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 * *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호수 공원.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형만은 눈을 감고 있었다.
‘물방울 모양의 점이라고….’
아까 용주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매력점이 있는 사람은 넘치고 넘쳤다.
그것만으론 특정 인물을 떠올리긴 힘들 것이다.
떠올린다 한들 개인마다 큰 차이가 있을 것이고.
하지만 그 점의 모양이 조금 특별하다면 어떨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과연 어떨까?
게다가….
‘그 글씨체….’
편지에 적혀 있던 글씨는 프린팅한 게 아니었다.
어디서 오려 붙인 것도 아니었고.
거기 적혀 있던 건 손글씨.
글씨체에 남아 있는 몇 가지 특징들은 형만이 알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그럴 리가 없어.’
깊게 숨을 들이마신 형만은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무슨 목적이고, 무슨 술책인진 몰라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다.
‘러스트…. 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눈을 뜬 형만이 고개를 돌렸다.
호수 저편에 보이는 가로등이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흰색이었던 가로등 빛은 하나둘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일정한 흐름과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서.
“…….”
산책로를 따라오던 회색빛이 코너를 돌자, 한 사람의 모습이 형만의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엔 역병 의사 가면을.
그리고 몸엔 전신을 가리는 검은색 천을 덧쓰고 있었다.
마치 이슬람의 차도르처럼.
또 하나의 가로등이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가로등이었다.
그리고.
형만을 비추던 가로등마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정말로 혼자 왔나 보네.”
“…….”
여인의 목소리에 형만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지금 이 상황.
지금 이 장난.
질이 나빠도 너무 나쁘지 않은가.
“그래. 네가 러스트냐?”
“응. 러스트. 내 이름.”
“…….”
형만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 말투.
이 억양.
이 목소리 톤.
불쾌했다.
진짜 미칠 듯이 불쾌했다.
“어떻게 잘 떼어냈네. 쉽게 떨어져 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러스트가 이야기했다.
주어는 생략되어 있었지만, 그게 용주를 이야기하는 것임을 형만은 알 수 있었다.
“애송이 하나 떼어 내는 거야 일도 아니지.”
“애송이…. 괜찮다면, 그 방법이란 거 들어보고 싶어. 단순 호기심.”
“…….”
형만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너희가 벌여준 일을 적당히 써먹었지.”
“우리가 벌인 일?”
“듣자 하니, 인질을 잡았었다지? 애송이 녀석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
“아…. 응. 그랬었지.”
“이미 전과가 있으니, 인질이 더 있다 해도 의심할 순 없겠지.”
“인질? 그렇지만 난 인질 같은 거 잡고 있지 않은걸.”
“꼭 진실만 말하라는 법은 없지. 의심하지 못할 이유면 그걸로 충분한 거다. 게다가….”
형만에게서 순간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인질이라면 실제로 잡고 있지 않나, 살인자?”
“인질?”
러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발 늦게 그리드가 잡아두었던 헌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그 사람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음. 확실히. 있긴 있네. 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왜 그 녀석을 잡아간 거냐? 이형 결정체와 헌터들의 목숨을 대가로 뭘 얻고 싶은 거지?”
“대답해 줄 수 없어. 그리드. 보스. 어떤 생각 하고 있는지 난 모르니까.”
‘그리드?’
형만이 이름을 되새겼다.
‘탐욕’이라는 뜻을 가진 녀석이 한태영을 잡아간 녀석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냐? 네가 원하고 행동한 거니 이 질문엔 답을 할 수 있겠지?”
형만이 질문을 바꿔 물었다.
“응. 널 보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거든.”
“떠올라?”
“응. 기억. 누구인지도,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기억. 문 너머에 있는 그것들이. 내 머릿속에 낀 뿌연 안개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했거든. 내가 찾아 헤매던 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왜 하필 나냐?”
“음. 글쎄.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날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응.”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러스트.
적대적 관계일.
아니, 적대적 관계인 두 사람 사이엔 묘한 적막감이 흘렀다.
“그래서? 원하는 결과는 손에 넣었나?”
“음. 아니. 뭔가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별다른 느낌은 없네.”
“…그래?”
