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진각성? 한태영 그 녀석이?”
마지막으로 봤던 태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못 믿겠다는 눈치군.”
“아니,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윤 없겠지. 그렇지만 녀석을 왜? 팬텀의 목적은 이형 결정체와 헌터들의 힘 아니었던가?”
용주가 의문을 표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굳이 헌터를 납치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윤현처럼 개인적인 복수심이나 그런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또 모를까.
“목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난 게이트 습격 당시 팬텀이 놈을 데려간 건 사실이다.”
“혼자 오지 않거나, 딴 수작을 부린다면 녀석을 해하겠다? 뭐, 그런 식으로 적혀 있던 거냐?”
“더 말할 가치가 있는 질문인가 싶은데.”
“…….”
용주의 눈을 빤히 보던 형만이 뒤돌아섰다.
점점 벌어지는 두 사람의 거리.
“나한테 했던 말, 잊은 건 아니겠지?”
형만의 뒷모습을 보던 용주가 입을 열었다.
순간, 멈칫하며 멈춰선 형만은 고개를 돌렸다.
“쯧! 건방진 애송이 같으니라고.”
혀를 찬 형만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등을 보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 * *
방으로 돌아온 용주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단체로 벌을 서는 것도 아니고, 다들 하나같이 딱딱한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생각보다 금방 왔네. 어디 얻어터지지도 않은 모양이고.”
서윤이 이야기했다.
분위기가 분위기였던 터라 조금 더 과격해질지도 모르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거기까진 가지 않은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얻어터지고 나서 능청을 떨고 있는 거라든가.
“…….”
말없이 다가온 수지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받으라는 무언의 사인이었다.
“샤워실, 저기.”
“뭐?”
“마음대로 써도 좋댔어. 갈아입을 옷은 여기.”
“어이어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이 생략한 거 아니야?”
서윤이 곤란한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 나간 사이에 잠깐 우리끼리 이야기를 좀 했거든. 아무리 그래도 네 그 몰골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다라는 쪽으로 의견이 쏠렸어.”
서윤의 부연 설명에 용주는 그제야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쏴아아.
샤워 부스에 들어간 용주는 물을 틀었다.
쏟아지는 물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을 맴돌던 이런저런 생각들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닌 건가?’
러스트와 형만.
형만은 그녀에 대해 짚이는 구석이 없다고 했지만, 그녀의 기억 속 공간에서 봤던 사내의 억양은 확실히 형만과 닮아 있었다.
‘한태영은 그사이 진각성을 했다고 하고….’
그간 어떤 일을 더 경험했는지는 몰라도 그건 확실히 축하할 일이었다.
제법 힘든 시간을 이겨 낸 녀석이었으니, 그럴 자격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녀석의 바람대로 더 상위 게이트에서 마주했다면 분명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초점을 두어야 하는 건 거기가 아니었다.
‘목적이 뭐지?’
두 가지 이유에서 모두 묻는 질문이었다.
왜 태영을 데려간 것인가.
러스트는 왜 인질을 들먹이면서까지 형만을 만나려는 것인가.
‘녀석이 가진 힘이 목적인가?’
더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 작은 물고기를 미끼로 던진다.
말이 되는 해석이긴 했다.
한쪽 팔을 잃고 전력이 약화되긴 했지만, 형만이 가진 힘 자체는 A급 헌터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힘일 테니까.
하지만 역시 완전히 납득되는 해석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러스트가 개인행동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젠장.’
정답지 없는 퍼즐을 이리저리 맞추던 용주가 신경질적으로 샴푸를 풀었다.
‘눈…. 아니, 새로운 눈이랬던가. 태스크 포스 쪽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다른 가지를 잡은 용주는 생각을 이어 갔다.
동제는 잘한 선택이었다고 했지만, 솔직히 그때의 선택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결과적으로 동생에게 악영향을 끼쳐 버렸으니 말이다.
‘같은 상황이 와도 분명 같은 선택을 했겠지.’
당시 상황에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힘.
더 성장해 나타난 윤현과 그를 가볍게 압도하는 러스트의 모습.
그걸 보며 쫓긴다는 위기감이 엄습해 왔었다.
이대로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을 거란 생각이 확신처럼 느껴졌었다.
