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러스트.”
“다시 한번 더 묻지. 넌 누구냐?”
“…러스트.”
“러스트. 그래. 그럼 하나만 묻자. 너….”
폭발하는 형만의 마나.
사방에서 치솟은 불길은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왜 그 얼굴을 하고 있는 거냐?”
“…….”
“왜 그 녀석의 목소리로 그 녀석의 말투를 하고, 왜 그 녀석의 마나로 그 녀석의 스킬을 쓰고! 왜 그 녀석과 같은 무기를 들고 그 녀석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냔 말이다!!”
“…….”
“다른 녀석들도 이런 식으로 무너뜨렸나?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
“너희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형만의 저돌적인 돌진에 폭발이 뒤따랐다.
지면에서 일어난 그림자들은 서로 엉겨 붙으며 가시넝쿨을 만들어 냈지만, 형만의 돌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너흰 인간의 탈을 쓰고 있기도 아까운 벌레들이다.”
맞부딪치는 대검과 레이피어.
두 사람의 충돌에 충격파가 일었고, 폭발에 날아간 러스트는 호수 위로 튕겨 나갔다.
세 번의 물수제비를 뜬 러스트는 호수 위에 멈춰 섰다.
분명 물 위였지만, 그녀는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를 기준으로 퍼져 나간 검은 그림자는 먹물처럼 호수를 잠식해 나갔다.
쾅!
대검을 지면에 박아넣은 형만은 왼손으로 그녀를 겨눴다.
호수에 비친 하늘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플레임 세츄레이션! (Flame Saturation)”
혜성처럼 쏟아지는 화염.
콰앙!
혜성 하나가 호수를 강타할 때마다 거대한 물보라가 치솟았다.
범람한 물은 근처 산책로를 강타했고, 하얀 수증기가 온천처럼 끓어올랐다.
“망상 – 쇄도.”
사선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혜성을 마주한 러스트는 칼끝을 겨눴다.
푸와앙!!
순간, 솟구치는 물결.
형만이 일으키는 폭발과는 결이 달랐던 폭발 속에선 초승달 모양의 날카로운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그림자들.
꽃이 봉오리 지듯 러스트를 감쌌던 그림자들은 개화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쇄도하는 그림자.
그림자에 찢긴 화염이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하늘을 수놓은 불꽃은 흡사 불꽃놀이.
폭죽이 아닌 폭탄으로 하는 목숨을 건 불꽃놀이 같았다.
“아무에게도 이렇게 한 적 없어.”
마지막 폭발을 등진 러스트가 입을 열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물 폭탄은 그녀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뭐라고?”
“난 언제나 이 모습, 이 목소리…. 인위적으로 바꾼 적도, 누굴 흉내 낸 적도 없어.”
“허튼소리를….”
“언제나라는 부분은 음. 헛소리였을지도 모르겠네. 정정할게.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난 지금 이대로였어.”
“…….”
이를 악문 형만이 대검을 뽑아 들었다.
괴로웠다.
상처 하나 없고, 반격 한 번 당한 적 없지만.
저 얼굴을 마주하고.
저 목소리를 마주하고 있는 게 미칠 듯이 괴로웠다.
걸음을 옮긴 러스트는 호수를 빠져나왔다.
멸망한 세계의 잔해처럼 솟아 있던 그림자들은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럼 네가 말해줄래?”
다시금 형만과 마주한 러스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눈빛에선 왠지 모를 아련함이 느껴졌다.
“네가 말한 그 녀석이란 건 누구야? 이 얼굴, 이 목소리, 이 말투, 이 마나, 이 스킬…. 네가 보고 있는 나는… 누구야?”
그녀의 물음에 형만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의 얼굴로.
그녀의 목소리로.
저렇게 태연하게.
저렇게 똑같이 능청을 떨고 있는 모습에, 당장이라도 이성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후욱!
대답 대신 대검을 휘두른 형만은 러스트를 겨눴다.