깊게 눈을 감았던 형만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회색빛으로 물든 호수에 움직임은 없었다.
“그럼 이번엔 내가 하나 물어볼까 하는데.”
형만의 시선이 천천히 러스트에게로 돌아왔다.
화르륵!
그 순간, 피어오르는 맹렬한 화염.
두 사람을 감싸며 피어오른 화염은 동그란 링을 만들었다.
“넌 누구냐?”
“…….”
질문을 던진 형만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고통. 분노. 괴로움.
그런 감정들이 느껴지는 그의 얼굴이었다.
“그새 까먹은 거야? 러스트….”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형만의 언성이 순간 높아졌다.
“네 원래 이름은 뭐냐? 네 원래 목소리와 말투는 어떤 거지?”
형만의 물음에 러스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
“말해. 왜 내 앞에서 그런 목소리로, 그런 말투를 쓰고 있는 건지. 대체 왜?! 대체 뭣 때문에?!”
움켜쥔 형만의 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끝까지 장난질을 해보겠다는 거냐? 그 가면 뒤에서?”
형만이 발을 구르자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바로 근처에서 일어난 폭발에도 러스트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형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난 내 목소리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을 뿐이야.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도, 뭔가를 바라고 그러는 것도 아니야.”
“그 말을 나보고 믿으란 거냐? 이 질 나쁜 장난에 악의는 없다고?”
“응.”
빠드득!
태연한 그녀의 한마디에 형만이 이를 갈았다.
자신의 평정심을 무너뜨리는 게 목적이라면, 그 어떤 방법보다도 효과적인 방법을 골랐다고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다음에는 목을 베어 버리겠지만.
“가면을 벗어라, 러스트. 네 정체를 보여라.”
형만이 짊어지고 있던 대검을 뽑아 들었다.
러스트는 텅 빈 형만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외팔의 검사.
거기서 봤던 사람들 중엔 역시 이런 사람은 없었다.
“왜?”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싫다고 하면?”
러스트의 그림자가 순간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림자에 삼켜진 불길은 땅속으로 빨려들어 가듯이 사라졌다.
“힘으로 벗게 만드는 수밖에.”
용솟음치는 빨간 불길.
형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는 그의 진심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한쪽 팔로 괜찮겠어?”
“너 같은 애송이를 상대로 두 팔은 사치지.”
“……!”
애송이.
자신을 향한 그 단어에 순간 머리가 찌릿했다.
글자가 아닌 목소리로 형만의 이름을 들었던.
그때처럼.
“진짜로 하려는가 보네?”
“한 번의 승리로 네가 내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너흰 나와 붙어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너랑은 싸우고 싶지 않다고 해도?”
“병행할 수 없는 선택지다.”
“그거 유감이네.”
차도르 안쪽 허리춤에 손을 넣은 러스트는 검을 뽑았다.
흑장미가 장식된 얇고 뾰족한 검.
그녀의 무기는 레이피어였다.
“정말정말 너랑은 싸우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조용히 둘이 보고 싶던 거였는데. 지금도 마찬가진데.”
“…….”
대검 손잡이를 타고 오른 불길이 칼날을 타고 흩뿌려졌다.
형만이 오른발을 차며 나가자 강렬한 폭발이 일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우측으로 바짝 당겼던 형만의 대검이 폭력적으로 공기를 찢었다.
레이피어를 맞대려던 러스트는 직감적으로 가드 대신 회피를 선택했다.
힘에선 밀린다.
검을 대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검이 그린 궤도론 한발 늦게 화염이 따라왔다.
타이밍을 노려 반격을 시도했었다면, 분명 후속타에 휘말렸을 것이다.
몰아치는 형만과 유연하게 대처하는 러스트.
10초 남짓한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이동한 거리는 벌써 50m나 됐다.
왼쪽 아래에서 올려 치는 형만의 일격을 흘려보내던 러스트가 왼손을 까딱였다.
순간, 일그러지는 형만의 그림자.
회색 가로등에 비치던 형만의 그림자에선 뾰족한 가시들이 치솟아 올랐다.
“왜 하필 레이피어냐?”