조건을 충족시키고, 시련이란 걸 이겨 내면, 분명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다.
그것만 생각했고, 행동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헌터들의 범죄를 잡아내는 기관 태스크 포스. 헌터의 기운을 탐지하는 데 특화된 인물인 눈….’
용주의 생각이 거기 한참을 머물렀다.
뭔가….
뭔가가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잠깐만….’
태스크 포스는 헌터들의 범죄에 움직이는 기관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다른 범죄들에도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
최근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라면 역시.
카오스 게이트 습격.
범죄의 중함을 저울질하는 건 부적절한 일일지 모르지만, 희생자가 있는 쪽이 결코 더 가볍지는 못할 것이다.
‘눈이 없다면 모를까, 새로운 눈이 있다면, 팬텀을 추격하는 게 먼저인 거 아닌가?’
이야기의 흐름상 눈이란 인물은 한 명이었다.
눈이 여럿이었다면, 공석이 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을 테니까.
‘눈’이란 자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정도 기관의 그 정도 자리라면 예사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점이 생긴다.
눈이란 자가 팬텀의 동선이나 위치를 특정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이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윤현, 프라이드, 러스트.
직접 마주했던 셋의 전력만 봐도 결코 범상치 않았다.
상황적으로 좋지 않은 걸 감안하더라도 A급 헌터들이 당했다는 부분에서 그들의 전력에 더 이상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런 자들과 전면전에 들어갔다면, 결코 조용히 지나가진 못하지 않겠는가?
‘단순히 내 정보의 공백일 뿐인 건가?’
수지나 동제에게 한번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사람이라면 자신보단 길드 내부의 정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 * *
“꽤 잘 어울리네.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서윤이 물었다.
용주의 새 옷은 원래 용주가 즐겨 입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래. 아주 딱 맞는군.”
“그래? 다행이네.”
서윤이 수지를 힐끔 바라보았다.
디자인을 고른 이는 서윤이었지만, 사이즈를 고른 이는 수지였다.
“입던 옷은 어떻게 했어?”
“일단 손빨래를 하긴 했다만.”
용주가 들고나온 쇼핑백을 보였다.
쇼핑백에 함께 있던 비닐봉지가 있었기에 담긴 했는데, 옷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빨고, 꿰매도 100% 누더기겠지.
“특별히 중요하다거나 사연이 있는 옷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서윤이 물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
“그래?”
서윤이 단번에 쇼핑백을 낚아챘다.
“옛말에 그런 말 있잖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새 옷 입었으니까, 이건 버리는 걸로. 상관없지?”
“그런 것도 옛말로 치는 거냐?”
“내가 그러고 싶으면 그러는 거지, 뭐.”
쇼핑백을 꾹꾹 접은 서윤이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에 쇼핑백을 쑤셔 넣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다만.”
수지와 눈을 맞춘 용주가 입을 열었다.
“태스크 포스는 지난 사건들에 대해서도 움직이고 있는 거냐? 그러니까 윤현이 첫 기습을 가해 왔던 사건과 그… 상급 헌터들이 습격당했던 그 사건에 대해서도.”
“…자세한 것까진 몰라.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선 아닌 걸로 알고 있고.”
“그래?”
용주가 미간을 좁혔다.
지이잉!
그때.
용주의 핸드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문자를 확인한 용주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상하다니, 뭐가요?”
주원이 물었다.
“태스크 포스는 헌터들의 범죄를 수사하기 위한 기관. 그런데 녀석들은 왜 움직이지 않았을까? 그들이 보기엔 팬텀 역시도 헌터일 텐데.”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헌터라 그런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닐 거야. 마나나 스킬에 관여되어 있는 사건이면 태스크 포스가 움직일 명분은 충분하니까.”
주원의 물음에 수지가 대답했다.
“어… 그런가요?”
“둘 사이의 차이라면 카오스 게이트 안에서 일어났냐 아니냐의 차이 정도를 둘 수 있겠네요. 일단은.”
승우가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이런 가정은 어떨까요? 길드에서 태스크 포스에 어떠한 요청도 하지 않았다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승우 형?”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길드 차원에서 사건들을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게 했던 거죠. 그런 일이 일어났단 걸 알면, 일반 시민들도, 헌터들도 난리가 날 테고… 사회 안전과 기반이 흔들릴 테니까요.”