순간, 흩뿌려지는 붉은 핏방울.
“……!”
놀란 러스트의 눈동자가 형만의 눈에 비쳤다.
러스트와 형만의 거리는 단 1cm도 줄어들어 있지 않았다.
지금 튄 피는 형만의 피.
대검에 베인 오른 어깨에선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뭐… 하는 거야? 왜 자해를.”
“이런 식으로 깰 악몽은 아닌 모양이군.”
자신의 어깨를 베어 낸 형만이 짙은 숨을 내쉬었다.
어딘가 뒤틀려 있는 이 회색 세계.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이곳조차도 트릭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전부 가짜라고.
사람 하나가 아니라, 이 전체가 허구라고.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이 세계도.
저 앞에 있는 녀석도.
여전히 끔찍한 모습 그대로였다.
“피… 다쳤어.”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는 형만의 모습에 러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짙은 화염의 장벽이 러스트 앞을 가로막았다.
“그 녀석의 얼굴로 그딴 표정 짓지 마라. 역겨우니까.”
형만의 살기에 러스트가 멈춰 섰다.
“그럼… 말해주지 않을래? 그 사람이 누군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찾아 헤매던 게 혹시 그거였을지도 모르니까. 이 공허함이 그걸 듣고 싶다고 그러니까.”
“…….”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형만의 마음속에 작은 흔들림이 일었다.
이 녀석.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 말뿐이었다.
진짜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걸 알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지독한 악몽일 뿐이야. 날 넘어뜨리기 위한 질 나쁜 계략일 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머릿속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깨고 싶은 것인가, 깨고 싶지 않은 것인가, 나는….’
그런 악몽이라 해도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똑같았으니까.
쭉 보고 싶었었으니까.
쭉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만나고 싶다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도 이름 정도라면….’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그걸로 세상이 뒤집힐 일이 생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런 핑계를 대며, 그냥 이름을 한번 불러보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애송이처럼.
“송이….”
형만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주 작은 소리.
티끌처럼 작은 소리는 동시에 일어난 또 다른 소리에 묻혀 버렸다.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인 하늘.
깨진 차원이 유리 파편처럼 떨어졌고.
형만과 러스트.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곳을 향했다.
‘프라이드?’
불청객의 난입에 러스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지면에 착지한 소년은 키도 체격도 머리 색도 프라이드와 비슷했다.
하지만.
‘아니야.’
얼굴에 손을 올린 러스트는 그림자로 얼굴을 가렸다.
저기 있는 소년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프라이드와는 달랐다.
이건 프라이드의 느낌이 아니었다.
“웬 마나가 펼쳐져 있나 해서 와봤더니만, 이거 아무래도 달 뒷면으로 들어와 버린 모양이네.”
소년이 귀에 꽂고 있던 한쪽 이어폰을 뺐다.
백발 소년의 손엔 두 자루의 일본도가 들려 있었다.
“너는… 이시우?”
형만이 놀란 눈을 깜빡였다.
“다쳤네. 그렇다는 건 저기 있는 저게 팬텀 녀석이란 이야기인가?”
형만의 팔을 흘겨본 시우가 물었다.
이 상황을 보아하니, 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네가 어떻게?”
“아아, 말했잖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했다고. 귀찮은 건 딱 질색이긴 한데,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영 꺼림칙해서 말이야. 요 근래 시끄러웠잖아. 덕분에 나도 고생 좀 했고. 그래서 한번 확 부숴 봤지.”
시우가 왼쪽 이어폰을 톡톡 두드렸다.
손가락과 이어폰이 부딪치는 순간 일어난 작은 스파크에 재생되던 음악은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근데 그 꼰대 아저씨도 아니고, 샐러맨더 아저씨가 고전하다니, 의외네. 저쪽 실력이 상당한 모양이지? 아니면 역시 팔 하나의 부재가 뼈아픈 건가?”
시우의 시선이 러스트에게로 향했다.