알고 있었단 듯이 반응한 형만은 손등으로 그림자를 때렸다.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부서진 가시는 힘의 방향대로 지면에 흩뿌려졌다.
“대체 어디까지 장난을 치고, 어디까지 사람 마음을 짓밟아야 속이 시원한 거냐?”
마나를 타고 피어오른 불길이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발밑에서 일어난 폭발에 러스트는 공중으로 도약했다.
“플레임 인젝터!”
대검을 타고 오르는 불꽃.
용솟음친 불기둥은 순식간에 러스트를 집어삼켰다.
호수에 보이는 불의 모습은 흡사 승천하는 한 마리의 이무기를 보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회전하던 불의 흐름이 일순간 정지했다.
시간이 멈춘 그림 같은 풍경.
금이 간 공간은 일순간 깨지며 흩뿌려졌다.
그림에서 사라진 건 단 하나.
형만이 만든 불기둥뿐이었다.
“왜…?”
가로등 위에 내려앉은 러스트가 물었다.
형만의 살기는 분명 진담이었다.
방금 그 마나도.
방금 그 스킬도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상했다.
“왜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거야?”
괴리감이 느껴졌다.
고통. 분노. 괴로움.
태연한 척 연기하고 있었지만, 아까 느꼈던 감정들은 여전히 그의 곁을 머물고 있었다.
아니, 아까보다 더 짙고 끈적하게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료를 잃은 슬픔이나 분노.
그런 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그의 분노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촛불처럼 느껴졌다.
위로해주고 싶고, 감싸주고 싶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준 형만이 대검을 하늘 높이 던졌다.
그의 돌발 행동에 러스트의 시선이 대검을 따라갔다.
그리고.
“인페르노!”
형만의 스킬이 또 한 번 작렬했다.
지면을 때린 형만의 왼팔을 기준으로 강렬한 열파가 퍼져 나갔다.
열기가 끓어오른 지면에선 화염이 일었고, 두 사람을 감싼 세 겹의 원이 만들어졌다.
쾅! 쾅!! 쾅!!!
잔불처럼 일렁이던 불길은 일순간 거대한 소리를 내며 폭발을 일으켰다.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세 번의 폭발.
확산하는 열파에 나무와 풀들이 타올랐고, 잔잔하던 호숫물이 튀어 올랐다.
“…….”
집어 던졌던 대검을 정확히 받아든 형만은 어깨에 검을 걸쳤다.
타오르고 있었다.
대지가.
대기가.
그리고 역병 의사가.
“굉장한 위력이네. 놀랐어.”
러스트가 이야기했다.
그녀는 가로등 위가 아닌 잔불이 일렁이는 보도 위에 있었다.
그녀의 피부엔 그을음 하나 없었지만,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불길에 휩쓸린 차도르는 넝마가 되어 있었고, 아직도 잔불이 붙어 있었다.
“정통으로 다 맞았으면, 곱게는 못 끝냈을 거 같네.”
불이 붙은 가면을 타고 계속해서 열기가 느껴졌다.
가면의 부리 부분은 이미 타 재가 되었고, 그 아래로 코와 입술이 보였다.
잔불은 계속해서 가면을 갉아 먹고 있었다.
형만의 공격이 직격한 직후.
러스트 역시도 스킬로 대응했었다.
망상 - 심연.
마나로 만들어진 또 다른 차원으로 몸을 숨겼지만, 이미 입은 데미지까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뺨을 지난 불길은 러스트의 눈가로 향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건 바람이 아니라 햇볕 이랬던가? 힘으로 벗긴 거면, 이것도 힘으로 벗긴 거긴 하네.”
가면에 손을 올린 러스트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얼굴에 형만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혼란스럽다.
그런 말로는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생각과 감정이 급격하게 요동쳤다.
“…….”
눈앞에 벌어진 현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텅 빈 오른 어깨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얼굴을 짚고 싶었지만, 짚을 순 없었다.
짚을 손이 거기 없었으니까.
“…질 나쁜 장난인 줄 알았더니, 심연 속에서 기어 올라온 악몽이었던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형만이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아니, 잡히진 않았지만, 어떻게든 그러려고 했다.
침착하고 싶어도, 침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기 있는 건.
절대로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얼굴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