“그렇지만 합동 영결식도 했는데?”
예나가 의문을 제기했다.
“현충원의 합동 영결식이 꼭 팬텀을 지목하진 않습니다, 아가씨.”
“…….”
“언노운을 상대로 싸우다 명예로운 죽음을 맞았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방향이죠.”
“그런….”
예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다가 분노를 통제하기에도 아주 안성맞춤이죠. 유가족의 슬픔은 언노운을 향할 테고, 헌터에 대한 명예와 의존도는 더 올라갈 테니까요. 길드 입장에선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인 셈입니다.”
“장사라니. 난… 난 도저히 이해 못 하겠어.”
버티를 끌어안은 예나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어떻게 사람 목숨이 들어간 일에 그런 계산이 들어가느냔 말이다.
“뭐,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일 뿐입니다, 아가씨. 저도 그리고 여기 있는 누구도 그런 걸 바라진 않습니다.”
“그게 아니면 태스크 포스 쪽에서 묵살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지.”
긴 침묵을 지키던 금화가 무겁게 깍지를 꼈다.
그의 얼굴엔 깊은 고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건 또 무슨 의미예요?”
“팬텀과 테스트 포스가 모종의 계약 관계일 가능성.”
“계약? 에이~ 금화 형, 그건 좀 너무 나간 거 아닐까요?”
주원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이야기했다.
비유하자면, 마피아와 형사인 두 조직이 어떻게 같은 편일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아예 가능성이 0이진 않을 수도 있지.”
용주의 목소리에 주원의 시선이 옮겨 갔다.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고요?”
“눈. 태스크 포스에 정말 그런 자가 있다면, 팬텀을 수색하는 게 가능하겠지. 제대로 수사에 들어갔다면, 성과를 냈어도 이상한 시점은 아니고.”
“…….”
“물론, 새 눈의 성능이 기준 미달이거나, 팬텀이 수를 써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가능성의 하나일 뿐이란 거고.”
용주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걸로 뭘 얻을 수 있는데요?”
“…글쎄. 어쩌면 목적은 다르지만 타깃이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
“…….”
주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우리나라 말이었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한 게, 갑자기 딴 세상에 와버린 느낌이 들었다.
“태스크 포스에 관한 건 태스크 포스에게. 그리고 눈에 대한 건 역시 눈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눈에게 물어본다고?”
놀란 수지의 눈망울이 깜빡였다.
“그래. 팬텀의 타깃은 미지수지만, 눈의 타깃은 명확하니까. 녀석에게 직접 물어보면, 부족한 퍼즐 조각을 찾을 수 있을 거다.”
TF와의 전면전은 지양해 달라.
동제가 했던 말을 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역시 이 방법만큼 빠르고 직관적인 방법이 없었다.
“…….”
순간, 용주의 손을 붙잡은 수지가 용주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위험하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건 분명 그거였다.
“길드 쪽에 협조해 달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난 길드 녀석들을 신뢰하지 않아서 말이야. 녀석들에게 등을 맡긴 건 한 번이면 족해. 여기서부턴 나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책임질 거다.”
수지의 손목을 잡은 용주가 그녀의 손길을 떼어 냈다.
그 순간.
“혼자 아니야.”
마른침을 삼킨 수지가 다시 용주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에게선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뭐야, 그 오글거리는 대사는.”
피식 웃어 보인 서윤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단 듯 용주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붙잡았다.
“뭐, 이왕 같은 배를 탄 거, 끝까지 같이 해줄게. 우리… 그… 파트너잖아.”
시선을 피한 서윤이 머리를 배배 꼬았다.
“오그라든 거 맞죠, 누나?”
“너…! 너 갑자기 이럴 때만 똑똑해지지 말란 말이야! 바보야!”
주원의 물음에 서윤이 버럭 화를 냈다.
“하핫. 하하하하!”
두 사람의 대화에 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식 없는 그녀의 웃음에 승우는 조금은 안심이 된단 얼굴이 되었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건만.
마지막으로 이 웃음을 들은 게 벌써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