들었던 역병 의사 가면은 쓰고 있지 않았지만,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체격이나 체형.
그리고 머리카락의 색으로 미루어 보건데, 1순위로 만나고 싶던 녀석이 아니란 것만은 확실했다.
“어이, 팬텀. 너희 동료 중에 백발의 녀석이 있다지?”
“…….”
시우의 물음에 러스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녀석 지금 어디 있냐? 어?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
“내가 그 녀석 때문에 오해받아서 얼마나 개고생한 줄 알아? 그 녀석 위치 불면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끝내 줄게.”
“…….”
“어이, 뭐라고 말 좀 해봐.”
계속된 물음에도 시우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뭐야? 저 녀석 우리말 못 알아먹는 거야? Can you speak Korean?”
영어까지 동원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시큰둥한 표정이 된 시우가 다시 형만을 흘겨보았다.
“아저씨랑 있을 땐 뭐라고 안 했어? 쭉 입꾹닫 하고 저러고 있던 거야, 혹시?”
“…뭐 그런 셈이지.”
형만이 어깨를 들썩였다.
러스트의 의도적인 침묵.
저건 분명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아아~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네. 말로 안 되면 일단 잡아서 직접 안내를 받는 수밖에.”
날을 부딪치는 두 자루의 일본도 사이에 전류가 흘렀다.
섬광과 함께 사라지는 시우의 모습.
번개처럼 러스트의 뒤로 파고든 시우는 허리를 비틀었다.
“겸사겸사 그 녀석들 복수도 해주고 말이야!”
뇌성과 함께 떨어지는 시우의 일격.
기습적인 내려찍기를 선보인 시우는 오른 손목을 빙빙 돌렸다.
확실히.
쉽게 볼 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움직임을 정확히 좇아오던 눈동자는 자신의 공격을 보란 듯이 피해 냈다.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 녀석의 모습은 조금 떨어진 가로등 아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림자를 다루는 건가? 차원을 다루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고. 뭐, 그 이안 아저씨에 비하면 하위 능력 같긴 하지만.”
“…….”
물귀신처럼 반쯤 모습을 드러낸 러스트는 형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걸로 마지막.
그림자 속으로 그녀가 사라지자, 웅덩이졌던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었다.
회색이었던 가로등 빛은 다시 원래 빛깔로 돌아갔다.
불이 번졌던 나무와 풀.
그리고 보도에는 그을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타지 않았고, 아무것도 젖지 않았고, 아무것도 부서져 있지 않았다.
마치 거기서 있던 모든 일들이 신기루였던 것처럼.
달라진 건.
형만의 상처뿐이었다.
“칫! 뭐야? 도망간 거야? 도망 하난 기똥차게 잘 치잖아?”
혀를 찬 시우가 검을 집어넣었다.
이제 막 음악이 클라이맥스로 향하던 참이었는데, 완전 김이 새 버렸다.
“다친 곳은 좀 어때, 아저씨? 걸을 수 있어?”
“끼어든 주제에 우쭐대지 마라, 애송이.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아~ 예. 그래서? 저 녀석 뭐였어? 아저씨랑 한판 붙자고 온 거야?”
“나야 모르지.”
형만이 오른팔의 소매를 잘라 냈다.
잘라 낸 천으로 상처 부위를 압박한 형만은 입으로 매듭을 당겼다.
자기도 모르게 순간 그 이름이 튀어나오고 말았었다.
녀석에게 닿았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쉬운데. 얼굴을 반쯤 뭉개서라도 백발 녀석 위치를 알아내고 싶었는데.”
“……!”
손깍지를 낀 시우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형만의 눈빛이 순간 불꽃처럼 튀었었다.
“뭐… 뭐야? 왜 그러는데?”
“아니다. 아무것도.”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은 형만은 걸음을 옮겼다.
‘뭐야? 뭔데?’
형만의 뒷모습을 보던 시우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왠지 모르게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